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영감의 네비게이터
베를린은 지난 2018년 말 ‘밀레니얼 세대가 선호하는 대도시’(글로벌 아파트임대 플랫폼 네스트픽)로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그로부터 한 해전인 2017년에는 ‘스타트업하기 좋은 도시’ 1위로도 꼽혔다. 실제로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스타트 업이 상주하고 있는 도시(2019)다.
이런 지표가 의미하는 건 무엇일까. 젊은이들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고 실현하는데 베를린이 적합한 환경을 갖추고 있다는 건 아닐까. 그리고 이러한 아이디어를 가져다주는 영감의 장소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이곳에 거주하는 한국의 젊은 음악가들이 가장 애정하는 장소는 어디일까? 일상 속 쉽게 만날 수 있는 카페나 공원부터 대규모 소장품을 자랑하는 박물관까지, 예술가들이 추천하는 문화 공간을 따라가 본다
지휘자·비올리스트 이승원
베를린 악기 박물관 박물관이 살아 있다
베를린 악기 박물관(Musikinstrumenten-Museum)은 1888년 베를린 로열 아카데미에 의해 설립됐다.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요아힘과 바흐의 전기를 쓴 음악학자로 잘 알려진 필립 스피타의 소장품들이 모여 첫 컬렉션을 이뤘다. 현재는 독일에서 가장 큰 악기 박물관으로 3,500여 개 악기를 소장하고 있다. 16세기 시대악기부터 현대 전자악기에 이르기까지 오랜 역사를 따라 변화한 악기들의 모양새를 확인할 수 있고, 보기 드문 내추럴 호른·하프시코드·류트 등의 악기들도 만나볼 수 있다.
베를린 악기 박물관은 포츠다머 광장에 위치한다. 이승원은 포츠다머 광장을 서울의 광화문에 빗댔다. 공연장·대형 서점·갤러리 및 미술관·각종 상업시설 등이 모두 모여 있는 복합문화 구역이라는 점에서다. 베를린 악기 박물관 바로 옆에는 베를린 필하모니가 있고, 오랜 명화가 다수 전시된 게멜데 갤러리, 한국의 교보문고와 자주 비견되는 문화백화점 두스만(Dussmann) 등이 인접해 있다. 언급된 공간들 역시 이승원이 추천하는 베를린의 문화 베뉴다. 이승원은 “이 도시를 사랑하는 이유 중 하나는 새것과 옛것이 잘 어우러져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예를 들어 베를린에선 옛 건물을 허무는 대신 내부만 현대적으로 개보수해 사용하는 일이 흔하다. 지금처럼 도시화를 이루기 전까지가난한 예술가들이 베를린을 점거하던 방식이었는데, 오늘날에 들어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으로까지 발전했다. 이런 방법을 통해 수백 년 전 지어진 건물에서 오늘의 베를리너들은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 베를린의 악기 박물관이 특별한 이유도 일맥상통하다. 이곳에 전시된 악기들은 대부분 연주 가능한 상태로 보존되고 있다. 가이드 투어에서는 가이드가 이곳의 악기들을 직접 연주해주며 생생한 경험을 제공한다. 심지어 박물관 2층에 꾸며진 홀에서는 매주 이 악기들을 든 연주자들의 공연도 관람할 수 있다. 이 악기들은 여전히 ‘현재’를 사는 셈이다.
비올리스트·발트앙상블 감독 최경환
티어가르텐 언제나 늘 그 자리에
독일어로 ‘숲’을 의미하는 발트(Wald)앙상블의 리더이자 비올리스트 최경환의 추천 스폿이다. 베를린의 대표 명소들을 아우르는 대공원 티어가르텐(Tiergarten). 베를린 동쪽에서 볼 때 공원의 시작은 브란덴부르크 문이다. 이곳을 넘어 길게 대로가 뻗어 있고 그를 중심으로 양쪽에 푸르른 녹지대가 형성돼 있다.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한참을 직진하면 또 다른 관광 포인트이기도 한 승전기념탑이 등장한다. 마치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처럼 승전기념탑을 중심으로 여섯 갈래로 길이 나누어진다. 서쪽으로 계속 이동하면 독일에서 가장 오래되고 잘 알려진 동물원도 들러볼 수 있다. 공원 내 목을 축일만 한 카페나 비어 가든도 있다. 최경환이 그중에서도 추천하는 곳은 카페 암 노이언 제(Cafe am Neuen See).
