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여왕
오페라 속 여인의 삶과 사랑_2
메리 스튜어트
불꽃처럼 살다 가다
사랑과 권력의 라이벌은 작곡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살아있는 여인들 중 가장 미인이고, 또한 모든 이들 중에서 가장 비참한 여인이로다”
– 실러의 희곡 ‘마리아 슈투아르트’ 중
두 여왕이 있었다. 메리 스튜어트와 엘리자베스 튜더. 한 여인은 태어난 지 9개월 만에 스코틀랜드 여왕이 되었고, 다른 여인은 아들이 아닌 딸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외면받았다. 전자는 호화로운 궁중에서 자랐고, 스코틀랜드의 여왕이자 프랑스의 왕비가 됐다. 후자는 3세 때 어머니가 아버지에 의해 참수된 후, 25세에 잉글랜드 왕위에 오를 때까지 감시와 위협 속에 살았다.
왕권을 얻은 후 두 사람의 삶은 달라졌다.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가 당시 유럽을 분열시킨 신교와 구교의 다툼 속에서도 나라를 점점 부강하게 만든 반면, 스코틀랜드의 메리에게는 개인적인 불운이 연달아 닥쳤다. 17세에 프랑스의 왕비가 됐지만 이듬해 남편 프랑수아 2세와 친모 마리 드 기즈가 세상을 떠났다. 메리는 자신의 고향과도 같던 우아한 프랑스 궁정을 떠나 척박한 스코틀랜드로 돌아가야 했다.
젊은 나이에 이미 국정 장악 능력을 보여준 엘리자베스와는 달리 메리는 기존의 귀족 세력 사이에서 정치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거기에 사생활에 관한 추문이 잇달았다. 23세에 단리 경과 재혼했지만 그녀가 총애하던 비서가 남편에 의해 살해되는 것을 눈앞에서 보게 된다.
끝이 아니었다. 남편 단리는 이듬해 살해됐고, 그 배후에 그녀가 있다는 의심을 받게 된다. 단리 암살의 유력 용의자 보스웰 백작은 메리를 납치해서 욕보인 후 강제로 결혼했다. 하지만 온갖 비난은 그녀에게 쏟아졌고,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결국 한 살짜리 아들에게 왕위를 이양하게 된다.
그 후 그녀는 치명적인 결정을 한다. 바로 자신의 정치적 라이벌인 엘리자베스가 다스리는 잉글랜드로 망명을 선택한 것이다. 이 드라마틱한 파국은 18세에 첫 남편을 잃고 난 후 겨우 8년 사이에 벌어졌다.
“사랑하는 것을 드높일 수 있는 다른 여인들을 나는 부러워하오. 나는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왕관을 씌워 줄 만큼 행복하지 않소! 스튜어트는 취향에 따라 혼인할 수 있도록 허락되었소. 그녀는 갖가지 일을 자신에게 허용했고, 그녀는 환희가 가득한 술잔을 다 마셨소. 그녀는 사람들 판단을 존중하지 않았소. 그녀는 경박하게 살았고, 나와 같은 멍에를 짊어지지 않았소. 나도 인생과 지상의 즐거움을 즐기겠노라고 할 수 있었겠지만, 나는 엄격한 왕의 의무를 선호했소. 그녀는 여성이 되는 데만 열성이었기에, 모든 남자들의 총애를 받았지요.”
– ‘마리아 슈투아르트’ 중 엘리자베스의 대사
메리는 존재 자체만으로 엘리자베스의 열등감을 자극했다. 스튜어트 왕가의 피가 흐르는 메리는 당시 구교의 중심인 프랑스 발루아 왕가의 왕비이기도 했다. 성공회의 수호자처럼 보이는 엘리자베스였지만 마음 한편에는 헨리 8세에게 버림받아 참수된 어머니 앤 불린의 존재와 어릴 적 사생아로 분류되어 왕위 계승에서 배제된 상처가 있었다. 이혼을 인정하지 않는 구교 입장에서 헨리 8세의 두 번째 부인 앤 불린은 그저 불륜녀였고, 그 소생은 사생아로 여겨졌다.
