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윌리엄스❶

20세기 영화음악의 살아 있는 전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5년 3월 1일 12:00 오전

스티븐 스필버그와의 환상적 호흡으로 영화음악에 한 획을 긋다

스티븐 스필버그와의 환상적 호흡으로 영화음악에 한 획을 긋다

여기, 질리도록 상복이 많은 작곡가가 있다. 아카데미상 5회 수상(49회 후보), 에미상 3회 수상(6회 후보), 골든 글로브상 4회 수상(25회 후보), 그래미상 22회 수상(65회 후보), 그 밖에 영국 아카데미 영화상 7회 수상뿐 아니라 미국영화협회 수상 경력 그리고 국제올림픽위원회로부터 올림픽훈장까지 받은 작곡가 존 윌리엄스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존 윌리엄스의 오선지에서 빚어진 숱한 판타지와 드라마 속 감동은 20세기 영화음악의 가장 대중적이고, 광범위한 영향력의 결과물이었다.

할리우드에 우뚝 서다

존 윌리엄스는 1932년 2월 8일, 미국 뉴욕에서 존 타우너 윌리엄스라는 본명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조니 윌리엄스는 CBS 라디오 오케스트라와 뉴욕의 클럽에서 연주하던 타악기 주자이자 드러머였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그는 여섯 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으며, 클라리넷·트럼펫·트롬본 등의 악기를 익히며 음악가로서 자질을 넓혔다. 1948년 가족 모두 LA로 이주한 것은 그의 진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 존 윌리엄스는 노스 할리우드 고등학교에 다니는 동안 밴드부에 가입했고, 틈틈이 작곡과 오케스트레이션을 익혔다. 존 윌리엄스에게 작곡가로서 넓은 세계를 알려준 이는 LA 캘리포니아 대학교(UCLA) 음악대학 스승이던 현대음악 작곡가 마리오 카스텔누오보 테데스코였다. 1952년 미 공군에 입대해 한국전쟁에 참전하기도 한 존 윌리엄스는 제대 후 1955년 뉴욕의 줄리아드 음악대학에서 1년간 수학했다. 뉴욕의 클럽과 식당에서 팝과 재즈를 연주하던 존 윌리엄스는 1956년 여배우 바버라 뤽과 결혼했고, 곧 LA와 할리우드로 활동 공간을 옮겼다.

미국 영화의 메카 할리우드에서는 그가 할 일이 많았다. 존 윌리엄스 이전에 할리우드 영화음악의 전성기를 이끌던 버나드 헤르만·알프레드 뉴먼·프란츠 왁스만·제리 골드스미스·엘머 번스타인·헨리 맨시니의 작품을 조력하는 것은 새로운 앎과 깨침의 과정이었다. 특히 1959년부터 1963년까지 헨리 맨시니의 영화 ‘피터 건’ ‘술과 장미의 나날’ ‘샤레이드’ 등의 음악을 직접 연주·녹음하는 수련 과정에서 그는 영화와 음악의 연결 고리를 선배의 경험을 통해 깨칠 수 있었다. 1958년, 영화 ‘대디-오(Daddy-O)’의 사운드트랙을 맡은 후 피아노 연주뿐 아니라 편곡과 작곡에도 영민한 재주를 보인 존 윌리엄스에게 작곡을 의뢰하는 곳이 점차 많아졌다.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길리건의 섬(Gilligan′s Island)’ ‘독신 아버지(Bachelor Father)’(1959~1960) ‘크래프트 서스펜스 시어터(Kraft Suspense Theatre)’ ‘로스트 인 스페이스(Lost In Space)’(1965~1968) ‘타임 터널’(1966~1967) ‘거인의 땅(Land Of The Giants)’(1967) 등 TV 프로그램에서의 음악 작업이 계속되었지만, 존 윌리엄스는 재주 많은 젊은 작곡가로 인식되었을 뿐이었다.

1967년 ‘인형의 계곡’을 통해 생애 최초로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르고, 2년 뒤 ‘굿바이 미스터 칩스’와 ‘리버스’ 두 작품으로 후보에 오르면서 존 윌리엄스는 할리우드의 주류 작곡가로 급부상했다. 존 윌리엄스는 노먼 주이슨 감독의 1971년작 ‘지붕 위의 바이올린’을 통해 첫 번째 아카데미상을 거머쥐었다. 존 윌리엄스가 작곡·지휘를 맡고 아이작 스턴이 바이올린 솔로를 연주한 이 영화음악에서 존 윌리엄스는 유대인의 민속음악과 클래식 음악의 접점을 찾고, 따스하고 애절한 감성을 뚜렷한 선율로 시각화했다.


