‘비틀쥬스’

가족의 빈틈 사이, 유사가족의 위안

우수 컨텐츠 잡지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9년 12월 16일 9:00 오전

기타노 다케시는 ‘누가 보는 사람만 없다면 슬쩍 갖다 버리고 싶은 존재’라고 가족을 정의했다. 그럼에도 가족이란 군내 나는 단어는 묵직한 정서적 환기를 불러일으키는 이상한 힘이 있다. 흉터처럼 잊고 살지만 지워지지 않고, 삶의 언저리로 밀어내 보아도 어느새 그 구심력으로 생활의 한 가운데로 다시 돌아오고야 만다. 그래서 다시 가족을 찾고, 가족에게서 위안을 찾고, 함께 모여 북적이며 비비적대는 시간을 그리워하게 된다. 세계적인 축제가 벌어지는 12월, 부산스러운 날들 사이로 혼자인 사람들은 마치 크리스마스의 고아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기도 한다. 그래서 따뜻한 위안이 필요한 시간이다.

팀 버튼의 색채가 묻어난 기괴한 영화

가족. 멀리서 떨어져 보면 하나의 그림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사이는 미세하게 균열이 나 있다. 완성된 그림으로 보이는 가족도 있지만, 아무리 채워보려 해도 어긋난 그림 같은 가족들도 있다. 팀 버튼의 영화 속에 등장하는 가족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조금씩 어긋나 있다. 그리고 그 균열은 외부에서 불쑥 나타난 이방인이 메워준다. 그들은 유사가족이 되어 서로의 틈을 단단하게 엮는다. 팀 버튼의 ‘비틀쥬스(Beetlejuice, 1988)’ 역시 유령과 반항아 소녀가 만나 만들어가는 유사가족의 이야기를 따뜻하게 품고 있는 영화다. 미국 내에서는 800만 달러의 예산으로 4천만 달러가 넘는 수익을 올렸던 ‘피위의 대모험’(1985)이 오늘의 팀 버튼을 만든 영화로 평가받고 있지만 전 세계 영화 애호가들에게 팀 버튼이란 이름을 알린 영화의 시작은 바로 ‘비틀쥬스’다. 이 영화는 극장에서의 미지근한 반응을 거친 뒤, 비디오를 통해 구전되고 재발견되면서 결국 B급 컬트영화의 고전이 되었다.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재기 넘치는 팀 버튼의 스타일이 조악한 CG와 과장된 연기 사이에서 겉돌며, 이상하게 더 흥겨움을 주는 영화다. 예산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다. B급 영화처럼 보이게 만들어달라는 주문으로 영화 CG팀은 일부러 예산을 쓰지 않고 스톱모션 애니메이션과 CG를 뒤섞으며 화면이 더욱 인공적이고 조악스러워 보이게 만들었다고 한다. 고딕 영화라 불리는 고전 호러영화에서 영감을 얻은 세트와 소품은 물론, 르네 마그리트의 초현실주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모래벌레의 사막 풍경 등, ‘비틀쥬스’의 세트는 독일 표현주의 무대처럼 보인다. 기하학적으로 비틀어진 세트는 광기와 공포를 주지만 기괴하면서도 귀여운 캐릭터들은 그 사이에서 묘한 웃음을 만들어 낸다. 한국에서는 극장에서 개봉하지 못하고 ‘유령수업’이라는 제목으로 비디오 출시되었던 이 영화는 너무나 기괴하고 독창적인 색채 때문에 조화를 이룰 수 없다는 이유로 디즈니에서 해고된 팀 버튼이 보란 듯이 만들어낸, 비틀어진 팀 버튼 판타지 월드의 시작이기도 하다. 잔혹해 보이지만 따뜻하고, 기괴하지만 귀여운 감성이 잘 나타나 있다. 유령과 괴물, 사람이 함께 어우러져 한 집에서 유사가족을 이뤄낸다는 정서는 못내 따뜻하다.

