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이라는 실재, 지휘자 정민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2년 3월 7일 9:00 오전

FOCUS

정민(1984~) 서울대에서 바이올린과 독일문학을 공부했다. 2015년부터 도쿄 필부지휘자, 트렌토 & 볼차노 하이든 오케스트라 수석 객원지휘자로도 활동하고 있다. 2021년 7월, 클래식 음악 매니지먼트 아스코나스 홀트와 계약했다. 지난해 강릉시향상임지휘자로 부임했다.

진심이라는 실재

지휘자 정민

강릉시향 상임지휘자로 부임한 그의 포부

모든 종류의 편견은 나쁜 걸 안다. 그래서 의도치 않게 밀려들어오는 선입견이 때로는 당혹스럽다. 정민은 안갯속에 희미하게 가려진 사람이었다. ‘정명훈의 막내아들’이기에 친숙하다가도, 한 번도 그의 연주를 들은 적이 없기에 어슴푸레했다.

1992년 창단한 강릉시향은 지난해 12월에 신임지휘자로 정민(1984~)을 임명했다. 여러 언론에서 ‘정명훈의 아들’이라고 헤드라인을 뽑았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이 싸워야 할 것이 있다. ‘지휘자’라는 간결한 수식어보다 좀 더 복잡한 것들이 정민을 둘러싸고 있는 듯하다.

정민이 부지휘자로 있는 도쿄 필의 클라리넷 수석 조성호는 “존경하는 정명훈 지휘자와 비슷하면서 다른 무언가 있다”고 느꼈다며, “끓어오르는 에너지로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힘이 분명히 있는 지휘자”라고 힘주어 말했다. 파편적인 정보로 점철된 정민이 아닌, ‘지휘자 정민’을 뚜렷하게 알고 싶어서 이탈리아 투어를 마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은 정민은 더블베이스를 손에 쥐었던 어린 시절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독일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따라 파리와 로마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지휘자 아버지를 두었기에 숙명적으로 여러 나라의 문화를 접하며 지냈는데, ‘지휘자 정민’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나라는. 고루 영향을 받았다. 그런데 이탈리아야말로 정말 예술의 나라인 것 같다. 이탈리아는 모든 것이 자연스럽다. 이탈리아 사람들 특유의 자연스러움이 어디에서든 나타난다. 물론 음악에서도.

서울대에서 독일문학을 공부했다. 직접 택한 전공인가. 문학에 관심이 많으면 오페라 지휘에도 뜻이 있을 것 같아서. 서울대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하던 중 지휘에 도움이 되는 과를 고민해 봤다. 어떤 전공이 지휘자에게 도움이 될까 생각하다가 독문학과를 선택했다. 괴테와 니체를 공부한 게 많은 도움이 된다.

어린 시절에는 더블베이스, 바이올린, 피아노를 익혔다. 첫 시작은 더블베이스였는데 레퍼토리에 대한 갈망으로 바이올린으로 전향했다고 들었다. 더블베이스를 배우던 때는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음악적으로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 당시 만난 스승님이 참 좋았다. 왜 그런 선생님이 있지 않은가. 자기 분야를 사랑하게 만드는…. 하지만 더블베이스 레퍼토리는 한정적이다. 더블베이스로 첼로 작품만 계속 연주하다가 답답함을 느껴 바이올린을 시작했다.

지휘는 어떻게 습득했나. 한 인터뷰에서 “아버지가 지휘에 대한 스킬은 전혀 가르쳐주지 않으셨다”고 밝혔는데. 지휘를 배우는 유일한 방법은, 지휘를 하는 것이다. 포디움에 서는 모든 경험이 공부였다.

2007년 부산 ‘소년의 집’의 알로이시오 오케스트라와 첫 지휘 데뷔를 이뤘다. 이후 오랫동안 알로이시오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지도해온 것으로 알고 있다. 이번 강릉시향 취임 때 “음악가의 역할은 음악적 재능을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라는 얘기를 했는데, 알로이시오 오케스트라와 오랫동안 함께한 경험이 이러한 생각과 맞닿은 건지. 그 경험 때문은 아니다. 음악사에서 음악가는 오랫동안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해 왔다. 2018년, 한국과 프랑스 대통령의 국빈 만찬에 초청을 받았다. 만찬 장소에서 프랑스 군악대가 연주를 했다. 한 코스를 먹은 후 음악이 연주되고, 두 번째 코스를 먹은 후 또 음악이 연주되고, 이런 식으로 순서가 진행됐다. 처음에 ‘음악을 이런 식으로 즐기는 건 좀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점점 음식과 음악을 함께 즐기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음악가는 타인을 위해 일하는 게 맞구나 생각이 들더라.

해외에서 먼저 커리어를 쌓았다. 2015년부터 일본 도쿄 필 부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다. 오페라부터 교향악까지 도쿄 필은 다양한 레퍼토리를 다룬다. 틈틈이 영화음악이나 게임음악 녹음도 진행하고 있고. 일본은 연말,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이 자주 연주되는 나라인 만큼, 대중에게 인기가 좋은 곡들에만 특히 집중한다. 부지휘자로서 클래식 음악부터 게임음악까지 폭넓은 레퍼토리를 경험한 것이 커리어에 좋은 도움이 됐다.

