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의 극시, 바그너의 오페라, 우디 앨런의 영화에 담긴 아프로디테의 이야기
보티첼리의 ‘베누스(아프로디테의 로마식 이름)의 탄생’은 서양미술사에 있어 빛나는 걸작 중 하나다. 보티첼리 이전의 중세 회화는 성화(聖畵)가 대부분을 차지했고, 그가 살던 때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보티첼리는 아름다운 여인이 벌거벗은 채 커다란 조개껍데기에 실려온 모습을 그림에 담았다. 헤시오도스의 ‘신통기’에 따르면 부친 우라노스에 반기를 든 크로노스(제우스의 부친)가 우라노스의 생식기를 잘랐고, 그것이 바다에 떨어져 생성된 거품 속에서 아프로디테가 태어났다. 그 이름도 거품을 뜻하는 ‘아프로스(Aphros)’에서 비롯된 것이다. 보티첼리는 바로 이 내용을 바탕으로 불후의 명작을 그려냈다.
성모 마리아에 익숙한 당시 사람들이 ‘베누스의 탄생’에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을지는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물론 보티첼리 이전에 선구자격 화가들이 있었을 테지만, ‘베누스의 탄생’이 미술사에 있어 미학적 인식을 단숨에 뒤집어버린 계기가 되었음에 틀림없다. 영어식으로는 비너스라고 읽는 로마신화의 베누스는, 바로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아름다움의 여신 아프로디테다. 그러나 아프로디테는 사실 우아함, 내면의 아름다움과 같은 미녀의 기준과는 다소 거리가 먼 여신이다.
아프로디테는 본래 샘 족의 전지전능한 여신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리스신화에 편입되면서 미의 여신, 즉 사랑의 여신으로 범위가 축소됐다. 한때는 쾌락의 여신이라 불리면서 신성해야 할 아프로디테의 성전이 창녀들의 장소로 전락하기도 했다. 이렇게나 추락한 권위는 로마로 넘어오고 나서야 회복된다. 로마의 건국 영웅인 아이네이아스의 모친이 아프로디테였기에 로마의 수호 여신으로 추앙되면서였다. 그러나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후에는 ‘아프로디테 포르네’라 불리면서 다시금 조롱의 대상이 된다. 음란, 외설을 뜻하는 단어 포르네(Porne)와 함께 불리며 아프로디테는 최음, 성욕 과다 등을 뜻하는 단어들의 어원이 되었다. 이처럼 아프로디테는 험난한 과정을 거치며 단순한 미의 여신이 아닌 복합적인 속성을 지닌 여신으로서 신화의 한편에 자리 잡았다.
‘여성 제우스’라 불린 여신
제우스가 최고의 여성 편력가라면 아프로디테는 단연 남성 편력의 일인자라 할 수 있다. 워낙 많은 염문을 뿌리고 다닌 탓에 ‘여성 제우스’라고 불릴 정도다. 아프로디테는 헤라의 경계심 때문에 올림포스 12신 가운데 가장 못생긴 데다 절름발이인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와 결혼해야 했다. 때문에 언제나 사랑의 대상은 남편이 아닌 셀 수 없이 많은 애인들이었다. 전쟁의 신 아레스 또한 그녀의 애인 중 하나였다. 지성적인 매력은 없지만 힘세고 잘생긴 아레스는 걸핏하면 아프로디테와 사랑을 나누다가 태양신 헬리오스의 밀고로 헤파이스토스에게 발각되어 망신을 당했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 술의 신 디오니소스, 전령의 신 헤르메스 또한 아프로디테와 스캔들을 일으킨 바 있다. 아프로디테의 아들로 묘사되는 에로스의 경우도 그 부친에 대한 설은 분분하지만 확실히 단정 짓기 어렵다. 아프로디테와 관계한 남신이 워낙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프로디테의 남성 편력 중 눈길을 끄는 부분은 바로 인간 남성과의 사랑이다. 미소년 아도니스, 양치기 앙키세스와의 이야기는 아프로디테가 인간과 사랑한 일화 중 잘 알려져 있다. 아프로디테는 아도니스가 젖먹이이던 시절부터 일찌감치 그를 점찍고 하데스의 아내 페르세포네에게 양육을 맡겼다. 그러다 이 미소년을 두고 페르세포네와 갈등을 겪기도 한다. 아름답게 성장한 아도니스는 사냥이 취미였는데, 여신들의 사랑을 독차지한 그를 질투한 아레스가 고의로 사고를 일으켜 멧돼지에게 들이받혀 죽고 만다. 그 피에서 아네모네 꽃이 피어났다고 한다.
