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NOTE I 기자들의 공연 관람 후기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3년 1월 9일 9:00 오전

EDITOR’S NOTE

기자들의 공연 관람 후기


이안 보스트리지·줄리어스 드레이크 ‘겨울 나그네’

첫눈이 내렸고, 나그네는 노래하였다

12월 3일 롯데콘서트홀

공연 시작은 토요일의 오전 11시 30분. 슈베르트 ‘겨울 나그네’의 첫 곡은 ‘밤 인사’이다. 대낮부터 ‘잘 자’라는 인사를 듣기 어색할 관객을 걱정한 것일까. 이날 아침 하늘에선 첫눈이 내렸다. 눈 덮인 하얀 길을 따라오니, ‘겨울 나그네’를 감상할 준비가 이보다 완벽할 순 없었다.

무대로 뚜벅뚜벅 걸어오는 피아니스트 옆의 가수는 뒷짐을 지고 고고하게 등장한다. 무거운 걸음걸이를 보니 그는 이미 나그네가 되어 겨울을 걷고 있었다. 공연 전 몰입을 마친 두 사람 덕에 첫 곡 ‘밤 인사’부터 연주의 흡입력이 대단했다. 사랑했던 시절에 관한 내용은 일절 없이 시작하는 실연의 비통함이 전혀 어리둥절하지 않았고, 오히려 나머지 23곡의 여정 속 나그네의 심정에 더욱 귀를 기울이고 싶어질 뿐이었다.

가수가 슬픔으로 무너져 가는 가운데 스물네 곡 중 가장 감미로운 곡 ‘보리수’가 시작됐다. 살랑이는 ‘보리수’는 역설적으로 나그네를 죽음으로 유혹하는 존재이다. 유혹의 구절인 “내게로 오라 친구여/여기서 안식을 찾으렴”을 부르는 보스트리지(1964~)의 목소리는 귓가에 메아리치듯 매혹적이었다. 유혹 후 불어 닥친 매서운 바람에 정신을 차린 나그네의 귓가에도 그 목소리가 남았는지, 다시 한번 반복한 “여기서 안식을 찾으렴”하는 부분은 보리수가 아닌 ‘보리수를 모방하는 나그네’로 표현됐다. 탁월한 해석에 감탄이 나오는 순간이었다.

제7곡 ‘시냇물에서’의 냇가에 가까이 다가갔다가 다시 멀어지는 움직임, 제11곡 ‘봄꿈’에서 가수가 그린 희망을 단호히 부정하는 피아노 소리, 제13곡 ‘우편 마차’에 나를 위한 편지도 있지 않을까 하며 함께 설레는 묘사, 제16곡 ‘마지막 희망’에서 피아노가 굴리는 나뭇잎에 휘말리지 않으려는 가수, 제17곡 ‘마을에서’ 으르렁거리며 짖는 피아노를 거북해 하는 목소리까지. 피아니스트와 가수의 상호작용은 끝도 없었고, 둘의 호흡이 완벽할수록 빼어나지는 ‘겨울 나그네’가 현현했다.

이날의 관객들이 가장 숨죽였던 순간은 20곡 ‘이정표’부터 제22곡 ‘용기’까지였을 것이다. 죽을 목적지에 도착해 불안한 나그네의 상태가 담긴 ‘이정표’가 끝나자 보스트리지는 무거움 마음을 버티지 못하고 뒤를 돌아 고개를 떨궜다. 그러나 무덤을 뜻하는 제21곡 ‘여인숙’에 누울 곳은 없었고, “그렇다면 더 멀리, 그저 멀리 가는 수밖에”를 부르며 나그네는 죽음을 넘어선 삶을 찾으러 간다. 곧바로 이어지는 제22곡 ‘용기’에서 나그네는 더 이상 끔찍한 죽음의 길이 아닌 삶의 여정을 노래했고, 이 세 곡 사이 나그네의 심정 변화를 두 연주자는 더할 나위 없이 설득력 있게 표현해 냈다.

제24곡 ‘거리의 악사’의 마지막 가사 “내 노래에 맞춰 그대의 수금을 연주할 텐가?”는 피아니스트에게 앞으로의 여정도 함께하자는 의미가 담겨 있었고, 피아니스트는 이를 조용히 동의했다. 앙코르가 없는 마무리는 마치 동화의 마지막 문장, ‘둘은 행복하게 살았다’처럼 이어질 뒷 이야기를 모르는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두 나그네의 삶은 계속될 것이고, 그 자세한 내용은 관객의 상상으로 이어야 할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두 사람의 연주는 하나의 맥락에서 잠시도 벗어나지 않았다.

