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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을 듣다
‘암네시아: 더 다크 디센트’
극한의 공포에 내몰린 사람의 선택
게임을 듣다
01 슈퍼 마리오 오디세이 02 젤다의 전설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 03 호그와트 레거시 04 모여봐요 동물의 숲 05 암네시아: 더 다크 디센트
어느 컴컴하고 퀴퀴한 성, 주인공 ‘다니엘’은 흐릿하게 눈을 뜹니다. 여기가 어딘지, 내가 누군지, 왜 여기에 쓰러져 있는지 아무런 기억이 없습니다.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것은 자신에게 직접 쓴 한 장의 메모입니다. 메모에는 스스로 약을 먹고 기억을 잃게 됐다는 정황과 성 지하에 있는 ‘알렉산더’를 죽이라는 지시가 적혀있죠. 이 미스터리한 이야기의 끝은 무엇이고, 어떤 진실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오늘은 무더운 여름을 맞이하여 2010년에 출시된 스산한 공포게임, ‘암네시아: 더 다크 디센트’(이하 암네시아)와 그 음악에 대해 탐구합니다.
나약하고 평범한 플레이어
주인공 다니엘은 괴물들이 쫓아와도 체력이 부족해서 잡히기 십상이고, 여타 게임처럼 무기를 사용하여 그들을 공격할 수도 없습니다. 이 게임은 독특하게도 ‘정신력(sanity)’이라는 수치가 있는데, 다니엘은 괴물을 쳐다보기만 해도 절명에 이르고, 어두운 곳에 있으면 극심한 공포를 느끼며 정신력이 깎이기 시작합니다. 정신력이 일정 수준 이하가 되면 시야가 흐릿해지고 온갖 환청에 시달리게 되죠. 그런데 이렇게 나약한 주인공이 보이는 반응은 현실의 평범한 인간이 보이는 반응과 흡사합니다. 그렇기에 플레이어가 다니엘에게 더욱 몰입할 수 있는 것이죠.
이 게임이 무서운 또 다른 요소는 플레이어에게 명확한 지시를 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여기로 가세요’ ‘다음에는 이걸 하세요’ 등 어떠한 지침 없이 그저 성안을 정처 없이 헤매며 가끔 등장하는 괴물로부터 숨고 도망쳐야 합니다. 플레이어는 자신이 나약하고 평범한 인간인데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공포를 계속해서 감내해야 한다는 극한의 두려움을 느끼게 되죠.
실제와 동일한 소리로 빚은 공포
기존의 공포게임은 공포를 유발할 수 있는 효과음이나 음악적 표현을 고안해 왔습니다. 귀를 할퀴는 불쾌한 현악기 소리, 불안감을 조성하는 음산한 소리, 귀에 거슬리는 불협화음 등이 있죠. 이 음향효과들은 일반적으로 게임의 배경음악으로 삽입되어 공포감을 조성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방식이 굳어져 일종의 공포게임의 ‘클리셰’로 자리 잡았고, 플레이어들이 이에 익숙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현악기가 고음에서 트레몰로(한두 음을 잘게 떠는 음악 기법)로 분위기를 고조하면 ‘아, 이제 곧 괴물이 등장하겠네’라고 예측하게 된 것이죠. 무엇보다도 게임의 배경음악은 게임 속에서 주인공이 실제로 듣는 소리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와 음악에는 미세한 간극이 존재하게 되고, 이는 공포와 몰입을 저하하는 요소가 되기도 했죠.
반면 암네시아의 배경음악은 공허합니다. 대부분의 공포는 게임 속에서 다니엘이 경험하는 실제 소리로 나타납니다. 다니엘은 공포를 느낄 때 이를 아주 심하게 가는데요. 틱, 틱, 틱…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다니엘의 이 가는 소리는 그가 느끼는 심리적 공포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괴물이 울부짖는 소리는 숨이 막힐 정도로 두려운데, 앞서 말했던 것처럼 플레이어는 괴물을 정면으로 보면 안 됩니다. 정면으로 보면 정신력이 닳아서 죽고 말거든요. 플레이어는 어딘가에 숨어서 괴물이 점점 멀어지는 것을 걸음 소리로 알아들어야 하죠. 암네시아의 제작진은 괴물을 눈앞에 두거나, 잔인한 연출을 많이 넣거나, 무시무시한 배경음악을 사용하는 것 없이, 음향효과를 통해 만들어 내는 분위기만으로도 플레이어의 심리를 압도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셈입니다.
