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를 담을 새 그릇. 연출가로서 작품에 담아온 그의 생각이 이제, 오페라 행정이라는 그릇에 담긴다
오페라를 담을 새 그릇
연출가로서 작품에 담아온 그의 생각이 이제, 오페라 행정이라는 그릇에 담긴다
지난 2015년 봄,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로 사무실을 이전한 예술의전당 6개 상주 단체들. 그 가운데 한 계절이 지나도록 비어 있던 국립오페라단 단장실은 여름이 되어서야 주인을 찾을 수 있었다.
2015년 2월, 한예진 전 단장이 취임 53일 만에 물러난 후 약 4개월 만에 선임된 김학민은 같은 여름, 연출을 맡은 서울시오페라단 ‘오르페오’ 공연을 마친 뒤에야 본격적으로 국립오페라단 업무에 착수할 수 있었다.
“음악이 좋고, 드라마가 좋다”고 말하는 김학민 단장의 이력을 살펴보면 다양한 형태와 방법으로 ‘음악’과 ‘텍스트’가 중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엔 그를 좋아하고, ‘김학민’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의 책을 읽는 대중, 그의 강의를 듣는 학생, 그의 공연을 보는 관객까지… 그래서일까, 새해 국립오페라단의 비전을 ‘모두를 위한 오페라’로 내건 김학민 단장의 비전은 선명했고 의지는 단단했다.
‘오페라 읽어주는’ 김학민의 이야기
국립오페라단 예술감독직을 맡고 반년 정도 시간이 지났습니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 저는 연출가로 현장에서 움직였습니다. 더불어 아마 많은 사람에겐 제가 쓴 책 ‘오페라 읽어주는 남자’가 기억에 남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저는 음악이 좋고, 드라마가 좋습니다. 영문학도였던 대학생 시절엔 연극반 배우로 활동했고, 이후 음대 대학원에 진학해 음악 이론을 배우며 평론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음악과의 접점을 좇아 미학·역사·지리를 공부했고, 언젠가는 성악가가 되려는 마음에 성악 공부를, 또 작곡을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연출가로 오페라뿐 아니라 뮤지컬까지 다양한 작품을 올렸습니다. 하나로 꿰기 어려운 각각 다른 영역에 몸담아왔지만, 이제와 돌이켜보면 예술감독으로서 지금의 일을 수행하는 데 하나도 헛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더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오늘을 위해 그런 일들이 있었나 싶습니다.
국립오페라단은 단순한 행정과 예술을 동시에 가져가야 하는 자리입니다. 물론 이 두 가지를 잘하기란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지난날의 다양한 경험을 살려 ‘오페라’를 제대로 ‘설계’해보고 싶은 마음입니다. 여기엔 현역 연출가로서 경험과 관점이 많이 녹아들겠지요.
모두를 위한 오페라는 무엇인가?
앞으로 국립오페라단이 세계 오페라 무대와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 시즌 레퍼토리 시스템을 확립하고 중·장기 계획을 수립하는 데 힘을 쏟고 있습니다. 세계 오페라의 시계는 이미 5년가량 앞서가고 있습니다. 회계연도에 맞춰 1~2년 단위로 공연을 계획하고 올리는 우리로선 너무나 큰 간극을 종종 느낍니다. 그럼에도 현 상황에 필요하고, 우리에게 맞는 시즌제를 도입해 세계 무대에서 활동하는 우수한 예술가들을 국내로 부르고 해외 극장과의 협업을 높여갈 것입니다.
현재 독일어권에서는 실험성, 독창성 등이 돋보이는 연출가 중심의 오페라, 미국이나 이탈리아 등지에서는 성악가 위주의 오페라가 각광받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노래’를 중시하는 무대가 상당수지만, 좀 더 시간이 지나 연출까지 중요한 무대에 관객의 공감대가 형성되리라 생각합니다. 이것을 성악가나 연출가를 위한 오페라보다 모든 사람을 위한 오페라라는 관점에서 생각해주시길 바랍니다.
여기에서 오페라에 대한 고정관념을 풀어내고, 장르에 대한 새로운 관객 태도를 이끌어내는 것이 제 역할이라 생각합니다. 새로운 해석의 오페라. 드라마와 음악이 유기적으로 공존하는 무대를 받아들이는 마음이 우리 청중에겐 이미 존재한다고 봅니다. 다만 잠재되어 있는 이 태도가 발현될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누군가는 “모두를 위한 오페라는 무엇이냐” 묻습니다. 먼저, 쉽고 재밌는 오페라를 말할 수 있겠지요. 여기서 ‘쉽고’ ‘재밌는’ 건 오페라 장르에 맞는 대중성을 전제로 합니다. 총체예술로서 오페라만이 지닌 특별한 취향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페라에 담긴 취향은 깊이, 심오함과 연결됩니다. 작품을 제대로 느끼고, 여기에서 비롯된 메시지를 생각하기 위해 필요하죠. 저는 이 영역에서 잠재된 청중의 취향을 믿습니다. 이것은 오랜 시간 오페라를 강의하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노래를 중시하는 성악가들과 소통하면서 더 많이 느낀 부분입니다. 똑같은 작품을 만들더라도 정말 아름다운 무대, 철저함과 심오함이 담긴 드라마를 만들면 오페라를 잘 모르는 사람도 작품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 김학민
1962년생. 서울대 음악대학원 이론과 석사, 텍사스주립대 오페라과 박사, 객석예술평론상 수상(1988), 경희대학교 예술디자인대학 연극영화학과 부교수, 오페라 ‘마술피리’ ‘나비부인’ ‘리골레토’ ‘아이다’ ‘오르페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미스사이공’ 연출 외
우리가 낯선 오페라를 하는 이유
드보르자크의 ‘루살카’, 비발디의 ‘오를란도 핀토 파초’, 푸치니의 ‘토스카’, 바그너의 ‘로엔그린’.
