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밴드를 감당할 수 없었던 작은 음반사들은 소규모 밴드 녹음으로 눈을 돌렸다
재즈는 시작부터 음반산업의 변두리에 있었다. 단지 음반 판매량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재즈는 미국 사회에서 소수인종을 중심으로 생성된 음악이었으며 문화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래서 메이저 음반사들은 ‘레이스 레코드’라는 별도의 상표를 붙여 재즈를 녹음했고, 그런 상표가 필요 없던 곳은 제넷과 같이 재즈를 전문적으로 녹음하는 소규모 레이블들이었다. 한마디로 재즈는 늘 독립 음반사들의 몫이었다.
1920년대 여기저기서 등장했던 음반사들이 대공황 이후 파산하여 메이저 음반사들로 인수 합병된 뒤, 10년 가까이 지난 1930년대 중반 이후부터 서서히 불기 시작한 스윙의 열풍은 소규모 독립 음반사들이 재등장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1938년 밀트 개블러는 뉴욕에서 운영하던 레코드 매장 코모도어 뮤직숍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와 코모도어 레코드를 설립해 시카고 재즈와 스윙 연주자들의 소편성 연주를 녹음하기 시작했다. 이듬해 독일에서 온 청년 알프레드 라이언은 프로듀서 존 해먼드가 기획한 카네기홀 음악회 ‘영가에서 스윙까지’를 관람하고, 그 무대에 섰던 피아니스트 알버트 애먼스와 미드 럭스 루이스, 그리고 색소폰 주자 시드니 베쳇의 연주에 도취되어 그들의 연주를 녹음하기 위해 음반사 블루노트를 설립했다. 한편 데이비드 스튜어트는 당시의 스윙 음악을 ‘가짜 재즈’라고 규정하고 트래디셔널 재즈의 복원을 외치며 1941년 할리우드에 재즈 맨 레코드를 설립했다.
재즈 독립 음반사들의 중흥은 음악인들이 인세 지불을 요구하며 파업에 돌입한 1942년부터 더욱 본격화되었다. 이때부터 이미 미국 음반업계는 새로운 판이 짜여지고 있었다. 작사가 조니 머서는 메이저 음반사 출신의 두 경영자 글렌 월리치, 버디 드실바와 손잡고 음악인들과 인세 지불에 합의한 뒤 LA를 근거지로 캐피틀 레코드를 설립했다. 1943년 그들이 제작한 냇 킹 콜의 음반들은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그 결과 뉴욕을 근거지로 미국 시장을 점령했던 컬럼비아(CBS), 빅터(RCA), 데카의 3강 체제는 캐피틀이 가세한 4강 체제로 재편되었다.
그 재편기에 소규모 재즈 음반사들도 연이어 등장했다. 음반이 많이 팔리진 않았지만 그들은 연주자들에게 인세를 지불했다. 상업적인 댄스 음악을 주로 요구하던 메이저 음반사들과는 달리, 열렬한 재즈 팬이었던 소규모 음반사 제작자들은 재즈 연주자들의 음악을 깊이 존중하며 녹음했다. 허먼 루빈스키의 사보이(1942년), 레스 슈리버 시니어의 블랙 앤드 화이트(1943년), 윌리엄 러셀의 아메리칸 뮤직, 해리 림의 키노트(이상 1944년), 메스너 형제들의 필로(1945년, 이후 알라딘으로 개명)가 연이어 문을 열었고 파업과 전쟁이 끝난 뒤에도 메즈 메즈로의 킹 재즈(1945년), 노먼 그랜츠의 클레프(1946년, 이후 버브로 개명) 등은 재즈 음반사들의 등장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당시 가장 인기 있었던 빅밴드 녹음은 메이저 레코드사의 전유물이었다. 일단 빅밴드는 그 인원수에서 독립 음반사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많은 비용이 들었다. 1937년 데카 레코드와 계약을 맺은 카운트 베이시 오케스트라를 탐내던 밀트 개블러는, 그래서 한 가지 묘수를 찾아냈다. 데카와 독점 계약이 되어 있는 카운트 베이시를 빼는 대신 다른 핵심 멤버들을 추려 5~6중주의 소규모 녹음을 남기는 것이었다. 1938년 코모도어 녹음에서 레스터 영(대통령이라는 뜻을 담은 ‘프레즈’라는 애칭도 갖고 있다)의 여리고도 느긋한 사운드는 빅밴드 편성 때보다 더욱 선명하게 자신의 매력을 드러낼 수 있었다.
1940년 카운트 베이시 오케스트라를 탈퇴하고 자신의 소규모 밴드로 녹음을 남겼던 레스터 영의 행보는 당시 의욕적으로 출발한 신생 재즈 독립 음반사들을 놓고 펼친 일종의 오디세이였다. 1942년 LA를 방문한 레스터 영은 필로 레코드와 함께 메이저 음반사로서는 꿈도 꾸지 못하던 트리오 편성의 녹음을 남겼는데, 당시 피아니스트는 일 년 뒤 슈퍼스타로 등극하게 되는 냇 킹 콜이었다.