영화가 시작되면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한가하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는 아담과 바바라 부부의 일상을 보게 된다. 그들은 세상의 사람이 아닌 것처럼 순진하고 착하다. 하지만 어처구니없는 사고로 목숨을 잃고 유령이 된다. 그들은 행복했던 날들을 잊지 못하고 집을 천국으로 삼고 살아간다. 그러던 그들의 삶을 방해하는 것은 이기적이고 떠들썩한 찰스 가족이다. 찰스 가족은 집을 개조하며 엉망으로 만들고, 유령 부부는 자신들의 삶이 방해받는 것을 거부하고 그들을 쫓아내려고 유령 소동을 벌인다. 하지만 선량하고 순진한 유령들의 소동은 실패하고, 이때 나타난 악당 비틀쥬스가 찰스의 딸인 리디아를 속여 결혼식까지 열게 되면서, 아담과 바바라, 그리고 리디아의 가족들은 위기에 빠진다. 팀 버튼의 전작 ‘프랑켄위니’에서 환생한 강아지가 주인공이었던 것처럼, ‘비틀쥬스’의 주인공은 자신들이 살던 집을 떠나지 못하는 유령 부부다. 그리고 어른들의 지지부진한 삶을 견디지 못하고 반항하는 리디아가 등장한다. 엄마를 잃고 정을 붙일 수 없는 계모와 자기밖에 모르는 아빠 사이에서 고아 같은 삶을 살던 리디아는 착한 아담과 바바라를 심정적으로는 자신의 가족으로 받아들인다. ‘비틀쥬스’는 리디아를 중심으로 보자면 일종의 성장 영화인데, 그녀는 친부모가 아닌 유령과의 소통을 통해 성숙한 인격체로 거듭난다. 이를 통해 백설 공주가 나타나기 전 숲의 주인이었던 난쟁이들처럼, 아담과 바바라는 리디아라는 공주의 등장으로 둘만의 천국이 아닌, 공생하는 삶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리디아에게 키스해 줄 왕자는 나타나지 않지만, 그녀의 사춘기적 환상은 훌쩍 커버린 정신적 크기로 보상받는다.

뮤지컬에서 인간적이고 다정하게 변한 등장인물

뮤지컬 ‘비틀쥬스’는 이미 2018년 워싱턴에서 시연회를 거친 후 2019년 3월 브로드웨이에서 세계 초연했다. 최초 시연회 반응이 좋지 않아, 많은 것들을 변경한 후 뉴욕 공연에서는 큰 인기를 얻었다. 관객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것은 팀 버튼 특유의 일그러진 상상력이 어떻게 무대화되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우려와 달리 영화보다 더욱 세련된 비주얼로 더 환상적이고 역동적인 장면들을 만들어냈다. 머리가 쪼그라진 유령, 모래 벌레, 무서운 척하지만 귀엽고 말았던 부부의 분장 장면 등 영화 속 모습이 그대로 무대화될 때 관객들이 탄성을 내지른다. 뮤지컬에서는 장난기 심했던 원작의 이야기에 가족 드라마를 더욱 강화했다. 뮤지컬을 함께 보는 가족 단위의 관객들을 위해 가족애와 소녀의 성장 이야기를 또렷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영화에서는 다소 극단적이고 시니컬하게 그려진 리디아가 어머니를 잃은 슬픔에 힘겨워하는 소녀로 그려지고, 아버지와의 팽팽한 갈등 역시 훈훈하게 마무리된다. 영화에서는 조연이었던 비틀쥬스는 훨씬 더 귀엽고 다정한 주연으로 변한다. 2019년 토니 어워드에서 작품상·대본상·스코어상·남우주연상·무대 디자인상 등 총 8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됐지만, 아쉽게도 무관에 그쳤다. 영화와 뮤지컬이 어떻게 다르고, 또 얼마나 생생한 재미와 감동을 줄지는 무대에서 확인해볼 수 있을 것이다.

*무비컬(movical)

무비(movie)와 뮤지컬(musical)의 합성어로, 인기 있는 영화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뮤지컬의 새로운 장르로 떠오르고 있다. 최근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되고 있는 뮤지컬의 1/3 이상이 무비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19년에는 저예산 영화 에이드리언 쉘리 감독의 ‘웨이트리스’(2007), 팀 버튼 감독의 ‘비틀쥬스’(1988), 바즈 루어만 감독의 ‘물랑루즈’(2001) 등을 원작으로 한 무비컬이 브로드웨이에서 각광받고 있다.

 

 

최재훈(영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서울문화재단에서 근무하고 있다. 37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수상 후 각종 매체에 영화·문화예술 관련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Leave a reply

Back to site top
Translat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