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레크 야노프스키 파리 현지 인터뷰

아주 투명한 재회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2월 1일 12:00 오전

“13년이라는 시간 동안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할 수 있는 것을 다 하고 떠났으므로 미련이 없었다. ‘옛 마에스트로와의 해후’라는 표현은 진부하고 게다가 단원들의 절반 이상이 바뀌었으므로 걸맞지 않다. 나 역시 13년 전과는 달라졌고, 오케스트라 역시 그러하다. 단원들과 나는 본질적으로 다른 영토를 디디고 서 있는 개체들이다. 다만 바그너의 음악을 통해 잠시 맞닿아 있을 뿐.”

롤랑 바르트에 따르면, 문학은 언어로써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 형태인 유토피아다. 여기서 문학을 음악으로 치환한다면, 음악 역시 소리로써 도달할 수 있는 유토피아일 것이다. 이 유토피아에서는 음악만이 오롯이 남는다. 하얗고 중립적인 0도의 상태에서 청중은 신의 곁에 가까이 간 지휘자의 절대적인 힘을 느낀다. 지난 1월, 마레크 야노프스키는 모든 것이 다 사라지고 음악만 남은, 0도 지점의 바그너를 불러냈다. 바그너의 이데아를 단 한 순간도 벗어나지 않고자 혹독하게 오케스트라를 이끌었다. 리허설을 지켜보는 내내, 바그너에 대한 그의 헌신과 완벽주의가 무한선율과 함께 깊숙하게 전해졌다. 13년 만에 라디오 프랑스 필을 이끈 마레크 야노프스키를 파리에서 만났다.

오페라 지휘를 중단한 지 어느덧 18년이 되었다고 들었다. 콘서트 형식으로만 오페라를 연주하는 이유가 있다면?
커리어를 오페라로 시작했다. 오페라를 지휘하지 않는 데 아쉬움이 없다고 하면 거짓이다. 콘서트 형식으로 바그너ㆍ베토벤을 꾸준히 무대에 올리고 있으니 오페라를 완전히 내려놓지는 않았다. 1970년대 이후 오페라에 대한 정의가 변해왔다. 오페라란 모름지기 연기와 연출이 함께하는 음악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음악’인데 현재 많은 이들이 음악 아닌 ‘연극’적 측면에 방점을 찍는다. 견딜 수 없는 연출을 참고 견뎌야 했던 적이 잦았다. 오페라 프로덕션을 시작하기 전, 사람들은 지휘자인 나에게 연출가를 선택할 권리를 주겠다고, 지휘자인 나를 존중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단 한 번도 내 마음에 들었던 연출은 없었다. 제작 과정을 거치며 음악은 점점 주변으로 밀려나곤 했다. 그들에게는 연극적인 효과와 무대 장치들, 새로워야 한다는 아방가르드적 강박이 음악보다 우선이었다. 음악이 우선되지 않는 오페라를 지휘한다는 것은 지휘자로서 무력감을 느끼는 불쾌한 경험이다. 오페라의 본질적 가치가 퇴색되는 것을 손 놓고 바라봐야 하니까.
내가 지휘를 시작하던 당시의 오페라는 요즘 같지 않았다. 음악이 우선이었고, 연출과 무대장치는 부수적인 요소에 머물렀다. 정확히 1970년대 동독에서 시작된 새로운 경향이 곧이어 몇몇 지식인들의 지지를 통해 서독에까지 퍼졌다. 1990년대를 지나며 유럽과 북미까지 전파되어 하나의 스타일로 자리 잡았다. 기괴하고 초현실적인 연출들이 파격ㆍ아방가르드ㆍ미니멀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유혹했다. 몇몇은 이를 두고 오페라의 진보라고 평했지만 나는 오히려 몰락이라고 본다. 발전과 진보라는 표현은, 새로움을 향한 연출적 시도들이 충실한 음악에 기반했을 때 가능한 단어이다. 설령 발전이라 할지라도 다분히 위험한 방향으로의 발전이다. 무대 연출과 장치들에 집중하면서 오페라의 연극적 측면이 강화되었지만 오페라는 결코 연극이 아니다. 연극적 측면을 가지고 있는 ‘음악’이므로, 모든 기준과 연출적 효과들은 연극의 그것과는 다르게 고려되어야 한다.
