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공연예술의 현재와 미래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3년 11월 29일 5:10 오후

SPECIAL

 

거대한 대륙이 예술을 향해 움직인다!

중국

공연예술의

현재와 미래

광활한 대륙과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중국은 1960년대 문화대혁명과 1970년대 개혁개방을 거치며 문화예술계가 급변하는 시기를 겪었다. 거대한 공연장을 중심으로 공연예술을 향유하는 이들이 늘어났고, 중국을 대표하는 신예 연주자들의 이름 역시 세계 무대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전통음악부터 다음 세대를 위한 교육기관까지, 중국 공연예술의 흐름을 짚어본다.

 

PART 1. COLUMN

중국의 공연 예술 생태계의 역사와 변화 _한정호

 

PART 2. PERFORMING PLACES IN CHINA

대륙을 넘어 세계로 뻗어나가는 중국의 공연장들 _홍예원

 

PART 3. NEW GENERATIONS & COMPOSERS

1989~2001년생까지, 차세대 피아니스트들 _김주영

지휘자, 관현악 연주자, 성악가 _한정호

사회적 어려움을 딛고 일어난 중국의 작곡가들 _송주호

 

PART 4. EDUCATION & COMPETITIONS

클래식 음악 교육의 현장과 도약의 분위기 _허서현

 

PART 5. TRADITIONAL ARTS

경극과 금곡(琴曲)으로 살펴보는 중국의 전통음악 _전인평

 


01
COLUMN

글 한정호(음악 칼럼니스트·에투알클래식&컨설팅 대표)

세계 공연 시장으로의

도약을 위한 성장통

중국 공연예술 생태계의 역사와 변화

 

1978년 덩샤오핑이 천명한 개혁개방은 문호를 개방해 경제발전을 이끈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1980년대 저장, 장수, 산동, 허베이, 요동 등 연안 지역과 경제 특구에서 ‘세계 공장’의 기틀을 마련했고, 1990년대 들어 서비스 산업 발전 계획을 추진하면서, 중국에도 공연예술의 시장 개념이 도입됐다. 1992년 중국 국무원은 ‘제3산업 발전에 대한 중대전략정책’ 보고서 상에 문화예술의 ‘시장’ ‘산업’ 개념을 처음 명시했다. 2009년 웹진 ‘예술경영’ 기고에서 프로듀서 장혜원은 “2000년 중국 중앙공산당 공식문건 ‘국민경제와 사회발전 10차 5개년 계획 제정에 관한 건의’에서 ‘문화 산업’ 용어가 처음 등장했다. 문화산업 전반에 대한 정책적 변화와 공연예술 관련 분야의 제도적 개혁, 경영관리 개념이 도입됐다”라고 평가했다. 중앙당 중앙선전부가 큰 틀을 제시하고, 국무원 산하 문화부 주도로 5년마다 문화발전 계획을 수립한다. 문화청, 문화국이 성 단위, 시 단위 공연의 관리 감독을 행한다.

 

세계 공연 시장의 메카

중국 공산당 10-11차 5개년 계획(2001-2005, 2006-2010)의 문화발전 목표는 문화 예술 인프라 확충, 콘텐츠의 국제 경쟁력 강화로 설정됐다. 중국은 2001년과 2002년 각각 2008년 베이징올림픽과 2010년 상하이엑스포를 유치하면서 2000년대 내내 대대적인 인프라 정비에 나섰다. 2004년 상하이 동방예술센터, 2007년 국가대극원이 완공되면서 화난과 화베이를 대표하는 국가대표 공연장이 들어섰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은 1988년 서울올림픽이 그랬듯, 중국의 국제적 위상을 입증하는 무대가 됐다. 광저우와 항저우는 각각 2010년과 2022년 하계 아시안게임 유치를 계기로 오페라하우스를 개관했고, 동계 아시안게임 단골 유치도시인 하얼빈도 2015년 오페라하우스를 열었다. 2000년대 후반을 기준으로 수도, 광역도시 외에 직할시(直辖市), 부성급(副省级), 지급(地级), 현급(县级) 도시에 공연장이 대대적으로 건설되면서 교육문화오락 분야의 소비 지출을 유인했다. 본질적으론 이웃 도시가 성장하는 데 주변에 뒤지지 않겠다는 시와 성 단위 정책 결정자간의 과열 경쟁이 공연 인프라 양산으로 이어졌다.

2010년대 중국 전역에 공연장이 급증하면서 소프트웨어 공급을 책임지는 우(Wu)프로모션, 루거(Ruge)아티스트, 유니버설 뮤직앤컬처, 실랑(Silang)문화, 아시안문화, 아카디아 뮤직, 유로비스타 아츠프로모션, 암스트롱 뮤직앤아츠, 폴리컬처 등 공연 에이전시가 부흥했다. 공연장 운영 인력은 주로 영국과 유럽에서 유학과 인턴 경력을 마친 당간부 자식들이 주요 공연장의 책임자로 나서 영국 주재 투어 매니지먼트나 유럽 오케스트라·오페라·발레단의 내중 공연 파트너가 됐다. 올림픽, 엑스포, 아시안게임 축하 명목으로 유럽, 미주 공연 단체가 중국 내 친밀 인사와의 특수 관계를 통해 중국에서 이윤을 취했다. 중국 문화 단체 종사자 수는 2010년대 이후, 지금도 기복 없이 안정적 증가세를 보인다. ‘클래식 음악의 미래는 중국에 있다’는 서구 언론의 평가 역시 2010년을 전후해 유럽 각국의 정론지 칼럼으로 게재됐다.

2013년 시진핑 국가주석 취임 이후. 중국 발전은 ‘중국몽’ ‘팍스 시니카’ ‘일대일로(一帶一路)’의 철학과 로드맵을 따른다. 2014년 구매력평가기준에서 미국 경제 규모를 넘어섰고 2008년 리먼 브라더스 사태로 재정난에 놓인 유럽, 미주 공연 단체는 2010년대 초반 경쟁적으로 중국 투어에 나섰다. 같은 시기 전 세계 대부분의 오페라극장이 예산을 삭감했지만, 국가대극원은 자체 오페라를 제작하고, 해외 저명 오페라극장의 전막을 다량 수입해 도시에 공급했다. 기존 방식의 성장이 한계에 다다른 클래식 음반 산업은 2000년대 후반부터 중국에 공을 들였고, 2018년 도이치 그라모폰(DG)의 창사 100주년 행사는 베를린이 아닌 베이징에서 열렸다. 중국 공연 음악 시장의 달라진 위상을 알린 상징적 사건이다. 바야흐로 중국은 공산품의 생산 기지일 뿐 아니라 국제 공연 거래에서 주된 소비 시장이 됐다.

 

정책과 현실 사이의 기로

그러나 2017년 미국의 트럼프 집권 이후 중국의 공연 시장은 급격히 체질 변화를 맞이했다. 트럼프에 이어 바이든 미 행정부도 중국과 무역 갈등을 이어가고, 2020년부터 3년간 전 세계에서 가장 엄격한 코로나19 방역 정책을 고수하면서 중국이 2000년대 초반부터 국제 공연 시장에서 구축해온 ‘돈 먹는 하마’ ‘거대한 공룡’의 위상과 이미지가 흐려졌다. 미중 갈등이 장기화되면서 오랜 기간 파트너십을 맺어 온 뉴욕 필하모닉,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등 미국 악단의 방중이 금지됐고, 대신 중국내 교향악단 창단 붐이 일었다. 중국 심포니 발전 재단 산하 프로 악단이 2015년에 30개 가량이었지만, 2019년에는 80개를 넘을 만큼 비약적인 양적 성장을 이뤘다. 지휘자 유롱이 앞장선 중국 오케스트라의 대외 진출에 중국 정부의 지원이 함께 한다.

