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결혼을 앞둔 예비신부입니다. 결혼 준비로 정신없는 와중에 지난 연말 친구의 결혼식에 다녀왔어요. 전과 다르게 예식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훅” 하고 들어오더라고요. 특히 음악이 그랬죠. 피아노로 연주하는 ‘결혼행진곡’ ‘축혼행진곡’은 어린 시절 ‘소녀의 로망’이었는데… 그간 너무 많이 들어서일까요. “딴 딴다 단따 따아안 따아안” 하는 서주부터 그저 지루하게 느껴졌습니다.
저만의 특별한 결혼식 음악을 선곡하고 싶어요! 문제는 여기에 나름 조건이 있다는 점입니다. 어르신들도 많이 오시는 자리이니 너무 시끄럽거나 가벼운, 혹은 너무 ‘시크한’ 팝이나 재즈는 아니었으면 합니다. 가능한 클래식 음악 장르 안에서 선곡하되, 뻔하지 않았으면 하고요. 참고로 피아노가 있긴 하지만 식장이 작은 편이에요. 제 조건이 너무 까다롭나요?
서울 비봉길에 사는 예비신부 김영지
A 김영지 독자님, 먼저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 드립니다. 말씀하신 선곡 조건이 그리 까다롭게 느껴지지는 않으니 걱정 마세요. 조건에 맞추되 지극히 ‘주관적’으로 조언해드릴 거니까요. 그럼 저는 잠시 DJ로 변신하겠습니다. 체키라웃!
피아노로 연주되는 “딴 딴다 딴”의 식상함! 뻔함! 그 공포부터 없애고 넘어가죠. 간단합니다. 같은 ‘결혼행진곡’이라도 피아노 독주로 연주하지 않으면 됩니다. 그래서 피아노 트리오를 섭외하느냐? ‘빵빵’하고 번쩍번쩍한 금관 앙상블을 모셔오느냐? 아뇨. 그저 원곡을 틀면 됩니다. 예식장 오디오에 바그너 오페라 ‘로엔그린’ 음원을 넣어두면 끝입니다.
흔히 신부 입장 음악으로 쓰이는 ‘결혼행진곡’의 원곡은 ‘로엔그린’ 3막 결혼식 장면에 등장하는 ‘혼례의 합창’입니다(온라인에서 오페라 전곡 아닌 개별 음원을 구입할 수 있으니 참고하세요). 원래 대편성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함께 하는 아주 큰 곡이지요. 결혼식에서 피아노 독주 혹은 소편성 기악 앙상블로 연주되지만 어떤 편성이든 ‘원곡의 원형’이 주는 화사함과 성스러움을 재현하긴 쉽지 않습니다.
사실 바그너의 ‘로엔그린’은 파국으로 끝을 맺습니다. 결혼식 당일, 신부 엘자는 ‘신랑의 정체를 캐묻지 않는다’라는 금기를 깹니다. 세상 모든 동화·설화들이 그렇듯이 말이죠. 금단의 질문을 받은 신랑, 즉 성배의 기사 로엔그린은 자신의 정체를 밝힌 뒤 유유히 사라져버립니다. 신부 엘자는 고통과 슬픔 속에 죽어버립니다.
이렇듯 불행한 사건사고를 담은 바그너 ‘로엔그린’의 음악이 어떻게 실제 결혼식장에서 울려 퍼지게 됐을까요. 그 시작은 19세기 중반 영국 왕실의 결혼식으로 거슬러 오릅니다. 빅토리아 공주는 자신의 결혼식을 위해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에 맞춰 바그너 ‘로엔그린’ 3막과 멘델스존 ‘한여름 밤의 꿈’의 혼례 장면에 등장하는 음악을 선곡했습니다. 이들이 오늘날 각각 ‘결혼행진곡’과 ‘축혼행진곡’으로 자리잡았죠. 영국 공주와 프러시아 왕자의 이 성대한 결혼식은 음악뿐 아니라 신부의 하얀 드레스라는 공식을 정착시킨 계기가 됐다고 합니다.
자, 그럼 신부 입장 음악은 ‘로엔그린’ 3막 혼례의 합창으로 정해졌습니다. 선곡의 절반은, 아니 8할은 완성된 셈입니다. 결혼식의 꽃, 결혼식의 ‘갑’은 신부이지 누굽니까! 그러니 이제 여유를 갖고 나머지 음악을 정해보죠. 식전 음악, 화촉 점화, 신랑 입장, 퇴장 행진이 남았습니다. 먼저, 본식 시작 전 장내에 흐르는 식전 음악. 김영지 독자님의 결혼이 친정 부모님의 지난 10여 년의 숙원이고, 그래서 온 집안의 대잔치라 해도 식전엔 뭔가 아스라한 분위기가 필요합니다. 섭섭함과 설렘, 그리움과 기대… 상반된 감정의 버무림을 멋지게 승화시킬 음악으로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 3악장 아다지오를 추천합니다. 아련한 클라리넷의 솔로, 현악군이 이끄는 따뜻한 사운드… 기승전결이 확실하면서도 줄곧 애잔하고, 쨍쨍거림이나 꽝꽝거림이 상대적으로 덜 등장하는 교향곡인지라 장내에서 여러 번 반복하기 좋습니다.
아다지오 악장의 길이는 15분 내외. 두 번 정도 반복하면 이제 본식이 시작되고 양가 어머님의 화촉 점화 순서입니다. 피아노 독주곡인 라벨 ‘물의 유희’로 신비로운 분위기를 조성해볼까요. 곡이 표현하는 물의 오묘한 퍼짐은 촛불을 밝혀 주변을 환히 만드는 이 상황과 잘 어울립니다. 연주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시작 후 30여 초가 지나면 라벨의 과감한 불협화음이 등장하니 이 점 유의하십시오.
자, 그럼 신랑 입장과 신랑신부 행진이 남았습니다. 두 순서 모두 앞길 창창한 느낌을 살려야 할 텐데요. 통일성을 위해 한 작품에서 두 악장을 가져오겠습니다. ‘영광, 영광’을 고조시킴에 있어 최고의 작곡가라 할 요한 제바흐티안 바흐. 그의 관현악 모음곡 4번BWV1069 3악장 가보트를 신랑을 위해 추천합니다. 두 박자로 딱딱 떨어지는 가보트이니 신부를 향한 발걸음은 자동으로 당당해질 겁니다.
벌써 신랑신부의 퇴장 순서네요. 앞서 ‘결혼행진곡’의 경우처럼, ‘축혼행진곡’을 멘델스존의 관현악 원곡 버전으로 틀어도 좋지만 개인적으로는 템포가 너무 빨라 정신없다는 인상을 늘 받아왔습니다. 그 대안으로 바흐 관현악 모음곡 4번 중 1악장 서곡은 어떨까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여유로운 템포에 맞춰 찬란한 광채를 품은 고음의 금관 사운드가 신랑신부의 머리 위로 쏟아질 겁니다. 금빛 꽃가루가 따로 필요 없습니다.
아, 추가로 저작권에 대해서도 짧게 언급해 볼까요. 개인이 구입한 음원을 자신의 결혼식에서 사용한 것이 저작권법 위반이란 사례는 아직 못 봤습니다. 반면 결혼식·돌잔치를 담은 영상(전문업체 제작)의 배경음악은 저작권료 지불 대상이라 하니 참고하십시오.
그나저나 김영지 신부님, 제 선곡 마음에 드시나요?
글 박용완 기자(spirate@gaksu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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