30~40년 전 나는 이 모든 것들이 단지 한순간의 유행일 뿐이라고 생각했고, 잠시 이대로 두면 사라지고 다시 예전대로 돌아올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점점 더 세계적으로 확산되어갔다. 내가 독일에서 오페라를 지휘하지 않는데 유럽의 타 국가나 북미에서 지휘한다고 하면 이율배반 아닌가. 그래서 나는 극장 프로덕션에 의해 제작되는 오페라라는 장르와 완전히 결별하기로 마음먹었다. 음악적 완성도가 뒷전이 되면서, 내가 이끄는 오케스트라가 화려한 무대장치와 파격을 일삼는 연출을 따라가야 하는 가수들을 그저 반주하는 역할에, 연출가의 미장센을 빛내주는 조연에 머무른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이 경향은 최근까지도 이어지며 오페라를 사람들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사실 오페라 지휘자는 연출과 미장센을 책임지는 위치가 아니다. 그러니 나와는 상관없다 할 수도 있겠지만 지휘자 역시 이 오페라극장 컴퍼니, 제작사에 속한 일원이다. 한 배를 탔으니 내가 만족할 수 없는 결과물을 만들어내고 있는 그들과 파트너가 되어야 한다. 몇 번의 경험을 통해, 나는 내가 그들의 의사에 반하는 것을 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많은 극장장들이 나에게 원하는 대로 연출가를 찾아 무대 연출을 내 입맛에 맞게 하라고 했지만 그런 시도와 도전에도 불구하고 결과물은 실망스러웠다. 나는 그렇게 그들과 파트너십을 맺을 수 없다는 것을 체득했다. 대신 콘서트 형식으로는 오페라를 계속하고 있다. 단 연극적 요소가 덜한 오페라로 콘서트 형식에 적합한 레퍼토리만 가능하다. 예를 들어 ‘피가로의 결혼’을 콘서트 버전으로 공연하면 곳곳에 숨어있는 희극적 요소들을 모두 포기해야 한다. 반면 바그너의 몇몇 작품에서는 배우들의 동선도 단순하고, 연기 동작도 많지 않고, 주요 인물들 간의 긴 대화와 아리아, 이를 반주하는 오케스트라의 역할이 부각된다. 베토벤의 ‘피델리오’는 성악이 결합된 교향곡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레퍼토리들을 콘서트로 올리는 것은 무리가 없다. 하지만 연극적 요소가 강한 슈트라우스의 ‘엘렉트라’나 ‘살로메’를 콘서트로 올리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이렇게 콘서트 형식에 적합한 오페라 레퍼토리를 계속 지휘하며 오페라와 완전히 멀어지지 않고 있을 뿐, 극장의 전막 공연으로 다시 돌아갈 생각이 전혀 없다. 오페라를 관둔다는 것은 내 원칙에 기반한 결정이었다. 나는 철저히 원칙을 지키면서 음악을 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당신의 음악적 원칙은 무엇인가?
투명하고 또렷하게 음악의 구조를 전달하는 것이다. 쓸데없는 치장 없이 음악의 골격을 충분히 드러낸 연주가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연주이다. 근래 들어, 바그너의 관능을 전달하겠다면서 지휘자의 자의적 해석으로 지나칠 정도의 과장된 살집을 붙이는 것이 유행이다. 만약 육감적인 몸으로 완성된다면 그것 역시 새로운 바그너가 되겠지만, 자칫 순간의 실수로 비계 덩어리가 되어 음악의 뼈대가 파묻혀 전혀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연주 중에 템포를 멋대로 바꾸거나 스스로 절제하지 못하고 강한 아고긱을 남발하는 건 용납할 수 없다. 지나치게 예민하고 신경질적일 정도로 내가 원하는 바를 분명히 전달하고, 단원들이 나의 지시를 따라오길 바란다. 물론 어느 정도 타협을 하긴 한다. 세 번의 리허설만 가능한 객원지휘자로 (파리에) 왔기 때문에 주어진 짧은 시간 동안, 내가 조절해낼 수 있는 범주 안에서 최대치를 뽑아내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아주 지독한 고집으로, 때로는 군림하듯 단원들에게 주문한다. 나의 음악적 원칙은 음악을 섬기는 것이다. 악보 위에 존재하는 음표들과 악상을 그대로 따르는 것, 기본 중 기본이지만 이 기본을 100퍼센트 해내는 것은 쉽지 않다. 아까 리허설에서도 보았듯이 악보에는 메조피아노라고 표시되어있지만, 오케스트라에서 악기들의 소리가 모이다 보면 메조포르테와 메조피아노에 큰 차이가 나지 않는 경우도 흔하다.