베이징·상하이·광저우·선전의 1선 도시는 음악가 매니지먼트, 콘서트홀 유지 관리, 관객 개발의 요소에서 자본주의의 외형을 따르지만, 청두·항저우·텐진·충칭 등의 신 1선 도시, 다렌과 샤먼 등의 2선, 웨이하이·뤄양 등 3선 도시는 공연장을 채울 공연 소프트웨어가 여전히 부족하다. 1선 도시를 제외하면 코로나19 창궐로 저명 해외 악단 방문이 무산되면서 중국 곳곳의 공연장에서 각종 관리 부실이 지적되고 있다. 사실상 베이징과 상하이를 제외하면, 중국 대부분의 도시에선 경제 지표 보다 낮은 차원의 공연예술 혜택을 누리고 있다. 베이징과 상하이 역시 화난, 화베이 경제권의 핵심인 동시에 문화적으로 경쟁하는 관계로, 두 도시를 잇는 고속전철은 개통됐으나, 주변 권역을 아우르는 광역 개발 프로젝트를 기회로 클래식 시장은 화베이와 화난으로 분할되는 양상을 보인다. 특히 상하이는 2016년부터 ‘환인민광장 예술공연 활력구’ 프로젝트를 가동해 궁극적으로 홍콩을 포용하는 ‘아시아 공연의 메카’를 꿈꾼다.

2020년대 중국 공연예술 시장은 서구 문물 대신, 전통 회귀를 추구하는 시진핑 정부의 문화 정책 방향과 소비 수준의 불평등이 심화되는 중국 시민의 현실 사이에서 일정한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다. 중국 역시 고령화 사회에 진입했고, 각 부문에 여전히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모순이 존재한다. 미중분쟁과 신 냉전에서 중국 정부는 국가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동안, 개인은 전통극, 가족극, 인형극의 관람을 주로 권유받는다. 피아니스트 조성진, 임윤찬을 매개로 한 한국식 해외 오케스트라 소비처럼, 2020년대 중국 1선 도시 이하의 시민이 랑랑, 유자 왕 등 중국 연주자 협연의 오케스트라 관람에 흔쾌히 지갑을 열 것인가에 대해서는 물음표가 따른다.

Shanghai / China – circa March 2020:

상하이 동방예술센터

중국 상하이에 있는 복합 공연장으로, 2005년 개관했다. 건물 꼭대기에 설치된 880개의 전등은 음악이 나오면 선율에 맞춰 변하도록 되어 있다. 내벽은 금속 복층의 유리벽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중앙홀 입구와 동방연주실, 동방음악실, 전람실, 동방오페라극장이 건물 외관 전체에 꽃잎 모양으로 둘러져 있다.

 


02
PERFORMING PLACES IN CHINA

글 홍예원 기자

문화예술 중심지를 향한 웅대한 꿈

대륙을 넘어 세계로 뻗어나가는 중국의 첨단 공연장들

중국 정부가 클래식 음악 진흥 정책을 펼치며, 중국의 악기 시장은 2020년 기준 1천억 위안(약 18조 1,660억 원) 규모로 성장했다. 음악 교육 역시 14억에 달하는 인구에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우는 인구는 각각 3천만 명, 1천만 명을 넘는다. 이에 베이징과 상하이 그리고 광저우 등으로 대표되는 중국의 대도시들은 문화예술을 주요 발전 요소로 삼고 크고 작은 공연장을 짓는 데 열중하고 있다. 2010년대 들어서는 톈진대극장, 청두시티콘서트홀, 하얼빈 대극장 등 최신식 대규모 공연장들이 개관했다. 지금까지 쌓아온 음악적 에너지를 세계로 펼칠 일만 남은 중국 유수의 공연장들을 한데 모아봤다.

 

국가대극원 베이징

国家大剧院

국가대극원

National Centre for the Performing Arts

www.chncpa.org

 

광활한 대륙의 수도 베이징 중심에는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천단공원이 있다. 천계와 인간계를 잇는 신성한 제단을 지나면, 거대한 마오쩌둥의 초상화가 걸린 중국의 상징 천안문을 마주하게 된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건축물들의 웅장한 위용에 압도되려는 찰나, 타원형 외관의 현대적인 건물이 눈에 띈다. 바로 중국을 대표하는 공연장 국가대극원이다.

거대한 달걀을 누인 듯, 돔 형태의 국가대극원은 그 자체만으로도 시선을 사로잡는다. 프랑스 건축가 폴 앙드레의 설계로,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앞둔 2007년 9월에 완공된 국가대극원은 명실상부 세계 최대 규모의 공연장으로, 인공 호수 위에 2만 여장의 티타늄 소재 금속판과 흰 유리로 연결되어 그 규모와 함께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다.

총 5,437석의 규모를 자랑하는 국가대극원은 크게 세 개의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6,500개 이상의 파이프로 구성된 오르간이 있는 콘서트홀과 전체 4층 2,416석 규모로 오페라·뮤지컬·발레 등을 상연하는 오페라하우스 그리고 1,040석 규모로 연극·경극·전통극 등이 공연되는 드라마센터다. 특히, 드라마센터는 15개의 승강 무대로 회전과 오르내림을 동시에 진행할 수 있어 다양한 연출이 가능하다. 다양한 공간을 갖춘 만큼, 이곳에는 국가대극원 오케스트라国家大剧院管弦乐团, 합창단国家大剧院合唱团, 오페라단国家大剧院歌剧演员队이 상주하고 있다.

 

국가대극원 오페라단 ©National Centre for the Performing Arts

국가대극원 합창단 ©National Centre for the Performing Arts

 

 

 

 

 

국가대극원 오케스트라 ©National Centre for the Performing Arts

国家大剧院管弦乐团

국가대극원 오케스트라

China National Centre for the Performing

Arts Orchestra

 

2010년 3월에 창단한 국가대극원 오케스트라는 국가대극원의 상주 오케스트라로, 국가대극원의 예술감독인 뤼지아(1964~)가 음악감독을 맡고 있다. 매년 10회 이상의 오페라 공연을 무대에 올리는 국가대극원 오케스트라는 ‘트리스탄과 이졸데’ ‘토스카’ ‘세비야의 이발사’ 등 정통 오페라 레퍼토리뿐 아니라 ‘인력거꾼’ ‘장정’ 등의 창작 오페라를 포함해 30개 이상의 새로운 오페라 작품들을 선보인다. 특히, 현대음악의 발전에 많은 관심을 두고 있는데, 타케미츠 토오루(1930~1996), 존 애덤스(1947~) 등의 작품을 중국에서 초연한 바 있으며, 다음 세대 작곡가 양성을 위해 국가대극원이 진행하는 ‘젊은 작곡가 프로그램’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중국 국립 심포니 오케스트라 ©China National Symphony Orchestra

中国国家交响乐团

중국 국립 심포니 오케스트라

China National Symphony Orchestra

 

중국 국립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1956년 중국 정부에서 창단한 최초의 서양 관현악단이다. 베토벤·베를리오즈·드보르자크·시벨리우스 등의 교향곡을 중국 초연하는 등 클래식 음악 확산에 적극적으로 기여했으며, 중국 전통음악부터 현대음악까지 다양한 레퍼토리를 선보여 왔다. 2009년 부산시향 수석지휘자를 맡으며 국내에 알려진 리신차오(1971~)가 지휘봉을 잡고 있다. 베이징 음악당을 주 공연장으로 사용하던 중국 국립 오케스트라는 2007년 국가대극원 개관으로 현재까지 대극원 음악당을 주 공연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광저우 오페라하우스 ©Iwan Baan

州大剧院

광저우 오페라하우스

Guangzhou Opera House

www.gzdjy.org

 

우리나라 동대문역사문화공원(DDP)의 건축가로 잘 알려진 자하 하디드(1950~2016)가 설계한 광저우 오페라하우스는 광저우의 중심인 주장(珠江) 신도시에 위치하고 있다. 중국 남부 중국 광둥성의 성도(省都)이자 화난 지방 최대의 도시인 광저우는 무역항을 중심으로 오랜 세월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무역과 금융의 핵심지다. 중국 국가대극원, 상하이 대극원과 함께 중국 남부 최대 규모의 공연장으로 손꼽히는 광저우 오페라하우스는 2010년 5월, 로린 마젤(1930~2014)의 지휘로 푸치니 오페라 ‘투란도트’를 연주하며 힘차게 개관했다.

