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치열하게 2018년을 달려온 연극계가 새로운 한 해를 준비하기 위해 잠시 숨고르기에 접어들었다. ‘지금도 가슴 설렌다’(이혜빈 작, 손기호 연출, 2018년 12월 11일~2019년 1월 13일 선돌극장), ‘사건발생 일구팔공’(김한길 작, 김진욱 연출, 1월 4일~2월 10일 후암스테이지 1관)은 연말연초라는 시기가 가족을 돌아보기에 적합한 때라고 주장이라도 하는 듯이 모두 가족 이야기를 펼쳤다. ‘지금도 가슴 설렌다’는 부모 세대가 사라지는 모습을 담담하게 그려냈다면 ‘사건발생 일구팔공’은 가족이기에 주고받는 상처를 아프게 드러냈다. 두 작품이 서로 다른 가족을 형상화하고 있음에도 눈에 띄게 겹쳐지는 것은 엄마였다. 두 가족의 공간, 시간이 서로 다른데도 어쩌면 엄마들은 저렇게 비슷할까? 우리들은 왜 저렇게 비슷한 엄마를 가지고 있을까? 우리 엄마들은 왜 저렇게 닮은꼴로 그려져야만 할까? 아무리 가족 이야기가 가장 원형적이고 각각 살아가는 모습이 비슷하다고 전제하더라도 어디선가 본 듯 지나치게 익숙하고 상투적인 엄마에게 불만이 생겼다. 모성에 대해, 엄마에 대해 이제는 다른 시각이 필요하다. 엄마도 바꿔야 할 때가 왔다.
가족의 중심이지만 자타공인 주변인
두 편의 작품에서 엄마들은 실질적 가장 역할을 한다. ‘지금도 가슴 설렌다’의 할머니 순자는 남편이 집 밖으로 돌던 젊은 시절부터 혼자서 삼형제를 키우며 생계를 꾸려왔다. 장성한 자식들을 분가시키고, 나이 들어 몸이 불편해서야 집에 돌아온 남편을 거두며 살았다. 평생 실질적 가장이자 집안의 중심 역할을 해온 것이다. 그런 순자가 설날 가족들이 모였을 때 집을 팔 것이니 아버지는 요양병원으로 보내라고 말한다. 얼마 되지 않는 재산에, 아버지에 대한 인륜적 예의에 자식들의 목청이 높아지지만 순자는 그것을 바라만 본다. 왜 집을 파는지, 왜 아버지를 병원으로 보내려는지 조곤조곤 물어보는 자식들이 없다. 그저 엄마에게 따지고 소리치는 자식들이 있고, 그 악다구니를 눈물 흘리며 아프게 바라보는 엄마만 있을 뿐이다.
‘사건발생 일구팔공’의 엄마 정자는 춘구 아버지인 첫 남편과 사별하고 딸 셋을 둔 사람과 재혼을 했지만 그 남편마저 일찍 죽어 혼자서 생선장사로 자식 넷을 건사하는 가장이 되었다. 생활인, 가장으로서의 정자는 억척스러울지 모르겠으나 자식들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진다. 내 자식이 아니기에 더 조심스럽고 마음 쓰였던 세 딸, 누나들 사이에서 티 나게 아껴주지 못한 아들이었기에 정자에게 자식들은 그저 미안하고 안쓰러운 존재들이었다. 그렇기에 밖에서는 건실한 가장이지만 집안에서는 자식들 목소리에 한없이 작아지는 엄마였던 것이다.
이렇듯 두 엄마는 실질적인 가장이고 가족의 중심이지만 스스로 자식들에게 자리를 내어주었다. 양보와 인내, 희생이 일상이 된 엄마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잃었고 자신의 꿈을 지웠으며 자신의 미래도 놓아 버렸다. 순자가 집을 팔게 된 이유는 순자의 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순자의 장례를 치른 후 자식들의 목소리로 말해준다. 소리 지르는 자식들 앞에서 눈물만 흘리던 순자는 더 이상 말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자식들은 순자에게 의논하고 요구할 수 있었지만 순자는 얼마 남지 않은 삶도 스스로 감당해야 했다.
