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 HOT 프랑스 I 라 롱크 당테롱 페스티벌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3년 10월 10일 9:00 오전

WORLD HOT_FRANCE
전 세계 화제 공연 & 예술가

라 로크 당테롱 페스티벌 7.20~8.20

임윤찬에게 쏟아진 환호와 탄성 속에서

대가와 중진, 동양의 신예들이 한 자리에 모인 건반의 축제에서 ‘그’를 만나다

임윤찬 ©Valentine Chauvin

 

제43회 라 로크 당테롱 피아노 페스티벌이 열렸다. 폭염이 절정을 이루던 8월 17일과 18일, 남프랑스의 작고 아름다운 음악 마을을 방문했다. 올해는 베르트랑 샤마유·소콜로프·장마르크 루이사다·알렉상드르 타로·니콜라이 루간스키·율리아나 아브제예바·볼로도스·당 타이손·압델 라흐만 엘 바차 등의 유명 피아니스트들이 참석했다. 장 론도·레미 제니에·알렉상드르 캉토로프 같은 프랑스의 스타급 중견 연주자들도 대거 나타난 올해 공연에서 유독 시선을 끈 것은 젊은 연주자들의 참여도다. 동양계 피아니스트가 큰 비중을 차지했다. 브루스 류·후지타 마오·케빈 첸, 그리고 임윤찬의 독주회가 주목을 받았다.

다정한 부자(父子) 피아니스트의 감동

8월 17일 저녁 6시 공연은 브루노 리귀토·파올로 리귀토 부자의 듀오 공연이었다. 아버지 부루노 리귀토(1945~)는 상송 프랑수아(1924~1970)의 제자로, 에밀 길레스 시절 차이콥스키 콩쿠르 수상자다. 나이가 들었어도, 그의 모습에 묘한 후광이 넘쳤다. 부자는 악보에 충실하게, 각 주제를 조목조목 건축해 갔다.

브루노 리귀토와 파올로 리귀토 ©Valentine Chauvin

 

압권은 작곡가 노버트 글랜즈버그(1910~2001)의 ‘이디시 모음곡’이었다.(편집자 주_‘이디시’는 중앙 및 동부 유럽에서 쓰이던 유대인 어를 뜻한다) 제목처럼 유럽에 정착한 유대인 감성의 선율 일곱 곡으로 구성한 곡이다. 제1곡 ‘마을에서’는 마치 신비의 도시를 발견한 듯한 흥분감으로 시작한다. 시골 마을 시장이 열리는 날의 여러 장면이 담겨 일면 샤갈의 그림을 떠올린다는 내용이다. 제2곡 ‘할머니가 첫 무도회를 떠올리다’에서는 노스탤지어 가득한 왈츠가 연주된다. 한 할머니가 열여섯 살 때의 추억으로 시작해 멜랑콜리한 현실로 되돌아오는 이야기다. 제4곡 ‘마차를 탄 조셉과 자크’에서는 마차의 움직임이 재즈적으로 연주된다. 아슬아슬한 분위기의 스타카토가 이어지고, 선율을 연주하던 파올로 리귀토는 아예 입으로 노래를 불러 청중의 호감을 샀다. 제6곡 ‘포그롬과 카디쉬’에서는 유대인 핍박을 뜻하는 ‘포그롬’(편집자 주_러시아에서 일어난 유태인에 대한 폭력을 의미)을 아주 어두운 오스티나토(악곡 전체에 반복되는 짧은 선율이나 리듬)로 암시한다. 제7곡 ‘그럼에도…’에서는 아주 경쾌한 리듬이 연주되며,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는 철학을 던진다.

유럽에서 태어난 작곡가 노버트 글랜즈버그는 베를린에서 영화음악을 작곡하기도 했다. 그 후 파리로 망명했고, 에디트 피아프·이브 몽탕 같은 가수를 위한 대중음악도 썼다. 그의 음악적 성향이 어디인지를 묻는 논쟁에 앞서, 그 음악이 감동을 주는 이유는 아주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기쁨과 겸손으로 이 악보를 신실하게 연주한 리귀토 부자의 연주는 그 어떤 비르투오소가 줄 수 없는 감동의 세계로 청중을 인도했다.