지휘자가 되겠다는 어떤 결정적 동기나 순간이 있었나? 리허설에서 지켜본 당신은 원하는 것을 위해 집요하게 오케스트라를 몰아가는 조련사처럼 보였다.
일곱 살에 바이올린을, 2~3년 후에 피아노를 시작했다. 악기를 연주하면서 음악에 반했다. 이 두 악기에 많은 애착을 가졌으므로 어린 소년임에도 불구하고 완벽한 시간 관리를 해냈고, 충분한 연습 시간을 확보했다. 악기를 꾸준히 하기 위해 학교 공부도 효율적으로 충실히 해냈다. 학교에서도 성적이 우수한 학생에 속했고, 수학을 좋아했다. 음악만큼, 순수한 팡세들의 세계가 수학 아닌가. 아비투어(독일대학입학자격시험)를 마치고 쾰른 대학에서 수학과 음악을 전공했고, 동시에 쾰른 음대에 등록해 음악을 계속했다. 열아홉 살에 내가 남에게 어떻게 해야 한다고 명령하는 것과 그런 위치에 있는 것을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다. 반대로 누군가 나에게 이렇게 해야만 해, 라고 하는 건 견딜 수 없이 싫었다. 현대사회를 보면 타인에게 이렇게 해야만 한다고, 나를 존중하며 따라오라고 말하는 직업은 흔치 않다. 지휘자가 그 드문 위치에 있는 직업 중 하나이다. 내가 사랑하는 음악을 내 성격에 가장 어울리는 방식으로 도달하고자 하다 보니 지휘자가 된 셈이다.


▲ ⓒFelix Broede

지휘를 시작하며 유명한 지휘자가 된 오늘을 예상했는지?
많은 지휘자들이 지휘를 시작하면서 손꼽히는 유명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전 세계에 이름을 알리는 꿈을 꾼다. 나 역시 그랬다. 꿈을 이룬 셈이니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 행운이 다가왔을 때, 나는 그 행운을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늘 바란 대로 커리어가 성장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자주 계획을 수정하면서 후퇴하기도 했다. 지휘란 인생을 두고 성숙하며 걸어가는 길이기에 지휘자로서 장기적인 목표를 세우고 꾸준히 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나는 쇼맨십이 강하거나 청중에게 어필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공연을 보러 와서 크고 강렬한 몸짓으로 마치 연극배우처럼 움직이는 지휘자들에게 열광하기 쉽다. 그건 시각적 경험에 기반한 것이다. 나에게 최우선은 시각적 경험이 아닌 청각적 경험이다. 귀로 듣는 것에는 주관이 개입할 여지가 덜하고 허위와 장식, 과장과 연출이 섞일 수 없다. 나는 청각이 시각보다 좀 더 신뢰할 만한 감각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내가 나에게 존재하지 않는 쇼맨십을 선보이면서 다른 사람 흉내를 냈다면 그것은 진정성에 위배된 행위였을 것이다. 진짜 내가 아닌 청중에게 어필하기 위한 거짓의 내가 그곳에 있었을 텐데, 거짓과 위장은 일시적이고 표면적인 수단에 불과하다. 나는 가장 ‘나’다운 방식으로 지휘를 해왔고 명성은 중간에 따라왔다. 점점 젊은 지휘자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고, 나는 과거의 늙은 혹은 구식의 지휘자로 분류된다. 하지만 30~40대의 젊은 지휘자들은 베토벤ㆍ슈베르트ㆍ슈만을 제대로 지휘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그들의 스트라빈스키ㆍ라벨ㆍ쇼스타코비치 등은 훌륭할 수 있지만 18~19세기 고전과 낭만 레퍼토리의 완벽한 해석에는 인생에 대한 통찰과 경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생을 살아내야만 덤으로 따라오기 때문에 젊은 사람들은 아무리 타고난 재능을 가졌더라도 절대로 가질 수 없다.