▲ 2012년 애틀랜타 심포니 홀에서 콘서트를 마치고, 스티븐 스필버그와 함께 웃고 있는 존 윌리엄스 ⓒJeff Roffman

스티븐 스필버그와의 운명적인 만남

영화 ‘지붕 위의 바이올린’ 이전에도 존 윌리엄스는 다수의 영화음악을 작곡했다. 차이콥스키와 바그너를 흠모하고, 동시에 버나드 헤르만·엘머 번스타인·헨리 맨시니 등의 할리우드 영화음악 작곡가들의 작풍을 계승한 존 윌리엄스에게는, 그때까지 자신의 재능을 한껏 드러낼 기회가 없었다. ‘환상 속의 사랑’(1972) ‘포세이돈 어드벤쳐’(1972) ‘신데렐라 리버티’(1973) ‘톰 소여(Tom Sawyer)’(1973) ‘타워링’(1974) 등 한결 규모가 커진 그의 작품은 아카데미상에 연속해서 후보에 올랐지만, 아직 ‘존 윌리엄스의 음악은 이런 것이다’라는 포인트가 없었다.

1975년은 존 윌리엄스의 생애에서 운명적인 한 해였다. 존 윌리엄스에게 날개를 달아준 이는 1975년 당시 서른이 되지 않은 나이에 두 번째 할리우드 연출작을 내놓은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였다. 스필버그는 자신의 첫 번째 상업영화 ‘슈가랜드 특급’(1974)의 편집을 끝낸 후, 이 영화의 음악을 존 윌리엄스에게 의뢰하고자 그에게 만남을 요청했다. 스필버그는 존 윌리엄스가 영화음악을 맡은 1969년작 ‘리버스’의 음악에 일찌감치 매료되어 있었다. 존 윌리엄스가 ‘슈가랜드 특급’의 작업을 수락하고 나자 스필버그는 “내가 감독을 맡는 영화의 음악은 오직 존 윌리엄스와 함께한다”며 그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보여주었다. 실제로 스티븐 스필버그의 이러한 약속은 단 두 편의 영화를 제외하고는 고스란히 존 윌리엄스와 함께 작업함으로써 오늘날까지 지켜오고 있다.

1975년 개봉해 영화 사상 최초로 1억 달러 이상의 흥행 수익을 기록한 영화 ‘죠스’는 스필버그뿐 아니라 존 윌리엄스에게도 운명적인 작품이다. 거대 상어에 대한 공포를 음악적·시각적·심리적으로 지배했던 존 윌리엄스의 관현악에 의한 주제 음악과 변주는 곧 영화 ‘죠스’의 상징이 되었다. 누구나 한번 들으면 절대 잊을 수 없는 멜로디와 리듬, 그리고 앙상블의 주제부는 영화음악이 전달할 수 있는 극적 효과를 발휘하며 극한의 긴장과 공포를 안겨주었다. 이 영화의 음악을 위해 스트라빈스키와 레이프 본 윌리엄스의 수많은 음반을 함께 들으며 격론을 나눈 두 사람의 하모니는 영상과 음악이 가장 조화롭게 어울려 최대치의 결과를 일궈낸 사례를 만들었다. 1975년 존 윌리엄스는 ‘죠스’를 통해 두 번째 아카데미상을 거머쥐었다. 그래미상 영화음악 부문도 ‘죠스’와 존 윌리엄스의 것이었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에서 존 윌리엄스의 음악이 없다는 것은 기이한 일일 정도로 둘의 신뢰는 특별했다. ‘E.T.’ ‘인디아나 존스’ ‘태양의 제국’ ‘후크’ ‘쥬라기 공원’ ‘쉰들러 리스트’ ‘라이언 일병 구하기’ ‘터미널’ ‘우주전쟁’ ‘뮌헨’ ‘틴틴’ ‘링컨’에 이르기까지 이 명작들은 스티븐 스필버그·존 윌리엄스 콤비가 엮어낸 음악적 서사시의 일부였다. 조지 루카스 역시 직접 제작·연출을 맡은 ‘스타워즈’ 시리즈와 자신이 제작자로, 스필버그가 연출자로 참가한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의 음악을 존 윌리엄스에게 맡겼다.

“내 영화는 사람들의 눈에 눈물을 고이게 하지만, 그것을 흘러내리게 하는 것은 윌리엄스의 음악이다.”(스티븐 스필버그)


▲ 존 윌리엄스가 애틀랜타 심포니 홀에서 자신의 곡을 지휘하고 있다 ⓒTodd Rosenberg

‘스타워즈’와 ‘슈퍼맨’ 그리고 ‘E.T.’