트로이의 왕족이자 이다 산의 목동이었던 앙키세스도 잘생긴 것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그 이름을 모를 리 없는 아프로디테는 인간 공주로 신분을 속이고 앙키세스와 동침했다. 뒤늦게 자신의 실체를 밝힌 아프로디테는 절대로 발설하지 말 것을 요구하지만, 술김에 여신과 동침한 사실을 떠벌린 앙키세스는 그 벌로 두 눈이 멀어 앞을 볼 수 없게 된다. 이때 아프로디테가 낳은 앙키세스의 아들이 로마 건국의 영웅이 되는 아이네이아스다.
셰익스피어는 아도니스 신화를 바탕으로 ‘비너스와 아도니스’를 썼다. 셰익스피어의 초기작이며 연극이 아닌 줄거리가 있는 극시인데, 영국 작곡가 존 블로가 이 작품을 바탕으로 ‘비너스와 아도니스’를 작곡했다. 영국 최고의 작곡가 헨리 퍼셀의 스승이기도한 블로가 만든 ‘비너스와 아도니스’는 정통 오페라의 형식보다는 영국식 가면극이며, 줄거리는 신화뿐 아니라 셰익스피어의 극시와도 다른 부분이 많다.
비너스는 아도니스를 사랑하지만 상대는 사랑을 알기에는 아직 미숙한 소년이다. 비너스는 아도니스더러 사냥을 가라고 부추긴다. 하지만 아도니스가 막상 떠나자 잔뜩 염려되어 그를 기다린다. 얼마 후 아도니스는 사냥에서 돌아오지만, 멧돼지에게 공격을 당한 터라 비너스의 품에서 숨을 거두고 만다.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아도니스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고대하는 비너스의 노래다. 근심에 찬 목소리와 저음 사이의 불협화음은 이들 사이에 닥쳐올 불운을 암시한다. 아도니스가 죽은 후 마지막 합창에 담긴 깊은 감정의 굴곡은 분명 제자 퍼셀의 작곡법에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영화에 투영된 아프로디테의 면모
아프로디테와 관련된 영화도 한 편 소개한다. 우디 앨런 영화 ‘마이티 아프로디테’(1995)는 현대 뉴욕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아프로디테의 속성을 유머러스하게 다룬 작품이다. 주인공은 포르노 배우이자 창녀인데, 아름답지만 남자관계가 난잡한 아프로디테의 면모가 투사되어 있다.
뉴욕의 잘나가는 스포츠 기자 레니는 아이를 갖고 싶어 한다. 그러나 큐레이터인 아내 어맨다는 자기 화랑을 가질 생각에 빠져 임신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대신 입양을 하고자 한다. 레니는 떨떠름해하면서도 입양에 동의한다. 그런데 입양한 아이가 범상치 않다. 아무래도 천재가 아닐까 싶은 것이다. 그 생모가 궁금해진 레니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미혼모인 친모 린다의 존재를 알아내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린다는 본명이 아니고, 알고 보니 포르노 배우에 매춘을 하는 여자다. 레니는 용감하게 린다를 찾아가지만 그녀는 그를 단지 수줍음 많은 고객으로 인식할 뿐이다. 레니는 린다의 인생을 바꾸려 한다. 미용사 일을 권하고, 조폭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며 성실한 농부의 삶을 원하는 남자도 소개해준다. 그러던 중 아내의 외도 사실을 알게 되고, 이에 상심한 레니는 졸지에 린다와 하룻밤을 지내고 만다.