내키지는 않지만, 나를 가리켜 오케스트라의 수준을 올리는 ‘오케스트라 빌더’라고 부르는 것을 자주 듣는다.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도 그렇고, 현재 음악감독을 맡고 있는 베를린 방송교향악단도 지금 아주 높은 수준까지 올라왔다. 오케스트라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데 필요한 것은 정확한 소리를 갖추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술가적 영감이 아닌 수공업자의 장인정신이 필요하다. ‘이 정도면 괜찮아’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원하는 소리에 도달하기 위해 끝까지 몰아붙여야 한다. 물론 시간을 두고. 100퍼센트의 정확한 연주에 도달하고자 노력하고, 그 노력이 반복되면서 오케스트라는 정확한 연주를 비로소 내면화ㆍ체화하게 된다. 언제나 소리를 정확히 낼 수 있게 되는 경지에 이른다. 악보의 적절한 셈여림과 박자를 지키는 것은 얼핏 간단해 보이지만, 수십 명이 모여 소리를 만들다 보면 음악의 기본인 정확한 연주도 상당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100도에서 비로소 물이 끓는다. 물이 수증기로 기화하듯, 소리가 아닌 음악이 되는 지점은 오로지 100도이다. 만약 지휘자가 오케스트라를 앞에 두고 98도 혹은 99도에서 멈춘다면 그 오케스트라는 결코 성장하지 않는다. 예술적 해석을 더하고 ‘음악’으로 관객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그 다음 단계이다. 아주 단순 명료한 명제인데 많은 오케스트라들이 성급하게 음악을 하려고 한다. 정확한 소리라는 재료가 갖춰지지 않은 채로 과연 음악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세밀화를 그리는데 제일 큰 호수의 붓을 들고 있다면 그 그림은 완성될 수 없다. 완성되더라도 그건 세밀화가 아닐 것이다.
무려 13년 만에 라디오 프랑스 필을 지휘했다.
나는 1984년부터 2000년까지 16년 동안 라디오 프랑스 필을 이끌면서 오케스트라의 안정성을 확보하고자 노력했다. 국영방송에 속한 만큼 당시의 오케스트라 구성은 다분히 관료적인 형태였으므로 오케스트라의 성장에는 걸림돌이 많았다. 음악에만 집중할 수 없는 구조였다. 다행히 이런 행정적인 어려움을 타개하는 동시에 독일의 전통적인 교향곡 레퍼토리들을 차례차례 연주해냈다. 오케스트라에게 큰 도전과 같은 레퍼토리들을 차례대로 섭렵해나간 것이다. 라디오 프랑스 필은 점점 기복이 심하지 않고 어떤 레퍼토리에도 꽤 괜찮은 연주를 하는 오케스트라가 되어갔다. 이어 지휘봉을 건네받은 정명훈은 음악적 마법을 불러일으키며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에 예술적 영혼을 불어넣었다. 이제 라디오 프랑스 필은 내가 있던 시절보다 더 큰 명성에 빛나는 명실상부한 프랑스 최고의 오케스트라이자 유럽 전역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을 가진 오케스트라가 되었다. 뿌듯한 마음이 든다. 13년이라는 시간 동안 한 번도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할 수 있는 것을 다 하고 떠났으므로 미련이 없었다. ‘옛 마에스트로와의 해후’라는 표현은 진부하고, 게다가 단원들의 절반 이상이 바뀌었으므로 그다지 걸맞지 않다. 나 역시 13년 전과 많이 달라졌고, 오케스트라 역시 그러하다. 뛰어난 실력을 갖춘 악장 스베틀린 루세프를 비롯해 많은 젊은 음악가들이 입단하여 보다 안정적인 실력과 날카로운 정확도를 가진 오케스트라로 거듭났다. 지휘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내고 있는 소리에 집중하는 것이다. 정명훈 휘하에서 라디오 프랑스 필은 내가 떠났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화학적 변화를 거친 듯한 다른 오케스트라로 변했다. 분위기도, 단원들도, 모든 것이 완전히 다르다. 단원들과 나는 본질적으로는 다른 영토를 디디고 서 있는 개체들이다. 다만 바그너의 음악을 통해 잠시 맞닿아 있을 뿐이다.
이번 바그너 프로그램 구성에 대해 이야기해준다면?