자식 앞에서 큰소리 한 번 내지 못한 정자도 순자와 오십보백보이지만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정자 엄마의 영혼(순래)이 그 주위를 맴돌며 정자의 말을 들어준다는 점이다. 비록 실체가 없더라도 말할 상대가 있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현실 속 숨 쉴 여지이기에 의미가 있다. ‘지금도 가슴 설렌다’가 순자의 죽음이 포함되어 있음에도 정서적으로 담담했지만 ‘사건발생 일구팔공’에 수많은 극한 감정들이 출렁였던 것은 엄마의 목소리가 직접적인가 혹은 감추어졌는가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순자든 정자든, 가족들을 건사한 억척이지만 자식 앞에서는 주변인을 자처한 엄마는 이렇게 비슷하고 이렇게 익숙하다.
다양한 엄마로 바꿔야 하는 이유
순자와 정자, 작품 속 엄마들의 삶은 현실 속 엄마들과는 실제로 닮지 않았다. 글을 모르는 엄마도 거의 없으며, 자식들에게 무턱대고 미안해하는 엄마도 별로 없다. 그럼에도 이 엄마들이 자신의 엄마처럼 보이는 것은 무조건 자신보다 자식이 일순위인 엄마들의 태도 때문이다. 자식을 아끼는 마음이 전제되었기에 세상 모든 자식들은 ‘엄마’라는 단어에 묘한 죄책감과 연민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눈을 돌려보면 희생과 인내의 대명사인 익숙한 엄마들과는 다른 엄마들이 보인다. 태극기를 들고 집회에 나가기도 하고 자신의 설계대로 자식을 끼워 맞추며 가학과 폭력을 행사하는 등 스스로의 욕망에 적극적인 엄마들이다. 가히 신드롬이라 할 만큼 현재 화제가 되고 있는 TV드라마 ‘SKY 캐슬’만 보아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식과 대학입시에 맹목적인 엄마들이 넘쳐난다. 전통적이고 상투적인 희생과 양보, 인내로 주변인이 된 엄마가 아니라 21세기형 희생과 양보, 인내로 중심에 선 엄마들이다. 드라마가 형상화한 상황과 성격들이 극단적이긴 하지만 현실에서 마주하는 엄마들은 연극 속 순자와 정자보다 이 엄마들을 더 많이 닮았고, 그 현실반영이 적극적이기 때문에 이 드라마가 크게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연극 속 엄마도 바뀌어야 한다. 인고의 세월을 견뎌온 엄마들에게 감상적 연민만 품지 않도록, 눈물 한 번 흘리고는 잊어버리지 않도록 인간으로서 또한 여성으로서 엄마와 엄마의 욕망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현실 속 엄마들이 실제로 그러하니까.
그런 점에서 ‘지금도 가슴 설렌다’의 큰며느리 은희, ‘사건발생 일구팔공’의 막내딸 선희는 고무적이다. 은희는 딸 달리에게 말한다. “지금도 나는, 니를 보면 가슴이 설렌다.” 말랑말랑하고 따뜻하게 사랑을 표현하는 은희는 가족 관계 속에서도 적극적인 엄마이다. 시부모와 남편에게 무조건 복종하지도 않으며 같은 입장의 동서에게는 넓은 아량을 보이며, 거기에 자신의 일상에 조금이라도 불편한 상황이 생기면 해결하려고 나서는 엄마이다. 분명 세대가 달라졌고 상황이 달라졌음을 보여주는 가장 현실과 닮은 엄마가 은희이다. 선희는 임신 중인 예비엄마이지만 일상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는 엄마로서의 모습도 추측할 수 있게 한다. 가족들에게는 살갑지만 그곳을 벗어나기 위한 욕망을 실천하는 태도, 뱃속 아기를 지키려는 의지, 정신을 놓아버린 엄마를 신혼집에서 같이 모시고 살려는 모습은 무조건적인 희생만 앞세웠던 엄마들과는 분명 다른 지점에 놓여 있다.
엄마는, 그리로 아빠 역시 자식을 위해서라면 못할 것이 없고, 되지 못할 것이 없다. 그러나 그 방법과 양상은 개인에 따라, 시대에 따라 다르고 다양해질 수밖에 없다. 이런 다양한 엄마들이 무대 위에 많이 나타났으면 좋겠다. 그래야 엄마에 대한 이해, 나아가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글 배선애(연극평론가) 사진 극단 이루·극단 웃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