“존 윌리엄스는 영화감독의 마음속에 있는 바로 그 음악을 들려주는 사람이다.”(조지 루카스)

스티븐 스필버그는 절친한 동료인 영화감독 조지 루카스에게 존 윌리엄스를 소개했다. 조지 루카스는 일생의 역작 ‘스타워즈’를 구상하면서 진작부터 바그너의 광기 어린 음악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존 윌리엄스는 바그너와 R. 슈트라우스 음악의 분위기를 연상시키는 음악을 작곡해보겠다는 의욕을 드러냈다. 덕분에 전 세계 영화 팬과 음악 팬은 영화음악 역사상 가장 기억에 남을 멜로디와 앙상블로 입체화된 ‘스타워즈’의 환상적인 음악을 접하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스타워즈’ 등장인물의 캐릭터를 고스란히 형상화한 각각의 주제곡과 우주선의 공격, 그리고 복수를 표현하는 서사적인 작품 덕분에 1977년 아카데미상은 ‘스타워즈’와 존 윌리엄스에게 돌아갔다. ‘스타워즈’는 그해 그래미상 세 개 부문을 석권했으며, ‘스타워즈’의 주제곡은 빌보드 싱글 차트 10위에 오르는 등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해 스티븐 스필버그의 연출작 ‘미지와의 조우’에도 존 윌리엄스의 섬세한 작곡 능력과 웅장한 스케일이 발휘됐지만, ‘스타워즈’에 밀려 후보에 머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영화 ‘죠스’와 ‘스타워즈’가 안겨준 충격과 감동의 파장은 실로 거대했다. 1978년 리처드 도너 감독의 영화 ‘슈퍼맨’에 사용된 행진곡풍의 관악 앙상블은 ‘스타워즈’의 주제부를 연상시키는 또 하나의 선명한 테마였다.

박진감 넘치고 드라마틱한 영화음악 제조법을 제시한 스타 작곡가로 급부상한 존 윌리엄스는 그의 명예에 결정적 기회를 안겨준 스티븐 스필버그와 조지 루카스의 성공과 함께 동반 성장을 거듭했다. 자신의 작품이 지나치게 돋보여 관객의 몫인 영화적 상상력을 방해하는 것을 경계한 존 윌리엄스지만, 1982년 그에게 네 번째 아카데미상을 안겨준 스필버그 감독의 ‘E.T.’는 존 윌리엄스의 음악이 영화 전체를 지배하고 다스리는 현상을 다시 한 번 보여주었다. 지구의 아이들과 외계인의 우정을 그린 판타지 동화에서 기대할 수 있는 아름답고 순수한 상상력은, 역설적으로 존 윌리엄스가 매겨놓은 감성에 의해 조율되고 있었다. 존 윌리엄스는 자신의 주특기인 관악과 현악의 수려한 앙상블, 묘사적인 멜로디와 리드미컬한 악곡으로 영상의 움직임과 감정의 완급을 극적으로 그려냈다.


▲ 2010년 ‘스타워즈 콘서트’의 한 장면ⓒLucasfilm Ltd.

‘스타워즈’ ‘인디아나 존스’ ‘슈퍼맨’ ‘E.T.’ 같은 블록버스터·액션·판타지에서만 존 윌리엄스의 세밀한 작곡이 빛을 낸 것은 아니었다. 스필버그의 1987년작 ‘태양의 제국’에서는 웨일스의 민요 ‘시오 간(Suo Gan)’과 소년합창단이 노래한 ‘환호하라, 유스티(Exsultate Justi)’를 통해 전쟁의 폭력과 순수한 동심을 대비시키고, 현악 앙상블에 의한 ‘창공의 캐딜락(Cadillac of the Skies)’으로 자연의 아름다움과 전쟁의 위험을 대치시킨 것은 존 윌리엄스의 새로운 면모였다.

1970년대 중반 이후 연이어 성공을 거두면서 미국적 가치를 음악적으로 가장 잘 표현하는 작곡가로 공인받은 존 윌리엄스는 1984년 LA 올림픽의 주제곡을 시작으로 서울 올림픽(1988), 애틀랜타 올림픽(1996), 솔트레이크 동계 올림픽(2002)의 주제곡까지 통산 네 번의 올림픽 주제곡을 작곡함으로써 음악가로는 최초로 올림픽훈장을 수여받았다. 더불어 아서 피들러에 이어 1980년부터 1993년까지 13년간 보스턴 팝스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로 재직하며 클래식 음악과 팝 음악의 간극을 허무는 데에도 크게 기여했다.

1990년대 이후부터 현재까지 83세의 현역 작곡가로서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는 존 윌리엄스의 후기 작품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호에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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