광저우 오페라하우스는 중국 화난 지방을 가르는 주장강을 따라 침식되는 주변 자연환경을 반영해 두 개의 조약돌을 모티브로 설계되었으며, 해체주의 건축 양식인 곡선의 아치, 기하학적 모양 등으로 주장 신도시 비즈니스 지구에 위치한 공연장의 미래지향적인 이미지를 드러냈다. 광저우 오페라하우스는 1,687석의 오페라홀과 350석의 실험극장 그리고 세 개의 다양한 기능을 갖춘 리허설홀로 구성돼 있으며, 음향 전문 건축가 해롤드 마샬(1931~)이 음향을 맡아 완벽한 시청각 효과로 건축가와 예술가들의 호평을 받은 바 있다.

 

하얼빈 콘서트홀

하얼빈 콘서트홀

哈尔滨音乐厅

하얼빈 콘서트홀

Harbin Concert Hall

www.shsymphony.com

 

헤이룽장성의 성도(省都)인 하얼빈은 중국에서 서양 문화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도시이다. 지난 2010년에는 ‘UN 음악 도시’로 지정되며 하얼빈 콘서트홀, 하얼빈음악원, 하얼빈 오페라하우스를 갖춘 문화도시로 성장했다. 특히, 격년에 한 번 펼쳐지는 앨리스 엘레노어 쇤펠트 콩쿠르가 바로 이곳, 하얼빈에 위치한 공연장 세 곳에서 개최된다.

그 중 복합공연예술센터인 하얼빈 콘서트홀은 하얼빈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주 공연장으로, 지난 2014년 문을 열었다. 하얼빈이 국제빙설제로 유명한 중국 최고의 겨울 휴양지인 만큼, 공연장의 외관 역시 ‘떠다니는 얼음 결정체’를 모델로 설계됐다. 이러한 콘셉트는 하얼빈을 대표하는 얼음과 눈의 이미지와 조화를 이루며 도시의 새로운 랜드마크 건물로 떠올랐다. 밤이 되면 마치 다이아몬드가 반짝이듯 도시의 밤을 환히 밝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상하이 대극원

上海大剧院

상하이 대극원

Shanghai Grand Theatre

www.shgtheatre.com

상하이는 베이징보다 더 많은 인구가 거주하는 중국의 금융 수도이자, 동서양의 문화가 융합된 매력적인 도시다. 40여 년 전 중국의 개혁개방으로 외국 문물을 다른 도시보다 먼저 받아들인 만큼, 지금까지도 수준 높은 공연과 전시가 다채롭게 열린다. 1998년 8월 중국 국립발레단의 ‘백조의 호수’ 공연으로 문을 연 중국 최초의 오페라 전용 극장 역시 이곳에 있다. 1970년대 후반 중국의 개혁개방 당시, 상하이를 방문한 세계 여러 공연단의 공연을 위한 마땅한 무대가 없었던 상하이시는 시내 중심에 있는 인민광장 주변을 중국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고자 했고, 프랑스 건축가 장 마리 샤르팡티에의 설계로, 동서양 건축 양식이 조화를 이룬 상하이 대극원을 건립했다.

1,8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극장은 아시아에서 손꼽히는 대규모 공연장 중 하나이며, 600석을 보유한 중극장 그리고 200석의 소극장에서는 연극, 뮤지컬 등을 공연한다. 이외에도 상하이 대극원에는 12개의 크고 작은 리허설룸과 각종 작업실, 분장실 및 연회장 등의 편의시설을 보유하고 있다. 건물 외관의 왕관 같은 하얀 아치형 옥상, 고전적인 야외극장과 공중 화원은 상하이가 수용하는 세계 문화예술의 포용력을 상징한다. 이러한 이유로 상하이 대극원은 지금까지도 도시 내에서 인지도가 높고 중요한 건물 중 하나로 꼽힌다.

개관 이래 오페라·교향악·실내악·연극·발레 등 다양한 공연을 성공적으로 펼치며 중국 문화교류의 중요한 창구이자, 가교 구실을 하는 상하이 대극원의 상주 단체로는 상하이 방송교향악단, 중국 국립발레단, 상하이 발레단, 상하이 국제예술제 등이 있다.

 

상하이 심포니 홀

上海交响乐团音乐厅

상하이 심포니홀

Shanghai Symphony Hall

상하이 심포니 오케스트라

Shanghai Symphony Orchestra

www.shgtheatre.com

 

상하이 심포니 오케스트라

우아하고 시적인 정취가 가득한 도시 상하이는 중국의 경제 중심지를 넘어 문화·예술 중심지로 도약하고 있다. 1879년 출범 이후, 전쟁과 문화대혁명 시기에도 연주를 이어온 상하이 심포니는 아시아 최초이자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오케스트라다. 상하이 심포니는 2014년 개관한 상하이 심포니홀을 상주 공연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심포니홀의 개관으로 최적의 조건에서 더욱 안정적인 연주를 이어가게 된 상하이 심포니는 중국 최초로 도이치 그라모폰(DG)과 계약을 체결하는 등 역사와 전통에 걸맞은 중국 최고의 오케스트라로 손꼽힌다. 현재 중국 필하모닉 예술감독, 광저우 심포니의 음악감독 그리고 홍콩 필의 수석 객원 지휘자를 맡고 있는 지휘자 유롱(1964~)이 지휘봉을 잡고 있으며, 오는 11월 유롱의 지휘로 청창극清唱剧 ‘상하이! 상하이!’를 세계 초연할 예정이다.

상하이 심포니가 상주하는 심포니홀의 정식 명칭은 재규어 상하이 심포니 오케스트라홀(Jaguar Shanghai Symphony Orchestra Hall)로, 1,200석 규모의 빈야드 스타일 콘서트홀과 400석 규모의 리사이틀홀로 구성돼 있다. 심포니홀은 최첨단 녹음 시설을 겸하며, 로비에 설치된 10개의 화면은 세계 각 지역에 공연 현장을 송출할 수 있는 기능을 갖고 있다.


03
NEW GENERATION: PIANO

글 김주영(피아니스트·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

 

대륙을 넘어선 다양함과 독창성

1989년생부터 2001년생까지, 중국의 차세대 피아니스트들

 

중국에 대해 설명할 때 종종 ‘대륙의’라는 단어로 이야기가 시작될 때가 있다. 중국인들 스스로가 주장하는 내용일 수도 있고 거대한 나라에 대한 20세기적 표현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예술가들의 이미지와 맞물릴 때는 오해도 생겨나기 마련이다. 중국의 피아니스트를 떠올릴 때 폭넓은 스케일과 강한 타건, 크고 거칠게 표현하는 다이내믹함이나 외향적인 무대 매너 등이 생각난다면 위에서 논한 크고 작은 오해들 중 하나가 될 것인 바, 21세기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대륙의’ 젊은 세대들은 몇 가지로 도식화하기 힘들 정도의 다양한 색채와 독창적인 기질, 새로운 아이디어로 뭉쳐 있다.