우디 앨런은 그리스 비극의 형식을 특유의 코미디 스타일로 재해석했다. 코러스가 등장해 영화의 진행을 제시하고, 해설 역할을 하며 영화 속 캐릭터와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그리스 비극의 오이디푸스, 카산드라 등 신화 속 인물들도 등장한다. 점증하던 갈등은 하늘에서 전지전능한 신이 내려와 모든 것을 해결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의 이야기를 위트 있게 반영한 방식으로 해소된다.
‘탄호이저’에 등장한 여신의 양면성
사실 아프로디테를 그리스신화의 체계 위에서 생각해보면 조금 애매한 면이 없지 않아 있다. 올림포스 12신을 보자. 4명은 제우스와 그 남매, 7명은 제우스가 낳은 자식들이다. 그렇다면 아프로디테도 제우스와 혈연 관계여야 전체적인 맥락에 맞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아프로디테가 제우스와 여신 디오네의 딸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평범하기는 하지만 이편이 더 적절한 설명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절 ‘아프로디테 포르네’라 불리며 음란한 사랑의 여신이라고 모욕당하던 아프로디테의 권위는 다시금 미의 여신으로 부활했지만, 애욕의 상징으로 보는 인식은 뿌리 깊게 박혀 사라지지 않았다. 음악에서 이런 사실을 드러낸 예가 바로 바그너의 오페라 ‘탄호이저’(1845)다. 그 유명한 서곡이 연주되고 막이 열리면 무대배경은 베누스의 동굴이다. 탄호이저는 베누스의 무릎에 누워 있다. 밤낮없이 주지육림에 빠져 지낸 지 얼마이던가. 바다 요정의 합창이 울려 퍼지고, 한껏 고조된 베누스 동굴의 음악이 들려온다.
그러나 오랜 향락에 권태를 느낀 탄호이저는 오히려 지상세계를 동경한다. 순결하고 신앙심 깊은 옛 연인 엘리자베트가 그리워진 것일까. 베누스는 그런 탄호이저 곁에서 쾌락을 나누자며 계속해서 그를 유혹한다. 탄호이저가 갖은 유혹에도 반응을 보이지 않자 베누스는 환락의 세상을 알게 된 이상 떠나더라도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다고 경고한다. 이에 탄호이저는 ‘나의 구원은 마리아!’라고 소리치고 그 순간 베누스의 세계는 사라져버린다. 탄호이저는 다시 지상세계로 돌아가 엘리자베트와 해후한다. 그러나 그녀와 결혼할 수 있는 중요한 노래 경연에서 다른 참가자가 지고지순한 사랑을 찬양하자, 자신도 모르게 육감적인 사랑에 대해 노래하며 베누스를 찬미하고 만다.
바그너는 프랑스 파리에서 공연하기 위해 1861년 수정한 개정판에서 서곡 다음으로 화려한 발레 장면을 추가했다. 베누스의 동굴을 그야말로 치열한 환락의 장소로 묘사한 장면이다. 오늘날 발레 장면은 생략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순결하기만 한 사랑에 만족할 수 없었던 탄호이저의 방황을 그럴싸하게 뒷받침하는 부분이다.
프로덕션에 따라 베누스와 엘리자베트라는 전혀 상반된 여주인공을 한 성악가가 부르도록 하는 경우가 있다. 음악적으로는 모험이지만, 순결함과 에로틱한 면모는 여성이 지닌 본질적이 양면성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프로디테는 늘 비난받고 조롱받는 듯 보여도 매번 용서받는다. 바람둥이에 심각한 남성 편력을 지녔지만 ‘파리스의 심판’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신으로 선택되는 데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