1943년 신생 키노트 레코드에서 자신의 콰르텟으로 또 한 편의 걸작을 만들어낸 레스터 영은 다시 카운트 베이시 오케스트라에 가입한 후, 이듬해에 키노트·코모도어·사보이에서 카운트 베이시 오케스트라 동료들을 중심으로 5~7중주를 남기고선 제2차 세계대전에 징집되었다.
제대 후 다시 LA를 중심으로 활동한 레스터 영은 물론 알라딘 레코드에서도 녹음을 가졌지만, 1942년 이 레이블과의 첫 녹음에서 제작을 맡았던 노먼 그랜츠가 직접 조직한 ‘재즈 앳 더 필하모닉’ 음악회, 그리고 그의 레이블인 클레프 레코드와 여생의 동반자가 되었다. 1940년대 독립 음반사들은 레스터 영의 연주를 진정한 예술품으로 대했으며, 그 점은 재즈의 발전 방향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이제 더 이상 재즈는 술과 춤을 위한 실용음악이 아니었으며, 그 점은 그 누구보다도 먼저 소규모 독립 음반사들의 눈과 귀를 통해 발견되고 또 증명되었다.
이달의 추천 재즈음반
Aladdin-Blue Note/CDP 7243 8 32787 2 5|1942년 7월·1945년 12월 녹음 외|
레스터 영(테너 색소폰)/냇 킹 콜(피아노)/레드 캘린더(베이스)/빅 디킨슨(트롬본)/도도 마마로사(피아노)/레드 캘린더(베이스)/헨리 터커(드럼) 외”>
▲ 레스터 영 ‘The Complete Aladdin Recordings’
Aladdin-Blue Note/CDP 7243 8 32787 2 5|1942년 7월·1945년 12월 녹음 외|
레스터 영(테너 색소폰)/냇 킹 콜(피아노)/레드 캘린더(베이스)/빅 디킨슨(트롬본)/도도 마마로사(피아노)/레드 캘린더(베이스)/헨리 터커(드럼) 외
Aladdin-Blue Note/CDP 7243 8 32787 2 5|1942년 7월·1945년 12월 녹음 외|
레스터 영(테너 색소폰)/냇 킹 콜(피아노)/레드 캘린더(베이스)/빅 디킨슨(트롬본)/도도 마마로사(피아노)/레드 캘린더(베이스)/헨리 터커(드럼) 외”>
▲ 레스터 영 ‘The Complete Aladdin Recordings’
Aladdin-Blue Note/CDP 7243 8 32787 2 5|1942년 7월·1945년 12월 녹음 외|
레스터 영(테너 색소폰)/냇 킹 콜(피아노)/레드 캘린더(베이스)/빅 디킨슨(트롬본)/도도 마마로사(피아노)/레드 캘린더(베이스)/헨리 터커(드럼) 외
Keynote-Mercury/PHCE-10035|1943년 12월·1944년 3월 녹음|
레스터 영(테너 색소폰)/조니 과르니에리(피아노)/슬램 스튜어트(베이스)/시드 캐틀렛(드럼)/카운트 베이시(피아노)/프레디 그린(리듬 기타)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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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스터 영 콰르텟·캔자스시티 세븐 ‘The Complete Lester Young’
Keynote-Mercury/PHCE-10035|1943년 12월·1944년 3월 녹음|
레스터 영(테너 색소폰)/조니 과르니에리(피아노)/슬램 스튜어트(베이스)/시드 캐틀렛(드럼)/카운트 베이시(피아노)/프레디 그린(리듬 기타) 외
Savoy/SV-0112|1944년 4~5월 녹음|
레스터 영(테너 색소폰)/빌리 버터필드(트럼펫)/행크 다미코(클라리넷)/조니 과르니에리(피아노)/덱스터 홀(기타)/빌리 테일러(베이스)/코지 콜(드럼)/카운트 베이시(피아노)/프레디 그린(기타)/섀도 윌슨(드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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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스터 영 ‘The Immortal Lester Young’
Savoy/SV-0112|1944년 4~5월 녹음|
레스터 영(테너 색소폰)/빌리 버터필드(트럼펫)/행크 다미코(클라리넷)/조니 과르니에리(피아노)/덱스터 홀(기타)/빌리 테일러(베이스)/코지 콜(드럼)/카운트 베이시(피아노)/프레디 그린(기타)/섀도 윌슨(드럼)
Verve/314 521 650-2|1946년 3~4월 녹음|
레스터 영(테너 색소폰)/냇 킹 콜(피아노)/버디 리치(드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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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스터 영 트리오 ‘Lester Young Trio’
Verve/314 521 650-2|1946년 3~4월 녹음|
레스터 영(테너 색소폰)/냇 킹 콜(피아노)/버디 리치(드럼)
글 황덕호
KBS 1FM ‘재즈 수첩’을 17년 동안 진행하고 있다. ‘평론가’보다는 ‘애호가’가 되기 위해 오늘도 쓰고, 듣고, 틀고, 강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