 

장주오

젠 트리오 장주오(피아노), 에스더 유(바이올린), 나렉 하크나제리안(첼로)

장주오

현재는 제제(Zee Zee)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는 중국계 미국인 피아니스트다. 1989년 생으로, 우리에게는 바이올리니스트 에스더 유·첼리스트 나렉 하크나자리안과 함께 한 ‘젠 트리오’의 멤버로 알려졌다. 선전 예술학교에서 단 자오이에게 배웠으며 10세에 독주회를 열며 화제가 되었다. 이스트만 음대와 줄리아드 음악원을 거친 주오는 파보 예르비가 지휘하는 신시내티 심포니 등과 협연했으며 2013년부터 3년 간 BBC에서 선정한 뉴 제너레이션 아티스트가 되어 유럽 최고의 교향악단과 여러 페스티벌을 거쳤다. 파보 예르비/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라벨·리스트의 피아노 협주곡 음반(DG)을 녹음한 바 있다. 선이 굵고 힘 있는 터치, 건강미를 앞세운 해석으로 어느 곡이나 무리 없이 소화해내며, 막힘없이 유창한 진행에서도 설득력이 느껴진다. 세밀한 뉘앙스의 표현은 의식적으로 자제하는 듯 느껴지기도 한다.

 

장하오천 ©Benjamin Ealovega

장하오천

1990년 생인 장하오천은 비슷한 세대의 중국 피아니스트 가운데 단연 높은 지명도를 지닌다. 2009년 밴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일본의 츠지이 노부유키와 공동우승을 차지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하오천은 상하이 태생이다. 5세에 독주회, 6세에 협연을 가진 천재로 열두 살에 영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최연소 우승자가 되기도 했다. 커티스 음악원에서 게리 그라프먼(1928~)에게 배운 이력은 유자 왕이나 랑랑과 유사하다. 츠지이 노부유키에 비해 관심을 덜 받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2017년 비스(BIS) 레이블에서 슈만·리스트·브람스·야나체크 등의 작품을 담은 첫 정규 음반 소식을 알렸다. 그 후 2019년 디마 슬로보데니우크/라티 심포니와 차이콥스키·프로코피예프의 협주곡을 녹음했고, 2022년에는 나탈리 스튀츠망/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베토벤의 협주곡 전곡을, 올해는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 음반을 발표하며 주가를 올리고 있다. 밴 클라이번 콩쿠르 당시 지나치게 꼼꼼하고 정도를 지키는 해석이라는 이미지가 있었는데, 30대에 들어선 하오천은 장점인 빠른 손가락과 섬세하게 계산된 악상 배열에 자유로움이 더해진 모습을 들려주고 있다.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은 정돈된 테크닉이라는 면에서 높은 완성도를 자랑하며, 나탈리 스튀츠망의 긴장감 있는 아고긱(정해진 속도에서 벗어나 음 길이에 변화를 주는 기법)에 흔들림 없이 반응한 베토벤 협주곡들도 흥미롭다.

 

지 리우

지 리우

1990년 생 지 리우는 피아니스트인 동시에 작곡가, 편곡자 등으로 다양한 음악적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있다. 상하이음악원을 거쳐 스페인으로 건너가 마드리드 레이나 소피아 음악원에서 드미트리 바시키로프(1931~2021)를 사사했다. 그 후 영국 왕립음악원에서 공부를 이어간 지 리우는 졸업 후 영국을 중심으로 연주와 음반 활동을 병행하고 있으며, 자신의 창작곡과 영화음악, 샌드 애니메이션 등을 접목시키는 등의 흥미로운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2014년부터 발매되고 있는 그의 음반은 ‘Classic FM’ 레이블에서 나오며, 2018년 음반 ‘불과 물(Fire&Water)’은 전 영국 클래식 차트 1위에 올랐다. 2015년 금호아트홀에서 열린 한중수교 23주년 기념음악회에 출연하기도 한 지 리우의 스타일은 신중한 사색적 자세가 두드러지며, 20세기 음악을 포함한 레퍼토리 선정에서도 자신만의 철학이 느껴진다.

 

뉴뉴

뉴뉴

본명이 장셍량인 뉴뉴는 1997년 생으로, 아버지와 함께 세 살 때부터 피아노를 익혔다. 상하이음악원 부속 초등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해 2014년부터는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9세에 EMI 레이블과 계약을 하여 국제적인 레이블로는 최연소의 기록을 세웠던 뉴뉴는 지금까지 8장 이상의 음반을 발매했다. 2007년 런던 로열 페스티벌 홀에서 레슬리 하워드가 지휘하는 쇼스타코비치 협주곡 1번의 독주자로 출연했는데, 당시 찰스 왕세자가 참석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18년 일본 애니메이션 ‘피아노의 숲’의 사운드트랙을 녹음했으며, 2021년 ‘운명과 희망(Fate&Hope)’, 2023년 ‘생애(Lifetime)’라는 제목의 음반으로 인기를 이어가고 있다. 주로 기교적인 레퍼토리나 화려한 편곡 등을 선호하는 뉴뉴는 강한 손목 힘과 순발력, 합리적이면서도 재빠른 손가락을 소유하고 있으나 때로는 지나치게 밀어붙이는 듯한 해석에서 무리가 느껴지기도 한다. 힙합 음악 등과의 협업도 있다.

 

안 티안수

안티안수

안티안수는 2000년 생으로 열아홉 살인 2019년,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4위를 수상했으나, 본선에서 주최 측과의 커뮤니케이션 문제로 협주곡의 순서를 착각하는 동영상이 오히려 더 알려졌다. 음악과 관계없는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일찍이 재능을 보인 티안수는 베이징 중앙음악원을 거쳐 2015년부터 공부한 커티스 음악원을 로버트 맥도날드를 사사하며 졸업했고, 당 타이 손에게 개인 교습을 받기도 했다. 2021년 8월 알파 레이블로 출반한 그의 데뷔 음반은 러시아 레퍼토리로 채워져 있다. 차이콥스키의 소품들과 프로코피예프의 에튀드 Op.2, 라흐마니노프의 쇼팽 주제에 의한 변주곡 Op.22를 연주한 티안수의 스타일은 건실한 기교와 안정된 템포 감각, 긴 호흡이 동반된 폭넓은 상상력 등으로 생각할 수 있다. 섬세한 마무리 능력이 가미된다면 좀 더 큰 피아니스트가 될 가능성이 충분하다.

 

로렌 장

로렌 장

2001년 생 로렌 장은 20대 초반이나 큰 그릇의 자질을 지니고 있는 신예다. 미국 앨버커키에서 태어나 아홉 살 때 영국 버밍엄으로 이주했고, 로열 버밍엄 음악원에서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같이 공부했다. 2016년 독일 에틀링겐 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한 로렌은 2018년 BBC 영 뮤지션 콩쿠르(Young Musician Competition)에서 마크 위글스워스/버밍엄시 오케스트라와 프로코피예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연주해 우승을 차지했다. 2019년 베르비에 페스티벌 아카데미에 참가했고, 커티스 음악원에도 입학 허가를 받은 로렌은 현재 하버드 대학에서 화학 관련 과목을 전공하는 동시에 연주자로서의 무대도 소화하고 있다. 본격적인 데뷔곡이라고 할 수 있는 프로코피예프의 협주곡에서는 거친 음향 속 여유와 우아함이 느껴지는 대가다운 해석이 놀라웠으며, 이와 대조적인 작은 소품들을 다루는 방법에서도 집중력과 끈기가 묻어나온다. 더 큰 무대를 통해 성장할 모습이 기대되는 피아니스트라고 하겠다.


NEW GENERATION: CLASSICAL MUSIC

글 한정호(음악 칼럼니스트·에투알클래식&컨설팅 대표)

 

세계 무대를 책임질,

새 주역들의 활약

‘국제’ 무대를 겨냥하고 달리는

중국 출신 지휘자,

관·현악 연주자,

성악가들은 누구인가?