마리 앙주 누치 ©Valentine Chauvin

 

축제 환경이 연주를 방해하기도

같은 날 저녁 9시 공연에서는 마리아 주앙 피르스의 연주가 취소되었고, 대신 마리-앙주 누치(1998~)가 무대에 올랐다. 이미 세계의 유수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커리어에 비해서, 그녀는 무대에서 어린 소녀 같았다. 피아노 건반에 상체를 밀착한 모습은 글렌 굴드를 연상시켰고, 이 점에서 바흐 ‘샤콘’(부소니 편곡) 연주가 무척 기대됐다. 뛰어난 테크닉으로 옥타브 타건에서 빠지지 않는 힘과 유연함을 동시에 보여준 연주자였다. 다만 바흐적인 중심보다는 부소니적인 환상성이 더 강했다. 분위기가 거대했다. 생크림이 넘쳐흐르는 케이크처럼, 먹음직하지만 그 속에는 무엇이 있는지 잘 안 보여 거리감이 드는 연주였달까. 18일 6시 연주는 레미 제니에(1992~)의 독주회였다. 그는 2013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입상자로 주목을 받으며 한국에서도 연주를 선보인 바 있다. 본 연주 전 바흐의 카프리치오 BWV992를 연습하는 몇 음만 들어도, 얼마나 좋은 음악성을 지녔는지 알 수 있었다.

 

레미 제니에 ©Valentine Chauvin

 

문제는 공연 당시였다. ‘지중해가 이글거리다’라는 말로 표현된 이 날의 폭염과 지나가는 비행기 소리 등의 방해가 컸다. 바흐는 그럭저럭 지나갔지만,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8번은 처음 듣는 곡처럼 낯설었다. 일련의 실수도 있었지만, 연주 전체를 악평할 수 없다. 그러나 베토벤적인 에센스가 증발한 듯한 느낌은 왜였을까. 연주자가 정상에 오르는 것은 힘들지만, 그 수준을 유지하기는 더 어려워 보였다.

 

미지의 피아니스트, 임윤찬의 등장

8월 18일 저녁 9시, 플로랑 성 무대에서 열린 임윤찬(2004~)의 독주회는 기대와 의문으로 시작해 ‘브라보’와 ‘감사해요’로 끝났다. 사실 열아홉 살의 피아니스트가 플로랑 성 무대에 서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럼에도 이 미지의 피아니스트들 만나기 위해 많은 청중이 자리를 잡았다. 연주에 앞서 예술감독 르네 마르탱은 “걱정이요? 전혀 없습니다. 그는 아주 경이로운 연주자입니다.”라고 말하며 임윤찬을 자랑스럽게 언급했다.

프로그램은 차이콥스키의 ‘사계’와 쇼팽의 에튀드 Op.10이었다. ‘사계’는 연주가 쉽지 않다. 시에 부친 곡들은 단순해 보이는 멜로디지만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따라서 내성을 잘 살려내고, 조화롭게 부각하기가 몹시 어렵다. 열아홉 살이란 나이에, 삶에서 오는 많은 갈등과 이해의 폭을 어떻게 결부시킬지 의문이었다. 그러나 첫 곡부터, 임윤찬은 자신만의 감성을 선보였다. 청중은 ‘와!’ 하며, 다음 연주를 어떻게 풀어나갈지에 대한 호기심으로 연주에 빠져들었다. 가장 잘 알려진 ‘6월’에서 청중은 그가 독보적인 존재임을 실감했다. 멜랑콜리한 주제에서 루바토로 동요감을 연주하다가도, 급상승하는 크레셴도의 스케일은 광채에 넘치는 물소리와 흡사했다. 극도의 피아니시모에서는 밀도 높은 뉘앙스가 압권이었다. 연주 후 “루간스키는 저리 가라네!”라고 감탄을 뱉은 한 청중의 코멘트가 이런 임윤찬만의 독특한 피아니즘을 잘 요약했다.

인터미션 때 르네 마르탱은 ‘사계’에서 임윤찬이 보여준 내적 완성도에 만족함을 표시하며 2부의 연주가 더 놀라울 것이라고 예고했다. 실제로 쇼팽의 에튀드 12곡이 연주되는 사이 청중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곡들은 효과적인 손가락 번호 사용과 에너지, 색채와 서정미로 꾸며진 보석이었다. 일간지 ‘라 프로방스’ 기자는 “아주 오랫동안 페스티벌에서의 연주를 봐왔지만, 이런 연주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흥분했고, 파리 루이뷔통 재단에서의 연주 후 임윤찬의 연주를 다시 듣고자 온 ‘디아파종’ 기자는 “역시, 이럴 줄 알았다”라고 기뻐했다. 영어, 혹은 불어로 “감사해요”를 외치는 청중을 향해 임윤찬은 쇼팽 녹턴 20번, 드보르자크의 ‘유모레스크’ 등 세 곡의 앙코르로 답한 후, 깡총 걸음으로 무대를 떠났다. 스타 연주자로서의 면모 뒤에 숨은 열아홉 소년의 수줍음이 청중을 웃게 했다. 놀랍게도 공연장에는 버스로 이동한 한국 청중이 붐볐다. 페스티벌 관례와 달리 임윤찬의 음반 사인회가 진행되지 못 해 아쉬움이 남았지만, 한국 청중은 예술감독 르네 마르탱과 함께 사진을 찍으며 저녁의 몽상적인 취기를 나름대로 아름답게 만끽했다.

배운미(프랑스 통신원) 사진 라 로크 당테롱 페스티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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