글 이의정 기자 사진 인아츠프로덕션

 


국립정동극장 연극시리즈 ‘맥베스 레퀴엠’

영웅의 추락이 아니다

12월 1~31일 국립정동극장

르네상스의 예술가들은 인본주의를 자양분 삼아 자아의 위치를 가늠하기 위한 여정을 떠났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햄릿’ ‘오셀로’ ‘리어왕’ ‘맥베스’) 역시 그 여정 가운데 태어났다. 국립정동극장(대표이사 정성숙)은 지난해 12월 ‘연극시리즈’의 일환으로 ‘맥베스 레퀴엠’을 선보였다. ‘연극시리즈’는 한 명의 배우를 선정하고, 그 배우가 직접 작품 선정부터 기획·제작에 참여하는 기획 공연이다. 극장 개관 25주년을 맞이했던 2020년 시리즈의 첫 번째로 ‘더 드레서’를 선보였고, 이번 무대는 그 시리즈의 두 번째 시간으로 배우 류정환이 맥베스 역을 맡아 화제가 되었다.

1600년대 초에 완성된 ‘맥베스’는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에서도 호흡이 빠르고 짧은 작품으로 손꼽힌다. 라파엘 홀리셰드의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및 아일랜드의 연대기’에 등장하는 11세기의 던컨과 맥베스의 통치 이야기를 모티브로 했다. 왕이 된다는 마녀의 예언에 동요된 맥베스가 왕을 비롯한 주변을 숙청하며 왕좌에 오르는 과정을 그린다.

무대는 간결했다. 복잡한 무대 세트 대신, 수직으로 떨어지는 나무를 입체적으로 배치해 때론 욕망에 사로잡힌 맥베스를 나무 사이에 가두기도, 조명을 통해 궁전의 기둥 사이로 떨어지는 빛을 표현하기도 했다.

작가 유발 하라리는 저서 ‘사피엔스’에서 “중세의 가치체계는 현대 개인주의가 그러하듯이 상상의 자리를 떠나 중세 성의 돌에 섞여 들어가 스스로를 구현했다”고 이야기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인간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가치를 사회적 위계질서 속에서 찾으려 한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하라리의 이론처럼 전쟁에서 승전고를 울린 맥베스 귀에 들린 “왕이 될 것”이라는 마녀들의 예언은 맥베스 자신을 또 다른 위치로 옮겨놓는다. 그는 왕 던컨을 죽이고, 그 자리를 꿰참으로써 예언을 이룬다. 그리고 던컨의 죽음과 함께 “잠을 죽여 버렸다”라는 속삭임이 맥베스의 귓가에 맴돈다. 밤낮으로 괴롭힐 욕망의 끊임없는 속삭임에 대한 예고인 것이다.

연출가 박선희는 프로그램 북을 통해 “마녀와 예언은 일종의 면죄부”라며 “여기까지 내가 온 것은, 운명이 있는 것이 아닌 내가 걸어왔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며 오늘날의 개인주의가 중세의 ‘가치체계’와 다르지 않음을 꼬집는다. 결국 맥베스와 우리의 욕망은 모양만 다를 뿐인 것을 알 때, 맥베스의 ‘살인’은 내가 현재의 자리까지 오기 위해 누군가를 짓밟은 ‘살인’으로 전이된다. 그리고 그 욕망의 물꼬가 맥베스의 ‘첫 살인’으로 터졌을 때, 살인으로 이뤄낸 ‘왕좌’(현대인의 이상)라는 절대적 위치는 추악함으로 전락한다. 공연 처음부터 울려 퍼지는 “아름다운 것은 추한 것, 추한 것은 아름다운 것”이라는 속삭임이 관객의 귀에 다시 울리게 되는 지점이다.

