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박서정 기자 사진 아모레퍼시픽미술관
때로는 한 장의 사진이 세상을 바꾼다. 한 예로 네이팜탄 연기를 피해 달아나는 아이들의 사진(‘베트남-전쟁의 테러’, 1972)은 전 세계에 전쟁의 참상을 전했다. 진실을 마주한 사람들은 분노했고, 베트남전 종식은 앞당겨졌다. 이미지가 주는 힘을 적극 활용한 현대 미술 작가 바바라 크루거(Barbara Kruger, 1945)가 아모레퍼시픽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연다. 바바라 크루거는 잡지·신문·광고판·포스터 등 일상적인 이미지에 메시지가 담긴 텍스트를 더해, 보는 이에게 강렬한 시각 경험을 제공한다. 작품을 본 관객이 다양한 심상을 떠올리도록 모든 작품에 제목을 달지 않았다. 이번 전시에는 세계 최초로 공개되는 한글 설치 작품 2점을 비롯해 초기작인 페이스트업(Paste-up, 직접 오려 붙인 사진에 그림이나 글씨를 덧붙이는 작업) 16점 등이 전시된다. 지난 40여 년 간 당면한 사회 문제에 눈감지 않고 대담한 발언을 이어온 바바라 크루거는 예술의 의의를 사회적 담론을 촉발하는 데서 찾는다. 행동하는 예술가로서의 면모는 그의 작품 ‘무제(당신의 몸은 전쟁터다)’(1989)에서 잘 드러난다. 아름답게 메이크업한 여성의 얼굴 위, 빨간색 바탕에 흰 글씨로 ‘당신의 몸은 전쟁터다(Your body is a battleground)’라고 큼직하게 쓰여 있다. 이 작품은 작가가 1989년 미국에서 낙태를 찬성하는 여성들의 투쟁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만든 포스터다. 강렬한 빨간색은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 사용됐다. 자극적이고 간결한 텍스트는 이미지와 합해져 여성의 주체성에 대해 직관적으로 문제를 제기한다. 관객은 미술관을 들어서자마자 바바라 크루거의 세계로 걸어 들어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번 전시의 제목이기도 한 ‘무제(영원히)’(2017)는 가장 큰 전시실 내부를 가득 채우는 설치 작품이다. 천장을 제외한 벽면과 바닥이 모두 바바라 크루거의 텍스트 작업으로 둘러싸여 있다. 한쪽 벽에 그려진 돋보기가 비추고 있는 것은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자기만의 방’ 이다. 펼쳐진 페이지에는 ‘지난 수 세기 동안 여성은 남성의 모습을 원래보다 두 배로 확대해 비춰주는 마력을 가진 거울 같은 역할을 해왔다는 것을 당신을 알고 있다’는 문구가 쓰여있다. 바닥에는 조지 오웰의 ‘1984’ 중 일부를 인용한 텍스트가 가득하다. 관객은 거대한 문자 사이에서 사유의 세계를 유영한다. 바바라 크루거가 선보이는 첫 한글 작품은 그가 반복적으로 강조해온 문구를 한국어로 번역한 ‘무제(충분하면 만족하라)’(2019)이다. 한국뿐 아니라 소비주의에 매몰된 현대 사회에 대한 작가의 경고다. 한글을 조형적으로 활용한 이 작품은 높이가 6m에 달해 텍스트만으로도 압도되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미술관 한편에 마련된 아카이브룸에서는 바바라 크루거의 모습을 인터뷰 영상 등을 통해 만나볼 수 있다. 그녀는 잡지 디자이너로 이력을 시작하면서도 예술가라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 덕분에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독특한 작업으로 인정받게 된 이야기 또한 그녀의 작품처럼 흥미로웠다. 다만 대중과 작품으로 소통하려는 작가의 의도처럼 세심하게 전시를 기획했으면 어땠을까. 바바라 크루거의 메시지는 문화적 배경이 달라 이미지의 함의를 파악할 수 없고, 번역을 거쳐 영어 텍스트를 이해해야 하는 관객에게 직관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사진에 대한 간단한 설명과 해석이 함께 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바바라 크루거: 영원히’전 6월 27일~12월 29일 아모레퍼시픽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