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디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0년 5월 25일 9:00 오전

MOVIE

 

 

주디

밀랍인형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시대의 아이콘이 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늘 화려한 웃음과 재기 바른 몸짓, 그리고 가장 아름다운 시절에 박제된 채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 마치 사람의 모양을 한 밀랍인형을 대하듯 우리는 그들에게 고정된 미소와 어긋남 없는 삶을 바란다. 조금만 우리의 이상향에서 멀어지면 가차 없이 비난하거나 외면한다. 그러다 정말 우리는 그들에게 뜨거운 심장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기도 하는 것 같다.

 

로리타 혹은 도로시였던 여인

 

빅터 플레밍 감독의 ‘오즈의 마법사’(1939)는 할리우드 고전 뮤지컬 영화의 대표작이다. 캔사스 시골 소녀의 판타지를 그려낸 이 영화는 대부분의 장면을 세트에서 촬영했고, 필름 위에 수공으로 색을 입히는 기법으로 화려한 색감을 만들어 냈다. 회오리 장면에 사용된 오두막은 미니어처로 제작해 촬영했는데 지금 봐도 촌스럽지 않을 정도의 특수효과를 선보인다. 1939년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이고 신선하다. 영화에 실린 뮤지컬 넘버 역시 세계적인 성공을 거뒀다. 특히 수록곡 ‘오버 더 레인보우’는 시대에 남을 명곡이 되었다.

주인공 역을 맡은 주디 갈런드(1922~1969)는 아카데미 아역상을 수상하고 20여 편의 뮤지컬 영화에 출연하면서 시대의 아이콘이 되었다. 하지만 할리우드의 현실은 마법 세계와는 달랐다. 영화는 화려한 유토피아를 보여주지만, 실제로 당시 할리우드 영화산업은 스텝과 배우를 착취하면서 몸집을 키워가고 있었다.

당시 미성년자였던 주디는 하루 18시간을 일하고, 체중 조절을 위해 음식을 뺏기고 강제로 약을 먹어야 했다. 성적인 대상으로 착취당했고 정신적 상처 때문에 불면증에 시달렸다. 그 시간의 상처는 중년이 되어서도 극복되지 않았다. 영화는 불행했던 주디의 어린 시절과 여전히 불행한 중년의 주디를 교차로 보여주며 주디 갈런드라는 한 사람, 그리고 그 인생의 한 순간을 들여다본다.

영화 ‘주디’는 일반적인 전기 영화와 달리 삶의 중간 과정을 뭉텅 생략한다. 대신에 영화는 가장 화려한 성공을 누리며 끝없이 상승하던 어린 시절과 이제는 과거형의 스타가 되어 런던의 작은 극장에서 공연하며 내리막길을 겪는 주디의 표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꽤 주의 깊게 바라본다. 특히 중년의 주디 갈런드가 미국이 아닌 영국의 작은 극장에서 공연을 하는 에피소드를 주로 보여준다. 이곳에는 전성기를 훌쩍 넘어 나이 들어버린 주디 갈런드의 모습에도 열광하며 그녀를 사랑해주는 팬이 있다. 반짝이던 과거, 박제된 시절이 아닌, 나와 함께 늙어가는 스타를 무대에서 보는 일은 쓸쓸하다. 반짝였던 청춘과 작별하고, 내 인생도 그들과 다르지 않다는 위안과 함께 자신의 인생을 환기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러네이라는 아이콘

 

실존 인물의 삶을 그리는 전기 영화에 출연한다는 것은 배우로서 큰 도전이다. 가공의 인물을 그럴듯하게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실존 인물이 되어 그의 삶을 재현해야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너무나 잘 아는 시대의 아이콘을 연기해야 할 때 부담은 더욱 커진다.

연기뿐만 아니라 외모까지 실존 인물과 끊임없이 비교될 수밖에 없다. 배우 자신이 고정된 이미지를 가진, 시대의 아이콘이라면 더 험난해진다. 그런 점에서 영화 ‘주디’를 통해 주디 갈런드에 도전한 러네이 젤위거(1969~)가 넘어야 할 산은 ‘주디’라는 세기의 스타인 동시에 이미 세계적인 아이콘으로 자리 잡은 ‘러네이’ 자기 자신이기도 했다.

약과 술, 불면증, 그리고 사람들에 취해 비틀거리는 중년의 주디는 사실 우리들에게 무척 낯설다.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주디 갈런드의 모습은 ‘오즈의 마법사’에 박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린 시절 주디의 깜찍한 모습을 닮은 아역 배우 다르시 쇼와 달리 훌쩍 나이 들어 버린 러네이 젤위거는 우리가 상상하는 주디의 모습과 더 멀어 보인다. 오히려 러네이 젤위거의 연기는 화면에 박제된 주디가 아닌, 실제 주디 갈런드라는 사람처럼 보이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우고, 지친 삶의 군내를 표정에 더한다. 그래서 영화 속 러네이 젤위거는 단 한 순간도 주디 갈런드가 아닌 적이 없는 듯이 주디 그 자체를 보여준다. 사실 러네이 젤위거라는 배우도 다양한 변신을 거듭하며 발전하고 있었지만,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2001년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 속의 모습으로 멈춰있다. 러네이 젤위거는 남성들의 섹스 심벌이 되기보다는 여성들의 친구가 되는 법을 터득한 것처럼 보였다. ‘브리짓 존스’는 러네이 젤위거의 명함이 되었지만, 동시에 그림자가 되었다. 배우로서 오랜 세월 관객과 만나기 위해 러네이 젤위거는 끊임없이 ‘브리짓 존스’를 넘어야 했다. 하지만 벗어나기 위해 내달리다가도 결국 로맨틱 코미디로 귀향하듯 ‘브리짓 존스’ 시리즈는 2016년까지 이어진다. 아직도 러네이 젤위거라는 이름을 들으면, 외로움에 치를 떨며 잠옷 차림에 쿠션을 끌어안고 ‘All by myself’를 립싱크하는 귀여운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계속 다른 인물이 되어 관객에게 자신의 다른 모습도 봐달라고 도전하고 있다.

 

한 여인의 수줍고 불가능했던 소망

 

‘주디’는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화려한 스타의 가십보다는 여인의 삶을 묵도하는 영화다. 억눌리고 수동적인 삶 속에서 주디 갈런드는 끊임없이 남자들과 이해관계자들에게 이용당하며 자존감을 잃어가는 연약한 한 사람이었다.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지만, 스스로를 지키지 못해 누군가를 지킬 수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루퍼트 굴드 감독의 연출은 기교 없이 무덤덤하지만, 러네이 젤위거는 각각의 장면에 굴곡을 주면서 불행한 날들 속에서 그저 평범하게 사랑받고 싶은 한 여인의 수줍고 불가능했던 소망을 관객들에게 계속 환기시킨다. 그래서 러네이 젤위거가 그려내는 주디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한 여인의 불행을 동정하기보다는 한 여인의 소중한 바람을 응원하고 싶어진다.

괴테의 ‘파우스트’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다. 어쩌면 주디 갈런드와 함께 또 다른 전설로 남을 것 같은 러네이 젤위거를 위한 말인 것 같아 인용해 본다.

 

 

 

반짝이는 것은 순간을 위해 태어난 것이지만,

참된 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남는 법이다.

 

 

 

 

 

글 최재훈

영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서울문화재단에서 근무하고 있다. 37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제3회 르몽드 영화평론가상을 수상하였으며 영화·문화예술 관련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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