 

서구 클래식 음악 시장에서 중국 음악가는 중화인민공화국, 대만, 중국 반환 전 홍콩, 마카오 출신을 세분하지 않고, 중화(中華) 출신을 다 중국인으로 인식한다. 심지어 1990년대 바이올리니스트 바네사 메이(1978~)처럼 싱가포르 태생 영국 연주자이지만, 중화권 부모를 두어 중국계로 보는 시각도 존재했다. 본고에선 1978년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선언 즈음(을 기점으로 이후) 중국에서 태어난 신진 연주자와 중국 태생 양친의 이주로 서양에서 자란 동년배 음악가를 주로 살핀다.

 

중국 교향악단에 힘을 싣는 지휘자들

지휘에선 광저우 심포니 음악감독 황리(1986~)가 선두주자다. 중국 필하모닉 수석 지휘자를 겸하는 황리는 세이지 오자와 프로젝트와 크리스티안 틸레만의 중국 공연에서 조수 지휘자를 맡으며 이름을 알렸다. 광저우 심포니 수석지휘자 징환(1979~)도 2020년대 괄목할 성과를 보인다. 여성으론 드물게 국제 지휘 경연(2012년 칭다오 리델룬 지휘 콩쿠르) 우승 경력이 있으며, 상파울루 심포니에서 마린 알솝(1956~) 문하에 있었다. 샤샤오탕(1981~)은 중국 필하모닉 음악감독으로 치강첸과 탄둔의 교향곡에 능하며, 2019년 중국 필 내한 공연을 이끌었다. ‘중국 클래식 음악계 실권자’인 지휘자 유롱이 적극적으로 후원하는 지휘 인재는 진유광(2000~)이다. 선전 심포니 음악감독으로 하차투리안 지휘 콩쿠르, 온리 스테이지 지휘 콩쿠르에서 준우승했다.

 

이미 서방과 통하기 시작한

‘국제’ 수준의 바이올리니스트들

바이올린에선 2002년 차이콥스키 콩쿠르 준우승의 첸시(1984~)와 2006년 파가니니 콩쿠르 위너 닝펑(1982~)이 새 시대를 열었다. 첸시는 차이콥스키 콩쿠르 당시 준결승을 앞두고 손 부상을 당했지만, 결승에 올라 1위없는 최상위에 올랐다. 같은 기간 열린 2002 한일 월드컵에서 러시아가 일본에 패하자 경기 결과에 불만을 품은 러시아 훌리건들이 경연장에 등장해 첸시를 비롯한 피아니스트 아야코 우에하라(1980~) 등 아시아계 참가자를 조롱했다.

닝펑은 2005년 마이클 힐 콩쿠르에서 우승하고, 하노버·퀸 엘리자베스·메뉴인 콩쿠르에 입상하며 중국 개혁개방 세대 가운데 서방에 통하는 첫 바이올리니스트로 자리 잡았다. 닝펑은 홍콩에 기반을 둔 모닝사이드 재단의 캐나다 캘거리 마운드 왕립 음악원 교환 프로그램을 통해 국제 감각을 키웠다.

리촨윤(1980~)은 1991년 비에니아프스키 주니어 콩쿠르를 우승하고,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강효, 도로시 딜레이를 사사했다. 2009년 랄로 스페인 교향곡 연주 도중 쓰러지며 오랜 슬럼프에 빠지기도 했다. 지아펭 첸(1987~)은 2003년 비에니아프스키 콩쿠르 우승을 시작으로 2005년 시벨리우스 콩쿠르 2위, 2008년 메뉴인 콩쿠르 2위에 오르며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입상 특전으로 유럽에서 많은 연주 기회가 주어졌지만, 현재는 버밍엄 왕립 음악원, 체트넘 음대에서 교수 활동에 주력 중이다. 링루이펑(2000~)은 유럽 콩쿠르 입상 대신, 중화권 교육 기관과 경연을 통해 프로에 입문한 대표적 인물이다. 2014년 홍콩 바이올린 콩쿠르를 우승하고, 2019년 상하이 심포니가 주최한 독주회를 통해 중국 내 공연단체 고위 관계자들의 인정을 받았다.

이민 가정 출신으론 미국 텍사스 태생 낸시 저우(1993~)의 활약이 독보적이다. 2015년 시벨리우스 콩쿠르 결선 진출, 2017년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 준우승에 이어 2018년 하얼빈 콩쿠르, 상하이 아이작 스턴 콩쿠르를 연거푸 우승하며 미국을 중심으로 활동한다. 2018년 파가니니 콩쿠르에서 우승한 메릴랜드 태생의 케빈 주(2000~)의 활약도 두드러진다. 호주 멜버른 태생의 크리스티안 리(2007~)는 데카 클래식이 호주 내 중국계 관객을 겨냥해 발굴한 인재다. 2014년 골든 베이징 콩쿠르에서 우승했으며, 2019년 데카 레이블과 전속 계약했다.

 

첼로·비올라·기타에서도 두각을 나타내

첼로에선 상하이 태생으로 호주로 이주한 리 웨이 친(1976~)이 요요 마, 지안 왕을 이어 중화 첼리스트로 국제무대에 명함을 내밀었다. 1998년 차이콥스키 콩쿠르 준우승, 2001년 나움부르크 콩쿠르에서 우승했고, 2001년 BBC 라디오 3 ‘뉴 제너레이션 아티스트’에 선발되었다. 디트로이트 심포니 첼로 수석 웨이 유(1981~)는 닝펑처럼 모닝사이드 재단 프로그램으로 북미에서 입지를 마련해 미국 정상급 오케스트라 수석과 함께 솔리스트 활동을 병행한다. 최근에는 2022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준우승자 이바이 첸(2001~)이 특출하다. 상하이음악원 출신으로 2018년 루토스와프스키 콩쿠르 3위, 제오르제 에네스쿠 콩쿠르 2위, 2019년 차이콥스키 콩쿠르 5위에 오르며 잠재력을 인정받았다.

비올라에선 베를린 필하모닉 비올라 수석에 오른 디양 메이(1994~)의 존재감이 확실하다. 2018년 ARD 콩쿠르 우승자로 2019년 뮌헨 필하모닉 비올라 수석에 임용됐고, 베를린 필하모닉 수석 오디션에 합격했다. 클래식 기타리스트 슈페이 양(1977~)은 1989년 도쿄 기타 콩쿠르 특별상을 수상하며 EMI 재팬 레이블에서 독주 음반을 발매하며 화제를 모았다. 본토와 대만·마카오를 가리지 않고, 클래식 기타 무대를 독식했으며, 2017년에는 조수미와의 듀오 무대를 가졌다.

 

존재감 뚜렷한 오페라극장의 주역들

관악에선 뉴욕 필하모닉 오보에 수석 리앙 왕(1980~)의 존재감이 뚜렷하다. 칭다오 태생으로 커티스 음악원 졸업 후,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신시내티 심포니를 거쳐 2006년 로린 마젤에 의해 뉴욕 필 수석에 입단했다. 현 볼티모어 심포니 클라리넷 수석 야오광 자이(1996~) 역시 토론토 심포니를 거쳐 마린 알솝의 천거로 볼티모어 심포니에 입단했다. 성악에선 베이스바리톤 선양(1984~)의 활동이 두드러진다. 톈진 출신으로 상하이음악원을 거쳐 메트 오페라 청년 프로그램, 줄리아드 음악원에 이어 2009년 ‘돈 조반니’ 마세토 역으로 메트 오페라에 데뷔했다. 청두 태생의 소프라노 장 메이귀(1993~)는 리릭 콜로라투라 성향으로 2019/20 시즌 메트 오페라 ‘맥베스’에서 피투성이 아이 역으로 데뷔했다. 2022년 샌프란시스코 오페라 ‘홍루몽’ 초연의 가보옥 역을 맡았다. 테너 진슈 사호우(1990~)는 2012년부터 2020년까지 빈 슈타츠오퍼 앙상블 멤버였으며, 파리 오페라, 라 스칼라 오페라에서 활동한다.