여행객뿐만 아니라 베를린 시민에게도 이곳은 특별하다. 비가 많이 오지 않는다면 티어가르텐은 언제나 조깅을 하거나 보드 또는 자전거를 타고 산책하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특히 이곳의 여름은 눈부시다. 초록빛 숲을 무대 삼고 맑고 푸른 하늘을 벗 삼아 한가로운 낮잠을 즐기거나 책을 읽는 등 휴식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최경환에게 이 공원은 최근 들어 가속화되고 있는 도시화의 과정에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는 공간이다.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베를린 사람들의 안식처가 되어주는 것이다. 하지만 티어가르텐이 오늘의 모습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베를린의 대부분의 지역이 그렇듯 티어가르텐은 2차 세계대전 중 크게 파괴됐다. 특히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4년 베를린을 관통하는 격전이 일어나면서 피해가 컸다. 전쟁의 여파도 이어졌다. 1945~6년 겨울 극심한 석탄 부족에 직면한 베를린 시민들은 공원에 남은 나무를 잘라내 연료로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공원은 1949년부터 독일 국민들에 의해 다시 생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분단의 상황에서조차 독일 전역에서 나무를 기부하는 행렬이 이어진 덕분이었다. 최경환은 “티어가르텐은 베를린의 동쪽과 서쪽을 잇는 다리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언급하기도 했는데, 여기엔 생각보다 깊은 역사가 담겨 있었다.
바수니스트·베를린 방송교향악단 수석 유성권
더 스토어 X 힙한 베를린의 풍경이 궁금하다면
인스타그램·유튜브를 통해 음악·패션·음식 등에 관한 다양한 관심사를 나누고 있는 바수니스트 유성권의 개성이 드러나는 곳이다. 그에 따르면, 더 스토어 X(The Store X)가 위치한 베를린 플렌츠라우어 베르크는 요즘 젊은 세대 사이 주목받고 있는 서울 한남동과 비슷한 정취를 풍긴다. 트렌디한 카페와 바, 편집숍 등이 밀집된 구역인 것이다. 더 스토어 X는 카페와 편집숍을 겸하면서도 스튜디오 전시가 이루어지기도 하는 복합문화공간이다. 최근의 편집숍 추세에 맞게 의류를 넘어 신발·액세서리·가구·음반·서적 등 다채로운 아이템을 소개한다. 다양한 브랜드의 제품을 갖춰 소비자가 자신의 취향에 맞는 물건을 고를 수 있도록 했다.
편집숍의 핵심은 상품을 선택하고 진열한 데서 드러나는 개성과 센스다. 더 스토어 X는 자연스럽게 다양한 경험을 가능케 하는 공간으로 만들고자 했다. 각각의 아이템을 편의에 따라 구분 지어 놓는 것보다도 묘하게 어우러지도록 했다. 어찌 보면 무작위적이고 혼잡하다. 잡지 코너에서 우연히 만난 음반이 구미를 당길 수도 있고, 향수를 구경하다가도 아기자기한 컵 세트가 눈에 들어올 수도 있다. 이런 예상치 못한 발견에서 재미를 찾을 수 있다는 게 포인트. 카페와 서가, 편집숍 진열장 등의 공간도 더 스토어 X의 지붕 아래 자유롭게 흩어져있다. 유성권의 동선을 따라가 보자면 이렇다. 가장 먼저 편집숍 진열대에 들러 신상 의류를 살핀다. 카페 바에서 주문한 음식을 액세서리 진열장 옆 테이블에서 먹다 내일 바이올리니스트 임지영의 생일 파티에 초대됐다며 근처에 진열된 컵 세트를 한참 들여다본다.
베를린의 도시 문화 성격은 갖가지 채소와 과일이 고유의 맛과 색을 잃지 않고 어우러져 있는 ‘샐러드 그릇 모델’로 설명되곤 한다. 더 스토어 X의 다양한 상품들이 무작위로 어우러져 진열됐다 하더라도 그 각각의 매력을 잃지 않는 것처럼. 유성권은 “이런 자유로운 공존이 베를린이라는 도시의 특징”이라고 강조했다.