상승·하강하는 음, 그리고 승리와 구원
다니엘은 종국에 모든 기억을 되찾고 충격적인 진실을 마주합니다. 자신의 메모에서 죽이라고 지시한 알렉산더는 모종의 이유로 다른 세계에서 지구에 오게 된 인물이었고, 그는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는 차원의 문을 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차원문을 열기 위해서는 ‘비타이(Vitae)’라는 물질이 필요한데, 비타이의 원료에는 인간의 공포가 포함돼 있습니다. 공포를 마주한 인간이 소유한 간절히 살고자 하는 의지가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죠. 알렉산더는 다니엘을 고용해 그에게 자신이 데려온 사람들을 고문하고 잔혹하게 살해하는 임무를 주었습니다. 처음에 다니엘은 죄책감을 느꼈지만, 알렉산더가 데려오는 사람들이 모두 흉악범이기에 나중에는 자신을 ‘정의의 심판자’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공포를 추출할 사람이 부족해지자 무고하고 평범한 사람들을 납치하기 시작했고, 다니엘은 이를 모른 채 그들을 끔찍하게 학살했죠. 모든 진실을 알게 된 다니엘은 죄악감으로 미쳐갔고, 스스로 기억상실증에 걸리는 약을 먹었습니다. 극한의 공포에 내몰린 사람이 선택한 것은 자신의 기억을 삭제해 버리는 것, 즉 ‘기억상실(amnesia)’이었죠.
이 게임의 결말은 세 가지인데, 그중 두 가지 결말과 거기에 사용한 음악이 흥미롭습니다. ‘승리 엔딩’과 ‘구원 엔딩’이라고 표현해 보죠. 먼저 ‘승리 엔딩’은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려고 차원의 문을 연 알렉산더에게 다가가 그를 죽이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결말입니다. 이 결말에서는 구슬픈 첼로, 오르간, 현악 앙상블의 음색이 두드러집니다. 마치 다니엘이 자신의 과거를 참회하고 후회하는 것만 같죠. 그러다가 강렬한 타악기 리듬과 함께 템포가 급변하고 비장하게 음악이 몰아칩니다. 알렉산더라는 거대한 악을 물리치고 얼룩진 삶이지만 미래에 대한 의지를 다지고 살아가는 다니엘을 표현하는 것이죠. 하지만, 이 음악은 초지일관 상승하는 선율과 화성이 주가 되어 긴장된 분위기는 해소되지 않습니다. 다니엘 역시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고, 그 또한 무수히 많은 사람을 죽인 괴물이라는 점이 나타나는 듯합니다. 한편 ‘구원 엔딩’에서 다니엘은 알렉산더에 의해 성에 감금되어 있던 또 다른 인물, ‘아그리파’를 도와 알렉산더에 대한 아그리파의 복수를 도운 후, 자신은 알렉산더와 함께 죽음을 맞이하죠. 그런데 깜깜한 어둠 속에서 아그리파의 영혼이 나타나 다니엘의 영혼을 구해줍니다. 다니엘 역시 어찌 보면 알렉산더에게 이용당한 피해자였고, 아그리파는 그도 고통을 받아왔다며 다니엘을 구원하죠. 이때의 음악은 경건한 분위기로, 중세시대 종교음악인 ‘모테트’를 떠올리게도 합니다. 앞선 ‘승리 엔딩’에서의 음악과는 달리 선율이 계속해서 하강하며 따스하고도 몸이 가라앉는 느낌을 줍니다. 이 게임에서 가장 평화롭고 아름다운 음악입니다.
각 결말에서 다르게 연출한 음악은 명확하지 않은 선과 악의 경계를 표현합니다. 플레이어가 괴물들에게 도망치기 위해 사력을 다해 키보드를 두들기며 감정적으로 동기화되었던 다니엘의 과거 행보를 알려주는 엔딩은 가히 충격적이죠. 그를 잔인한 인물로 볼지, 그 역시 알렉산더에게 희생된 피해자로 동정할지, 그 해석은 플레이어 각자의 몫일 것입니다.
글 이창성
서울대 작곡과에서 음악이론을 공부했다. 게임과 음악의 관계에 관해 관심을 두고 있으며 게임음악학 연구를 진행 중이다. 현재 KBS 1FM의 PD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