반면 메리는 당시 강국이었던 가톨릭 국가 프랑스와 스페인을 등에 업고 로마 교황청에 정통성을 인정받아 엘리자베스를 위협할 소지가 충분했다. 그런 상황에서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로 망명을 결정했다는 것은 메리가 정치적 판단에 얼마나 어두웠는지 보여준다.
메리를 차마 죽이지 못하고 장장 19년에 걸쳐 유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메리가 대관식을 통해 여왕이 됐기에 그녀를 제거하는 것은 결국 엘리자베스 스스로 왕좌의 권위를 해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메리의 죽음 이후 민감해질 국제 정세도 영리한 엘리자베스는 고려해야 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여왕 암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메리는 결국 1587년 2월 8일 45세의 나이로 처형됐다.
메리의 비극적인 삶은 많은 작가와 작곡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메리 사후 40여 년 후 이탈리아 바로크 작곡가 자코모 카리시미(1605~1674)는 ‘마리아 스투아르다 여왕의 비탄’(1620)이라는 칸타타를 작곡했다(마리아 스투아르다는 메리 스튜어트의 이탈리아식 발음). 그로부터 200년 후, 벨칸토 오페라 작곡가 사베리오 메르카단테(1795~1870)는 오페라 ‘마리아 스투아르다’(1821)를 볼로냐에서 초연했다. 이 오페라는 메리의 비참한 최후가 아닌 스코틀랜드 여왕이 된 집권 초기에 귀족들로부터 왕권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메리의 모습을 다뤘고 소소한 성공은 거뒀지만 곧 잊혀졌다.
가장 널리 알려진 메리의 모습은 독일의 극작가 실러(1759~1805)가 쓴 희곡 ‘마리아 슈투아르트’(1801)에서 기인한다(마리아 슈투아르트는 메리 스튜어트의 독일어식 발음). 총 5막으로 이루어진 이 실러의 역작은 메리를 과거의 숱한 과오를 참회하고 죽음을 담대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으로 그려냈다. 또 엘리자베스는 메리에 대한 열등감과 질투에 가득 차 있고, 급기야 자신의 손에는 피를 묻히지 않고 교활하게 메리의 사형을 집행하게 만드는 역할로 설정했다. 극적인 재미를 더하기 위해 실러는 몇 가지 역사적 왜곡을 감행했는데, 그중에서도 역사적으로는 실제로 대면한 적이 없는 두 여왕이 3막에서 설전을 벌이는 장면은 이 작품의 백미이다.
도니체티, 문제작을 만들다
도니체티의 ‘여왕 3부작’ 중 두 번째 작품으로 꼽히는 ‘마리아 스투아르다’는 도니체티의 아픈 손가락이었다. 첫 번째 오페라 ‘안나 볼레나’(1830)가 밀라노에서 대성공을 가져온 작품이었던 반면, ‘마리아 스투아르다’는 시작부터 험난했다.
이 오페라는 원래 1834년 8월에 나폴리 산 카를로 극장에서 초연이 예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역과 마리아 역을 맡은 두 주역 가수가 역할에 너무 몰입했는지 둘 사이에 격한 다툼이 벌어져서 초연은 9월 말로 미뤄졌다. 그러던 중, 메리 스튜어트의 직계 후손인 마리아 크리스티나 왕비가 초연 전에 공연을 보고 싶어 했는데, 3막의 처형 장면에서 그녀는 너무 충격을 받아서 기절하고야 말았다. 덕분에 당국의 검열이 시작됐고, 작품 상연은 금지됐다. 임시방편으로 도니체티는 배역의 이름을 다 바꾸고 대사를 대폭 수정했다. 주인공 부온델몬테의 이름을 따서 오페라 제목을 ‘부온델몬테’로 지어서 10월 18일에 가까스로 초연을 올렸다.
‘높은 분을 쓰러지게 만든 오페라’, 이 문제작에 대한 소식은 이태리 북부 밀라노까지 퍼졌다. 명가수 마리아 말리브란은 이 작품을 라 스칼라 극장에 제안했고 열띤 토론 끝에 이 작품은 1835/36년 연말연시 시즌에 올리기로 결정됐다. 이번에는 원래대로 ‘마리아 스투아르다’라는 이름으로 공연되기로 했다. 하지만 역시나 순탄치 않았다. 두 주역 여가수의 컨디션이 최악이었고 결과는 미진했다. 하지만 이 명작 오페라는 살아남았고, 지금까지도 유럽에서 종종 공연되고 있다.