바그너를 연대순으로 연주하면서, 첫날과 이튿날에 걸쳐 바그너의 정수를 전달하고자 했다. 1월 초는 사실 신년 휴가를 떠난 파리지앵들이 아직 돌아오지 않은, 바그너를 연주하기에 너무 이른 시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그너의 탄생 200주년인 2013년의 1월 첫 주에, 전주곡과 몇몇 장면을 연주해 청중으로 하여금 전막 오페라를 보러 가고 싶다는 열망을 불어넣는 프로그램을 하는 건 의미가 있다. 혹은 전막이 너무 길어 아직 바그너 음악의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는 프로그램이 될 수도 있다.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탄호이저’ ‘로엔그린’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지나, ‘파르지팔’ ‘지크프리트’ ‘신들의 황혼’으로 마무리가 되니 바그너 오페라의 가장 훌륭한 면면을 모두 담았다.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이전의 작품들은 음악적으로나 구성적으로나 바그너의 범작에 불과하기 때문에 프로그램에서 배제했다.
끝으로, 커리어를 돌이켜본다면?
평생 음악을 충실히 섬길 수 있어서 지휘자로서는 행복했다고도 할 수 있다. 지금도 베를린 방송교향악단의 괄목할 만한 성장과 콘서트 형식의 바그너 연주 실황 음반 발매(Pentatone) 등 바라던 프로젝트들이 차근차근 이뤄지고 있다.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와 함께 녹음한 ‘니벨룽의 반지’처럼 음악을 통해 동서독이 화합을 이룬 경험도 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23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뒤셀도르프와 라이프치히의 그림은 그 스타일이 다르다. 도시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다. 오케스트라들의 소리와 스타일도 여전히 다른 나라에서 온 것처럼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으로 경계를 뛰어넘은 셈이다. 음악이었기 때문에, 바그너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걸지도 모르다. 바그너 ‘니벨룽의 반지’는 귀하고 높고 아름다운 그 무엇이다.
당신의 이름 앞에 수식어를 붙여보자.
아주 개인적인 방식으로, 최선을 다해 충실히 음악을 섬긴 지휘자.
(내내 확신에 찬 말투로 답하던 그가 아주 천천히 단어를 골랐고, 단어를 곱씹으며 ‘나는 그저 위대한 음악을 섬길 뿐’이라고 덧붙였다.)

이틀에 걸친 공연에서 각각 마지막 곡이었던 ‘트리스탄과 이졸데’ 가운데 이졸데의 죽음, ‘신들의 황혼’ 브륀힐데의 희생의 장면이 끝나고 빈틈없이 들어찬 살 플레옐의 객석에서는 한 순간 정적이 지나간 이후, 아주 오랫동안 열광적인 박수가 이어졌다. 공연장에서 만난 전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의 클라리넷 수석주자 로베르 퐁텐은 “야노프스키와 연주하던 시절의 우리는 이런 수준에 도달한 적이 없었다. 실연으로 들은 가장 아름다운 바그너”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를 거쳐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에 입단한 젊은 오보이스트 요하네스 그로소는 야노프스키의 스타일에 대해 큰 만족을 표했다. “라디오 프랑스 필은 여전히 개성이 강하고, 게반트하우스와 비교해 불균질한 소리를 내는 경향이 있다. 야노프스키와의 리허설을 통해 균질한 표면을 가진 유리처럼 투명하게 소리를 만들고, 한 덩어리가 된 것처럼 음악을 향해 갈 수 있었다. 독일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정확성과 균질함, 마디에 딱딱 들어맞는 박자와 어느 순간에도 절제를 잃지 않는 미덕을 야노프스키를 통해 다시 배웠다.”
역시 공연장에서 만난 지휘자 겸 클라리네티스트 폴 메예르는 오랜만에 파리를 찾은, 전통에 충실한 이 지휘자에게 경의를 표했다. “분명한 뼈대를 갖추고 듣는 이의 심장 깊은 곳까지 진입하는 바그너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내내 몇몇 장면들을 지휘하면서 걸어갔다. 지휘자에게는 명징한 지휘에 대한 영감을, 청중에게는 밝은 색채의 명료한 바그너를 선사했다. 과장도 장식도 없이 순수한 음악만이 존재하는 공연이었다. 지휘자로서 그가 어째서 오페라가 아닌 콘서트를 선택했는지 십분 이해할 수 있다.”

글 김나희(파리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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