작품에는 모차르트의 ‘레퀴엠’ 중 ‘눈물의 날’ 선율이 작품 전반에 흐느끼듯 연주된다. 제목에 붙은 진혼(鎭魂)을 기원하는 ‘레퀴엠’은 단순히 죽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진혼곡의 과정은 슬픔을 오직 슬픔으로 마주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필연적 과정을 통해 비로소 슬픔에서 해방되는 것인데, 맥베스 역시 욕망의 추악함을 마주할 때 비로소 욕망에서 해방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글 임원빈 기자 사진 국립정동극장

 


이자람 판소리극 ‘노인과 바다’

알아들을 수 있는 ‘우리말’ 판소리

12월 9·10일 LG아트센터 서울 LG시그니처홀

무대 장치 하나 없는 무대에 덩그러니 놓인 북과 물잔. 이윽고 푸른 빛 도복을 자유로이 걸친 이자람이 고수 이준형과 오른다. 시원하게 한 곡조를 뽑아내곤, 그는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건다. “추임새는 판소리를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입니다. 여기 계신 천 명의 관객이 같이 만드는 공연이죠. 다 같이 한 번 추임새를 해볼까요? 얼쑤!” 프로시니엄 형태의 대형 극장에서 관객은 침묵이 익숙하다. 경직된 이 분위기에서 흥겨운 반응이 나올 수 있을까 싶은 우려도 잠시, 공연이 시작되면 제일 크게 ‘잘한다!’ 하고 추임새를 외치게 되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 흙먼지 나는 마당 한편에 앉은 조선시대 선조들의 흥겨움도 이와 같았을까.

이자람의 ‘노인과 바다’는 판소리의 원형을 떠올려보게 한다. 앞서 여러 악기와 앙상블을 이뤘던 ‘사천가’(2007)나 ‘이방인의 노래’(2016)와 달리 오로지 고수와 소리꾼으로만 이뤄졌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의 창작 작품은 아이러니하게도 전통 판소리가 가지고 있는 유희와 현장성을 전통 판소리보다 더 잘 표현해내고 있다. 익숙하지 않은 고어와 고사성어가 가득한 전통 판소리는 자막이 없으면 그 구절 하나하나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지금의 관객에겐 외화 영화나 다름없다. 하지만 이자람의 판소리는 “회에는 역시 와사비와 간장인데”라며 해석도, 자막도 필요 없는 농담을 객석에 던질 수 있는 전달력을 가지고 있다. 소리꾼으로서 이자람이 가진 실력, 즉 창과 아니리(말하기), 너름새(연극적 표현)는 이를 완벽하게 한다.

그가 가진 작창 실력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를 원작으로 마법처럼 화자를 넘나들며 문장을 배열해낸 솜씨가 놀랍다. 그는 순식간에 소설 속 노인이었다가, 소설의 서술자였다가, 이자람 자신이기도 하다. 물론 원작 소설의 줄거리도 복잡하진 않다. 바다로 나간 노인이 커다란 청새치를 씨름 끝에 잡지만, 상어에게 모두 뺏기고 허탈하게 돌아오는 것이 전부다. 그러나 간결한 내용 사이 대문호가 숨겨둔 삶과 투쟁, 혹은 인간의 깊숙한 속내까지를 담아내기란 어렵다. 그럼에도 소설 속 장면을 거의 다 담았을 뿐 아니라, 주관적 관점까지 추가되어 더 풍성하게 다가온다. 아니리(말)로 서사의 흐름을 빠르게 정리하고, 창(소리)으로 노인의, 혹은 이자람의 심정을 세밀하게 배치했다. “나는 너를 왜 죽여야 할까” 낚싯줄을 쥐고 치열하게 버티던 노인은, “나는 왜 판소리를 할까” 하는 이자람으로 순식간에 변한다. 그렇기에 상어에게 물어뜯긴 청새치를 두고 “너를 잡고 놓아줄 것을. 아니 잡지 말 것을” 하는 노인의 후회도, 그럼에도 “나는 타고난 어부다. 나는 지금 바다 위에 있다”라며 “살아온 모든 삶을 쏟아 낚싯줄을 당긴다”는 다짐도 먼 쿠바 바다 위 노인의 외침이 아닌, 서울 마곡의 객석에 앉은 관객의 몫이 된다.

더 화려하게, 더 크게.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장신구’를 주렁주렁 단 공연들이 있다. 이에 비해 많은 것을 덜어낸 이자람 판소리극은 자극에 노출된 관객을 정화할 맛 좋은 보약이다. 부채 한 자루 ‘척’ 펼쳐 모든 것을 보이게, 들리게, 느끼게 표현해내는 판소리 고유의 멋은 세련된 소리꾼의 창작에 의해 계속 이어지고 있다.

글 허서현 기자 사진 LG아트센터/Studio 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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