도니체티는 이 오페라에서 마리아를 순교자에 가깝게 묘사했다. 마지막 장면에서 처형 전 최후의 소원을 말하는 장면에서 엘리자베스에게 신의 가호와 그녀의 삶과 왕권에 안전이 깃들기를 기도하면서 합창과 함께 장렬한 최후를 맞는다. 그리고 레스터 백작도 마리아를 순수하게 사랑하는 남자로 그려지고, 엘리자베스는 그런 레스터 때문에 삼각관계를 맺는 사랑의 라이벌, 또 양립할 수 없는 권력의 라이벌로 묘사된다.
바그너, 야망을 담다
1839년 9월 바그너(1813~1883)는 채권자들을 피해 파리에 도착했다. 당시 ‘그랜드 오페라’라는 장르가 유행이었고, 그에 걸맞은 수준급 시설을 갖춘 27개나 되는 극장이 있을 정도로 파리는 국제적인 음악도시였다. 청년 바그너는 이 도시에서 성공하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고, 같은 독일 출신 작곡가이자, 당시 파리 오페라계를 주름잡고 있었던 자코모 마이어베어(1791~1864)를 찾아갔다. 그는 바그너의 음악에 매료되어 격찬을 해주고 많은 추천서를 써줬다.
그렇지만 파리는 바그너에게 호락호락한 도시가 아니었다. 바그너는 자신의 작품을 알리고자 숱한 노력을 했고, 유명 오페라 가수에게 자신의 작품을 부르게 하려고 부단히 애를 썼다. 그중 어느 유명 소프라노를 위해 ‘마리아 슈투아르트의 작별인사’(1841)라는 곡을 작곡했는데, 사실 이를 계기로 자신의 오페라 ‘연애금지’에 그녀를 출연시키고자 하는 심산이었다. 이 오페라는 파리의 르네상스 극장에서 상연되기로 예정됐고, 바그너는 성급하게 고급 아파트로 거처를 옮겼다. 하지만 극장이 파산하면서 공연 계획은 물거품이 됐다. 생활비를 감당하기 힘들어진 바그너는 파리 근교로 이사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쓰라린 기억만 안고 파리에 정착한지 3년 만에 독일에 돌아가게 됐다.
메리 스튜어트가 프랑스를 떠나며 부르는 이 노래는 당시 파리에서 유행이던 살롱 스타일을 고려해서 작곡됐는데, 파리에서 유행하는 음악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서 자신을 드러내고자 했던 바그너의 야망이 잘 드러나 있다. 이 곡을 바그너 팬들이 듣는다면 훗날 바그너가 자신의 스타일을 정립하기 전에 이런 곡도 썼다는 사실이 꽤나 흥미롭게 다가올 것이다.
글 오주영(성악가·독일통신원)
서울대 성악과를 졸업하고 독일 쾰른과 마인츠에서 오페라를 전공했다. 마인츠 극장에서 헨델의 오페라 ‘리날도’로 데뷔한 후 프랑크푸르트에 거주하며 오페라와 종교음악을 노래하고 있다
추천도서 & 음반
실러 ‘메리 스튜어트’
이원양 옮김/지만지드라마
깔끔한 번역에 풍부한 주석이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역사적 사실도 충분히 설명되어 있다. 이 희곡을 먼저 읽고 다양한 음반을 감상한다면 더 깊은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도니체티 ‘마리아 스투아르다’
카르멜라 레미조(소프라노)/소니아 가나시(메조소프라노)/파브리치오 마리아 카르미나티(지휘) 외
도니체티의 고향 베르가모에서 2002년에 있었던 공연 실황. 마리아 역을 부각시킨 다른 음반 표지에 비해 엘리자베타 역의 가나시가 두드러진다. 표지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마리아와 엘리자베타 두 주역가수의 팽팽한 절창이 압권이다. 파브리치오 마리아 카르미나티의 지휘는 실황임에도 놀라운 완성도를 보여준다. DVD로도 발매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