COMPOSERS

글 송주호(음악 칼럼니스트)

 

한발 늦은 이유는

좋은 채비를 위한 것

사회적 어려움을 딛고 일어난 중국의 작곡가들

중국은 면적과 인구만큼 자원이 많은 나라이다. 하지만 20세기 전반기에는 일본의 침략과 군부 세력의 난립으로 혼란에 빠졌고, 중기에는 문화대혁명으로 자국민의 생명과 잠재력이 무참히 박탈당했다. 그러나 그토록 참담한 환경 속에서도 음악의 열정은 사그라지지 않았고,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기에 이르렀다.

서양 음악계에 나타난 중국 작곡가들

서양음악 교육을 받은 중국 작곡가로서 ‘국부’와 같은 존재가 있으니, 바로 시엔싱하이(1905 ~1945)이다. 그는 포르투갈령 마카오 출신으로, 그의 가정은 보트피플(편집자 주_배를 타고 탈출한 난민)이었다. 싱가포르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며 음악을 접했고, 1918년에 광저우 링난대학(1937년에 홍콩으로 이전)에서 공부하면서 YMCA 복지학교에서 클라리넷을 배웠다. 진로를 음악으로 정하여 1926년에 베이징 국립음악학원에 입학, 1928년에 상하이음악원으로 편입했지만, 이듬해 학생운동에 연루돼 퇴학당했다. 하지만 이에 절망할 그가 아니었다.

그는 곧바로 파리로 떠나 1934년에 파리음악원 역사상 최초의 중국인 학생이 됐으며, 폴 뒤카와 뱅상 댕디를 스승으로 만났다. 보트피플에서 프랑스 유학파 작곡가로 입지전적 인물이 된 그는 1935년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가 정착한 옌안은 ‘중국’이 아니라 일본이 세운 괴뢰 국가 ‘만주국’이 돼 있었다. 시엔은 이곳에서 다수의 애국적인 음악을 작곡했는데, 중국의 역사를 노래하고 항일 정신을 고취하는 ‘황하 칸타타’(1939)가 탄생한 때가 이 시기였다. 그는 1940년에 소련에서 영화음악 작업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신장 지역의 군부가 출입을 가로막아 카자흐스탄의 알마티에 머물러야 했고, 결국 1945년 모스크바에서 결핵으로 숨을 거두었다.

오늘날에는 ‘황하 칸타타’를 기초로 만든 피아노 협주곡인 ‘황하 협주곡’이 더 자주 연주된다. 이 곡은 문화대혁명 중이던 1968년 마오쩌둥의 지시로 중앙문화혁명소조 소속 음악가들이 이듬해 완성했다. ‘황하 협주곡’은 중국에서 큰 인기를 누리는 곡이며, 해외에서도 자주 연주하고 음반도 여럿 있다.

이와 함께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작품은 얼후(해금과 유사한 전통악기) 혹은 바이올린 협주곡인 ‘량주 협주곡’(1959)이 있다. 허잔하오(1933~)천강(1935~)의 공동 작품으로, ‘량주’는 중국의 로미오와 줄리엣이라고 불리는 전설인 ‘량샨보와 주잉타이’를 줄여 부른 것이다. 두 작곡가는 상하이음악원 동문으로, 허잔하오는 얼후 작품을 바이올린으로 편곡하면서 중국의 방식으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방법을 연구했다.

 

문화대혁명 세대의 도약

1966년 5월, 문화대혁명이 시작됐다. 모든 대학교가 문을 닫았고, 사회의 리더들이 체포되거나 사상 재교육을 위해 노동 현장으로 보내졌다. 우리나라 광주 출신으로 중국의 주요 작곡가 중 한 사람이었던 정율성(1914~1976)도 이때 창작 권리를 박탈당하고, 작품을 발표하지 못했다. 처참했던 암흑기는 1976년 가을에 마오쩌둥의 죽음과 관련자 체포로 마침내 종료됐으며, 1977년에 음악학교들이 다시 문을 열었다. 그해 베이징 중앙음악원 작곡과에는 무려 2,000명이 문을 두드렸고, 단 26명만이 그 문턱을 넘을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두드러졌던 인물은 천치강(1951~)이었다.

천치강은 상하이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수준 높은 음악 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모든 것이 문화대혁명으로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러나 음악에 대한 열정을 지켜 베이징 중앙음악원에 입학했으며, 1983년 작곡 콩쿠르 우승으로 단 한 명에게 주어지는 유학의 기회를 얻어 이듬해에 메시앙의 마지막 제자가 됐다. 그의 음악은 프랑스적인 배음 기반의 음향과 중국적 제스처를 결합한 독특한 특징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그는 2008년 베이징올림픽 개막식 음악감독을 맡았고, 그 해에 국내에서도 그의 발레곡 ‘홍등’(2000)이 장이모우의 연출로 공연됐다.

저우룽(1953~)도 1977년 베이징 중앙음악원 입학생이었다. 그는 베이징 출신으로 어린 시절 피아노를 배웠지만, 문화대혁명으로 농장으로 보내져 트랙터를 운전해야 했다. 1983년에 음악원을 졸업한 후, 중국 국립방송교향악단의 상임작곡가가 됐고, 미국 컬럼비아 대학으로 유학했다. 그 학교에는 1946년에 중국을 떠나 에드가르 바레즈(프랑스 출생 미국 작곡가로 음향 기법의 혁신자로 알려져 있음)로부터 배운 저우원중(1923~2019)이 교수로 재직하여 중국 작곡가의 등용문 역할을 했다. 저우룽은 현재 미주리-캔자스 시티 대학 음악원의 작곡과 교수이며, 중국을 소재로 하는 작품을 많이 발표하고 있다. 2011년 그에게 퓰리처 음악상을 안긴 작품은 중국의 전설 ‘백사전’을 소재로 하는 오페라 ‘백사부인’이다. 그의 부인인 천이(1953~)는 작곡가이자 같은 대학의 교수로, 둘이 함께 1839년 아편전쟁을 소재로 한 교향곡 ‘후먼 1839’을 공동 작곡하기도 했다.

문화대혁명 이전에 베이징 중앙음악원과 쌍벽을 이루었던 상하이음악원은 1974년부터 영재들을 발굴하기 시작했으며, 1977년에 정식으로 문을 열었다. 미국에서 작곡가·지휘자·피아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브라이트 셩(1955~)이 1977년 상하이음악원 입학생이었다. 상하이 출신인 그는 네 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지만, 문화대혁명으로 티벳 국경 근처인 칭하이로 보내졌다. 그래도 그는 운이 좋았다. 학교와 칭하이에서 음악 활동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하이음악원을 졸업한 후 1982년에 미국에서 저우원중의 제자가 됐고, 번스타인으로부터 지휘를 배웠다. 그의 음악은 중국적인 제스처가 사용되지만, 클래식 음악으로서의 보편성을 지향한다. 문화대혁명을 표현한 ‘상처’(1987)와 피아노 3중주곡 ‘네 개의 악장’(1990)으로 1989년과 1991년 두 차례나 퓰리처 음악상을 받았다.

그래도 가장 유명한 중국 작곡가는 단연 탄둔(1957~)일 것이다. 그는 중국 남부 후난성의 창샤(长沙) 출신으로, 문화대혁명으로 벼농사를 하면서도 전통악단을 만들어 연주하곤 했다. 그는 1977년에 베이징 중앙음악원에 입학한 26명 중 한 명이었으며, 그도 1986년에 컬럼비아 대학에 유학하여 저우원중을 사사했다. 현재는 뉴욕 소재의 바드 음악원의 학장으로 재직 중이다. 그의 음악은 중국적인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편이며, 어린 시절에 즐겨 들었던 물과 돌로 소리를 내기도 하고, 전통 악기를 비롯한 독특한 악기를 즐겨 사용한다.