플루티스트·콘체르트하우스 오케스트라 수석 김유빈
콘체르트하우스 공연장을 즐기는 새로운 방법
2017년부터 콘체르트하우스(Konzerthaus) 오케스트라 종신 수석으로 활동하고 있는 플루티스트 김유빈은 “콘체르트하우스는 베를린 내 여러 오케스트라 중에서도 가장 대중과 호흡하려는 노력이 돋보이는 곳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콘체르트하우스에서 즐길 수 있는 더욱 풍성한 프로그램들을 소개했다. 무엇보다도 흥미로운 프로그램은 ‘미텐드린’이다. 독일어로 ‘한가운데’라는 뜻으로, 관객이 객석이 아니라 오케스트라 사이사이에 앉아 연주를 듣는다. 홀에 들어선 관객이 듣고 싶은 악기 옆에 자리를 잡고 앉으면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입장한다. 이후에 지휘자가 등장해 연주할 곡에 대한 설명을 시작한다. 공연이 있기 전 온라인으로 미리 관객들로부터 질문을 수합해 소소한 것들까지 답변한다. 곧 연주가 시작되고 관객은 가장 가까이에서 마치 연주자가 된 것처럼 음악을 듣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미텐드린’은 2011년부터 2018년 시즌까지 콘체르트하우스의 음악감독이자 상임지휘자를 역임한 이반 피셔가 빚어낸 결실이다. 2019/2020 시즌부터 콘체르트하우스는 새로운 수장 크리스토퍼 에쉔바흐를 맞아들였지만, ‘미텐드린’만큼은 피셔가 객원 지휘로 콘체르트하우스를 방문할 때만 부가적으로 열린다. 올해에는 3월과 5월에 두 차례 예정되어 있다.
이외에도 ‘두 번 듣기’ 프로그램이 있다. 아무런 배경지식 없이 음악을 듣는 것이 관객에게 주어지는 첫 번째 미션이다. 곡이 끝나면 연주자들이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작품의 특성과 배경 등을 알게 되는 시간이다. 이제 다시 음악이 연주된다. 배경지식을 알고 난 후 음악에 대한 감상은 어떻게 변할까. 또, VR·AR 기술을 활용해 색다른 방식으로 공연을 감상하는 프로그램과 관객이 콘체르트하우스의 모든 공간과 연주를 무료로 즐길 수 있는 ‘문이 열린 날’ 프로그램도 진행된다. 특히 ‘문이 열린 날’에서는 아이들을 위한 원데이 악기 클래스 등 다채로운 세부 행사가 진행된다.
바이올리니스트·콘체르트하우스 오케스트라 악장 김수연
쿨투어브라우어라이 공존의 미학
육중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높고 두꺼운 벽이 마치 성곽처럼 도시의 한 블록을 에워쌌다. 그 안의 규모는 무려 2만5천 제곱미터. 노랗고 붉은 12개의 벽돌 건물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곳은 과거 세계에서 맥주를 가장 많이 생산하던 슐트하이스 양조장의 맥주 공장이었다. 산업화 이후 맥주 산업이 호황을 맞자 활발히 가동되다가 현대화 설비를 갖춘 맥주 공장이 생겨나면서 1962년 문을 닫았다. 이후 가구 창고, 댄스 홀 등으로 쓰이다 방치된 이 공간을 재활용하기 위해 당시 소유권을 갖고 있던 동독 당국은 1974년 문화유산 보호구역으로 지정했다. 1998년 민간 기업의 주도로 건물 외벽과 기둥을 제외한 내부 리모델링 공사가 시작됐고 마침내 2001년, 이곳은 문화(Kultur)를 빚는(Brauern) 새로운 복합생활문화 공간(KulturBrauerei)으로 다시 태어났다.
넓은 부지에 형성된 4개의 광장을 따라 매주 일요일과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오픈 마켓이 열린다. 400석 규모의 콘서트홀과 크고 작은 극장 8개도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스폿이다. 이외에도 박물관·출판사·영화관· 슈퍼마켓·한국인이 운영하는 태권도장·자전거 대여점 등 다양한 생활문화시설이 있다. 바이올리니스트 김수연은 평소 장을 보거나 영화를 보러 이곳을 자주 드나든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댄스 아카데미도 등록해 두었다고. 그녀에겐 소소한 일상을 보내는 광장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뜨거운 열정을 표출하는 무대가 되기도 한다. 쿨투어브라우어라이 입주 단체 중 하나인 람바잠바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연극을 제작하고 공연하는 극단이다. 3월에 초연한다는 작품의 포스터가 곳곳에 붙어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취미반과 전문가반을 아우르는 댄스아카데미 센터오브댄스가 있다. 평일 오전에도 통창 너머로 열정적으로 안무를 맞추는 사람들이 보인다. 김수연은 일상의 공간에서 이런 가지각색의 현장을 발견하곤 했다. 그녀에게 쿨투어브라우 어라이는 각각의 다른 목표를 꿈꾸는 공동체들이 한곳에 공존하는 공간이다. 이는 베를린이라는 도시 풍경과도 맞닿아 있다고 했다. 각각의 개성으로 똘똘 뭉쳐 있는 구역들의 집합체가 바로 베를린이라는 점에서다.
글 박찬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