모두 내년에 국립오페라단이 새롭게 소개할 작품들입니다. 이제 레퍼토리로 정착한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 임준희의 ‘천생연분’, 구노의 ‘로미오와 줄리엣’과 다르게 제목에서 생소함이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새 예술감독이 왔으니 특이한 작품만 하겠다는 생각은 절대 아닙니다. 시즌 레퍼토리를 균형 잡힌 식단처럼 설계해, 영양식 같은 오페라를 관객에게 제공하자는 생각입니다. 동시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숨은 보석 같은 작품을 찾아내 많은 분과 함께 울고 웃으며 공감하고픈 마음입니다. 2016년 봄에 오르는 ‘루살카’는 우리에겐 낯선 체코의 오페라입니다. 하지만 ‘신세계 교향곡’으로 유명한 드보르자크의 작품인 만큼 음악이 힘이 정말 각별하고 특별하죠. 여기에 인어공주 이야기의 기초가 되는 물의 요정 신화를 다룬 만큼 한국 초연임에도 세대와 성별을 뛰어넘어 다양한 관객이 좋아할 법한 내용이 가득합니다.
비발디는 ‘사계’로 우리에게 아주 친숙한 작곡가이지만, 그의 오페라 ‘오를란도 핀토 파초’는 한국은 물론 해외에서 악보조차 구하기 어려운 작품이죠. 국립오페라단 바로크 오페라 시리즈의 하나로 한국 무대에 처음 올라갈 이 작품은 대본을 구하고 번역하는 것부터 아주 큰 작업입니다. 그럼에도 국립오페라단이기에 시도하고 선보여야 할 가치 있는 작품임을 헤아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미래의 오페라 생태계를 그리며
지금까지 국립오페라단이 올린 공연들은 해외 제작진을 중심으로 꾸려진 경우가 많았습니다. 덕분에 고품격 공연을 보장할 수 있었죠. 하지만 언제까지 매일 수입만 할 순 없는 일입니다. 순수 국내 창작진 프로덕션도 있어야 하고, 국내외 인사들이 잘 버무려진 프로덕션도 필요합니다. 물론 쉽지 않습니다.
특히 세 번째의 경우라면 좋은 조합을 구성하는 게 전부는 아니죠. 끊임없이 공유하고 조정하고 중재하는 것은 예술감독의 몫입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국립오페라단이 만든 자랑스러운 프로덕션이 탄생할 것입니다. 또 이러한 협업 가운데 우리 스태프의 역량이 날로 높아지다 보면 순수 국내 창작진만으로도 좋은 작품이 완성될 겁니다. 물론 시간이 걸리겠지요. 하지만 이미 다른 전문 분야에서는 이러한 방법을 활성화하여 증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더불어 다음 세대로 이어질 우리 오페라 생태계를 내다보면서, 재능 있는 성악가라면 누구나 국립오페라단 무대에 설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 계획입니다. 이미 해외에서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고 있는 성악가는 물론, 떠오르는 신진을 적극적으로 발굴하기 위한 오디션을 정례화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국내 오페라 프로덕션이 자생력을 갖기 위해선 연출·지휘·안무·의상·무대 등 오페라 제작을 책임질 수 있는 제작진 발굴과 육성이 중요합니다. 이를 위한 시선을 오페라계뿐 아니라 영화·패션·건축 등 다양한 분야로 넓혀 다양한 기회를 열어둘 생각입니다.
이외에 서울 중심의 공연에서 벗어나 지역공연장으로 공연의 범위를 확대하고, 특히 지역 극장에서 쉽게 접하기 힘든 전막 오페라를 선보이게 됩니다. 현재 국립오페라단이 운영 중인 소규모 오페라 무대는 민간오페라단 위탁운영으로 대체하여 국립과 민간의 협력 및 상생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앞으로 새롭게 올려지는 시즌 공연 중에 대표성을 띌 수 있는 작품 몇몇을 정해 영상물로 제작하고, 국내 뿐 아니라 해외 시장에 유튜브 같은 미디어를 통해 유통할 계획입니다.
향후 3년간 저와 국립오페라단이 함께 내세우는 운영 비전은 ‘포용’입니다. ‘모두를 위한 오페라’라는 기치를 내걸고 거듭나고자 합니다. 대중화는 전문화의 대척점에 있지 않습니다. 전문적인 지식을 대중에게 가장 친절하게, 핵심을 잘 전달하는 데 대중화의 의미가 있고, 국립오페라단의 역할이 있다고 봅니다. 가장 예술적인 완성도가 있는 오페라를, 모든 국민이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열고 싶습니다.
사진 필주(Purple Stud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