 

자유를 찾고, 국경을 넘나들며

문화대혁명을 경험한 세대에게 중국적 제스처는 민족적 정체성과 고통스러운 과거라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지만, 1970년대 이후 세대들은 음악의 성격에 따라 선택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음향적인 의미가 커졌다. 그중 주목받고 있는 작곡가로는 후앙루오(1976~)가 있다.

후앙은 중국 남단 하이난섬 출생으로, 그의 아버지는 작곡가였으나,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이주 당했다. 그는 6세부터 아버지로부터 피아노와 작곡을 배웠으며, 1988년에 상하이음악원에 입학했다. 1995년에 스위스 국제 영화음악제에서 헨리 만시니 상을 받은 후, 미국 오벌린 대학과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공부했다. 2015/16 시즌에는 콘세르트허바우의 첫 상주작곡가가 되는 영예도 얻었다. 그는 중국적인 제스처를 즐겨 사용하지만, 민족적·국가적 정체성을 함의하기보다는 표현 양식의 하나에 가깝다. 후앙은 동서양의 음악을 섞는 것이 아닌, 분리되지 않은 유기적인 단일체를 추구한다고 밝혔다. 이 언급은 오늘날 해외를 바라보며 활동하는 젊은 세대의 중국 작곡가들에게 공통으로 해당할 것이다.

 


04
EDUCATION & COMPETITIONS

글 허서현 기자 사진 베이징 중앙음악원·톈진 줄리아드 스쿨

 

중국 클래식 음악 교육의 현 주소

중국에 간 한국 교수진과 콩쿠르 입상자가 바라본

중국 음악교육의 현장과 도약 분위기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면서 중국의 클래식 음악 교육은 새로운 발전 단계를 맞이하게 된다. 국가 주도의 음악원을 개설하며 음악의 대중화·민족화·혁명화를 위한 3대 운동이 제창된 것도 이때다. 현재 중국 내에 국가가 공인한 음악원(Conservatory)는 총 11개. 대부분의 음악원이 1950년대 전후에 탄생한 배경은 이 때문이다.

중국 내에서는 ‘음악학원(音乐学院)’으로 통칭되는 이곳들은 꾸준히 ‘인해전술’로 다수의 음악가들을 배출해냈다. 쓰촨성 청두시에 위치한 쓰촨음악원은 1만 6천여 명의 재학생이, 상하이음악원은 학부생과 대학원생을 합치면 5천여 명의 학생들이 재학한다. 최근 중국 클래식 음악은 괄목할 만한 성장을 거두고 있다. 2000년대에 들어 공연장·자국 연주자 밀어주기에 힘썼던 정부의 노력에 대한 결실이기도 하다. 이제 국제 콩쿠르 입상자 명단에서 중국인의 이름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거대한 양의 음악 교육 인구 수는 활발한 클래식 음악 시장 운영의 든든한 근거가 됐다. 랑랑의 성공이 불을 지핀 중국의 피아노 붐은,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피아노의 3분의 1이 중국에서 소비되는 기염으로 이어졌다.

이렇듯 꾸준히 쏟아져 나오던 양의 ‘운동 에너지’는 어느새 중국 클래식 음악 발전에 가속도를 싣는 ‘위치 에너지’가 됐다. 이제 더 이상 중국을 클래식의 ‘변방’이라고 생각하긴 어렵다. 빠른 성장세로 클래식 음악의 중심 국가로 들어서고 있는 중국의 음악 교육 역사를 돌아보고, 이들의 도약 방향을 면밀히 살펴보고자 한다.

 

10년 만에 목도한 놀라운 성장세

소프라노 김인혜가 중국에서의 음악 교육을 시작하게 된 것은 2014년. 몇몇 학교에서 마스터클래스와 연주회를 가졌고, 다음 해에 베이징 민족대학 교수로 임명됐다. 현재 중앙음악원에 교수로 재직 중인 그는 처음 중국에 진출했던 2014년과만 비교해보아도 지금의 중국 음악계가 “세계로 진출하는 속도가 빠르게 진전되고 있으며, 가속도가 붙는 걸 느낀다”라고 밝혔다.

 

중국 클래식 음악 교육에서는 피아노가 가장 각광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에서는 피아노·바이올린·성악 등이 주목을 받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물론 그중에서 피아노 분야는 어린 나이부터 교육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 중국 내에서 가장 큰 음악 축제 중 하나인 IMA-Arts 뮤직 페스티벌에 참여했는데, 지난여름 이를 위해 치러진 피아노 콩쿠르에 전국에서 30만 명이 참가했을 정도다. 그중 3천 명만이 상하이에서 본선을 치른 것을 보면, 중국의 피아노 인구가 엄청나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성악에 대한 관심은 어느 정도인가.

중국은 성악 전공이 두 개로 나뉜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벨 칸토 성악 전공과, 전통 민요 성악 전공이 있다. 처음 중국에 와서 놀란 건 성악가와 전통 가수, 그리고 대중 가수의 활동 범위에 차이가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방송에 노출되거나 대중에게 유명세를 인정받은 후엔 대우가 같고, 오히려 전통 가수들이 더욱 인정을 받기도 한다.

 

중국의 클래식 음악 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데에는 어떤 작용들이 있었다고 느끼나.

중국의 역사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간략히 언급하자면 중국의 근대 의식은 신해혁명에서부터 민주공화제의 중화민국이 건설되며 시작됐다고 봐야 할 것 같다. 1920년대 신문화운동이 시작되고, 민중음악이 발전했다. 20세기 초 음악의 대중 운동이 힘을 받았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며 모두가 향유하는 예술을 만들고자 했다. 이때 예술 분야가 대중과 밀접하게 연관을 가지는 분야로 발돋움했다. 서구식 성악 교육으로 시선을 좁히자면, 1970년대에 외국인 교육자가 중국에 들어오게 된다. 그 시작은 상하이음악원이었고, 내 은사님인 줄리아드 음악원의 다니엘 페로(1921~25015)다. 생각해보면 내가 줄리아드 음악원에 입학했던 1985년에, 중국인 최초 학생들이 입학했다. 현재 샤먼대 학장인 메조소프라노 링량, 상하이음악원 교수인 바리톤 케웨왕, 그리고 나까지 세 명이 다니엘 페로의 석사 과정 문화생으로 함께 했었다. 이미 당시 한국인 성악가들, 홍혜경·신영옥·조수미 등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무대로 데뷔했을 때였지만, 중국은 자국의 음악가가 줄리아드 음악원 입학을 처음 했던 것이다. 물론 지금은 줄리아드 음악원 내에 중국인 학생 숫자가 한국인의 두세 배 이상일 것이다. 내 출신 학교만을 예로 들었지만, 여타의 세계적인 음악 대학에서 비슷한 현상을 겪었으리라고 예상한다.

 

국제 콩쿠르에서도 중국인 입상자의 활약은 눈에 띈다. 실제로 중국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느낀 이들의 기질적, 환경적 장점이 있나.

성악은 육체적, 정신적 기질이 중요하다. 육체적 기질을 세 가지로 나눠, 성대(발성)·횡경망 근육(호흡)·전신의 발달(공명통)로 본다면, 중국 학생들에게 중국어에서 오는 특유의 성대 울림을 가지고 있다. 음성이 강하고 화려하다. 물론 서양 언어를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것은 중국 학생들이 가장 필요한 발전의 부분이다.

 

한국과의 음악 교육 교류도 매년 증가하고 있다. 국내 음악 대학에도 중국인 유학생들이 늘어나고 있는데.