트렌토 & 볼차노 하이든 오케스트라 수석 객원지휘자로도 활동하고 있다. 지난 2월에도 이탈리아 투어 연주를 진행했다. 국내에서는 낯선 오케스트라인데. 이탈리아 지방 오케스트라여서 생소할 거다. 이탈리아 매니저의 소개로 인연을 맺었다. 나는 볼차노의 예쁜 도시 분위기가 마음에 든다. 이탈리아에는 아름다운 곳이 많다. 한 번은 연주 때문에 사우스 티롤에 방문했는데 완전 반했다. 오스트리아령이었던 곳이어서 도시 사람들은 이탈리아어와 독일어를 완벽히 구사한다. 음식도 이탈리아 파스타와 독일 맥주를 함께 먹을 수 있는 신기한 지역이었다.

진정성이 음악을 만든다

강릉시는 한국을 대표하는 관광과 문화의 도시이자, 커피와 바다향이 어우러진 낭만의 도시다. 도시에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이라면, 강릉시향을 만난 건 운명인 듯하다. 강릉시향의 가장 큰 장점은 강릉에 있다는 것이다. 강릉시향 연주에 초대하면 사람들은 언제든지 가고 싶다며 반가워한다. 산과 바다를 끼고 있어 여름에는 해수욕, 겨울에는 스키를 탈 수 있다. 전 세계에 이런 도시가 드물다. 강릉에 처음 갔을 때 동해 바다가 너무 아름다웠다. 애국가에 ‘동해물과 백두산이’라는 가사가 왜 들어갔는지 직접 실감하게 된 순간이다.

강릉시향은 그동안 지역민 대상으로 클래식 음악 대중화에 힘써왔다. 원하는 학교에 한해 무료로 교가 음원을 제작해 주는 프로젝트도 진행했다. 그러나 이제는 ‘대중성’보다는 ‘예술성’을 중심으로 새로운 혁신이 필요한 시기라는 생각도 든다. 일본에 갈 때마다 비자를 받는데, 내 비자에 직업이 ‘엔터테이너’라고 적혀 있다. 너무 맞는 말 같다. 결과적으로 내가 하는 일은 엔터테이너 역할이다. 우선 강릉 시민들의 입맛을 맞춰주는 게 중요하다. 다음에 내가 하고 싶은 음악과의 밸런스를 찾으려 한다.

영감을 준 음악가들이 많이 있을 것 같은데, 공부하면서 참조하는 지휘자가 있다면. 음, 사실… (한참을 망설이다) 우리 아버지가 최고인 것 같다. 객관적인지는 모르겠지만…. 지휘는 개인적인 것이어서 누가 맞고 틀리고는 없다. 다만 자기가 하고 싶은 방법, 방식, 방향이 있을 뿐.

여가 시간엔 주로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나. 요리를 한다. 요리사랑 지휘자랑 비슷하다. 강릉시향에 부임하면서 좋은 요리사와 같은, 좋은 지휘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좋은 요리사는 어떤 걸까. 요리를 잘 하는 것? 재료를 잘 고르는 안목? 도구와 재료의 수준을 따지기보다는, 지금 있는 재료로 최상의 음식을 만드는 게 요리사의 진짜 재주라고 생각한다. 강릉시향에서도 최대한 좋은 결과를 만들어 보려고 한다. 오케스트라에게 가장 중요한 건 후원이다. 시민들의 후원과 지지가 없다면 잘 해낼 수 없을 것이다. 내가 강릉시향에 있는 동안 강릉의 모든 예술 단체가 시민들의 일상에 깊이 들어갈 수 있도록 노력하고자 한다. 그래야 이 오케스트라가 성장할 수 있다.

몰두하고 싶은 작곡가가 있나. 혹은 특정 시대 작품. 클래식 음악가의 축복은 평생을 함께할 어마어마한 숫자의 레퍼토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더블베이스에서 바이올린, 이어서 지휘를 하게 되면서 점차 소화할 수 있는 레퍼토리가 확장되어 기쁘다. 하고 싶은 게 너무 많다. 딱 한 작곡가를 꼽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야겠다. 최근에 가장 몰두하고 있는 작곡가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쉽다. 바로 다음에 연주할 작곡가. 누군가 나에게 ‘제일 좋아하는 작곡가’를 물으면, ‘지금 연구하고 있는 작곡가’라고 답한다. 평소 내가 좋아하던 작곡가가 아니더라도 연주를 맡게 되면 그 기간 동안은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가 되도록 열심히 애정을 쏟는다. 사람들에겐 진리를 알아볼 수 있는 본능이 있다. 팔로워가 많은 유튜버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자신이 리얼하기 때문에 좋아하는” 거라고. 진정성이 담겨있다면 사람들은 분명 알아본다.

결국 이 길의 끝에 진정성 있는 지휘자가 되고 싶은 건가. 내 삶의 포부(ambition)는 딱 두 가지다. 좋은 음악가가 되는 것, 그리고 나의 가족이 편안한 것.

글 장혜선 기자 사진 아스코나스 홀트

Performance information
정민/강릉시향(협연 조재혁)

3월 25~26일 강릉아트센터 사임당홀 베를리오즈 ‘로마의 사육제’ 서곡, 생상스 피아노 협주곡 2번, 생상스 교향곡 3번 ‘오르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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