최근의 양상을 보며 무척 놀랐다. 일례로 한양대 음악대학에 100여 명의 중국인 유학생들이 공부하고 있기도 하다. 나도 중국에서 지도한 여러 제자를 한국의 대학, 특히 박사과정 유학으로 많이 추천하고 있다. 사실 중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전국 11개에 불과한 음악원에 입학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처럼 힘들다. 상위권 음악 대학 입학도 경쟁률은 거의 불가능일 정도로 높은 편이고, 각 도시의 유명 대학 경쟁률도 수천 대 일이 일반적이다. 최근 한국 성악가들의 세계적인 활약을 지켜보는 중국의 학생들이 한국의 음악대학에 눈을 돌리는 것은 어찌 보면 아주 자연스럽고 바람직하다.

 

앞으로 중국과 한국의 음악 교육의 교류에 대해 전망하는 바가 있다면.

현재 중국 정부는 외국 연예인의 활동을 전면 금지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외국인 전문가(화궈쫜좌) 청빙 제도는 매우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클래식 음악은 외국인 전문가가 정말 필요한 분야로, 성악 분야에서도 성악 코치·지휘자·연주자 등의 지속적인 활약이 필요하다. 교육자로서, 또한 성악가로서 40년 가까이 활동하면서 성악 교육이 마치 불치의 병을 치료하는 의사처럼 각 개인에 맞는 과정을 찾는 어려운 과정임을 알게 됐다. 맞춤형 교육이라는 어려운 점이 있지만, 좋은 교육이 우수한 예술가를 탄생시킨다. 앞으로 더 많은 중국 성악도들이 한국에서 유수의 교수진들에게 교육을 받을 수 있기를 고대한다. 또한 한-중의 문화 교류도 활발히 유지되어, 양국의 문화예술 분야의 발전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

 

 

베이징 중앙 음악원

톈진 줄리아드 스쿨

칭다오 예후디 메뉴인 학교

상하이음악원

쓰촨음악원

톈진 줄리아드 스쿨

 

 

 

 

 

 

 

 

 

 

 

 

 

국제적 수준으로 성장하는 중국 교육계

중국 내 음악원이 외국인 스승들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을 표명하며, 중국의 클래식 음악 교육에 대한 한국의 관심도 높아졌다. 이제 중국에서의 활동은 ‘중국 속’으로가 아닌, ‘중국을 거쳐 밖으로 나갈’ 방향성을 띠게 됐다. 한국의 젊은 음악가들도 중국에서의 활동에 적극적이다. 첼리스트 임희영도 그 중 한명이다. 야닉 네제 세갱이 이끄는 네덜란드의 로테르담 필하모닉에서 수석으로 활발히 활동하던 그는, 공채 오디션을 거쳐 이곳에서의 교수직을 시작하게 됐다. 재직 중이던 로테르담 필하모닉이 한국·인도네시아·중국을 거치는 아시아 투어를 나섰고, 베이징 공연 당시에 중앙음악원에서 마스터클래스를 하면서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2018년 중국 음악원 교수로 부임해 현재 6년째 재직 중이다.

“20대부터 항상 어디에서 직장을 잡고 살지에 대한 현실적인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저는 좋은 기회가 찾아오기를 기다리기보다, 스스로 앞길을 개척한 케이스거든요. 물론 저도 한국 사람이니 고국이 좋지만, 직업적 커리어를 최대한 살리다보니 해외에 오래 머물게 됐습니다. 특히, 첼로는 한국의 경우 한 대학교에 교수가 한두 명이 전부니 자리가 많이 없는 것 같아요.”

중앙음악원은 정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만큼, 소속된 부설 초등·중등·고등학교 교육 과정이 있다. 우리나라의 예원학교나 예술고등학교의 개념인, 소위 ‘엘리트’ 코스다. 현재 중앙음악원에도 미국·캐나다·호주·프랑스·일본·인도네시아·우크라이나·멕시코 등 다양한 국가 출신의 학생들이 재학 중이다. 중앙음악원을 거친 중국 음악가들은 세계 곳곳의 오케스트라에 포진되어 있다. 베를린 슈타츠카펠레 호른 수석 윤젱, 베를린 필 비올라 수석 디양 메이, 미국 뉴저지 심포니 음악감독 셴장 등이 그 대표적인 예다.

“가끔 ‘뭐하러 굳이 중국을 가느냐’고 말 하시는 분들도 있죠. 하지만 음악은 세계 공통어라는 말이 있듯, 음악가가 어디에 사는지 중요한 것 같지 않아요. 그리고 흔히 한국에서 가진 인식과는 다르게 중국의 음악 시장은 인재풀이 만만치 않습니다. 외국인이 정식으로 정부에 고용되려면, 전 직장에서의 취업 경험과 추천서가 꼭 있어야 하거든요. 저 역시 야닉 네제 세갱이 직접 쓴 추천서와 취업 서류를 들고 왔고요. 로테르담 필하모닉에서의 경험이 없었다면 지금의 학교에 오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겁니다. 일찍부터 후학을 양성하는 교수를 꿈 꿨던 제게 중앙음악원의 자리는 바라던 기회였어요. 재능과 열정 있는 학생들과 함께하고 있고, 제 예상보다 제 삶에 훨씬 더 좋은 영향을 끼치고 있어 보람을 느낍니다.”

 

클래식 음악의 미래는 중국에?

2019년 베이징에서 열린 중국 음악 콩쿠르(CIMC)가 전 세계적인 화제를 모았다. 이유는 다름 아닌 우승 상금의 액수 때문. 중국 음악 콩쿠르는 올해도 11월에 바이올린 부문을 진행한다. 1위를 수상하면 10만 달러, 한화로 1억 3천만 원에 달하는 상금을 받는다. 이외에도 상하이·칭다오·닝보 등에서 새로운 콩쿠르들이 속속들이 생겨나고 있다.

중국 음악 교육에 대한 집중도는 유럽에서도 화제다. 2018년 예후디 메뉴인 학교가 칭다오에, 2019년 줄리아드 음악원이 톈진에 각각 학교로 향하는 또 다른 문을 연 것이 그 증거 중 하나다. 중국에서 과정을 밟으면, 미국에서의 학위와 동일한 인정을 받게 된다. 퍼커셔니스트 한문경·첼리스트 김연진·하피스트 김경희가 톈진 줄리아드 스쿨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올해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한 첼리스트 이영은 또한 톈진 줄리아드 스쿨에 재학 중이다.

 

중국 음악 교육계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교수들

김인혜

 

김인혜(1962~) 서울대학교를 졸업학고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석사·박사 과정을 마쳤다. 숙명여대·서울대·인제대 교수를 역임했으며, 빈 말러 음악원 교수로 재직한 바 있다. 현재 중앙음악원의 교수로 재직 중이며 중국의 톈진 음악원·시안 음악원·중국 음악원 초청 교수, 베이징 민족 대학 정교수를 역임했다.

 

 

 

 

 

임희영

중앙음악원의 임희영 수업 모습

임희영(1987~) 네덜란드 로테르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수석을 역임하고, 현재 중앙음악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18년 대한민국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표창을 수상한 바 있으며 워싱턴 콩쿠르 1위, 루토슬라브스키 3위를 비롯 케네디센터·카네기홀·콘세르트허바우 등에서 연주했다. 다수의 정규 앨범을 발매한 바 있다.

 

 

 

 

MINI INTERVIEW

바이올리니스트 최정민의 중국 인상기

중국 앨리스 앤 엘레노어 쇤펠트 현악 콩쿠르 우승

최정민

바이올리니스트 우승자인 최정민은 엘마 올 리비에라 콩쿠르, 마이클 힐 콩쿠르 등에 입상했으며, 커티스 음악원·뉴잉글랜드 음악원·클리블랜드 음악원을 거쳐 현대 도쿄 음악대학 최고연주자 과정에 재학 중이다.

 

지난 9월, 1위를 수상했다. 콩쿠르 도전 계기는 무엇이었나.

콩쿠르를 찾던 중, 이 콩쿠르가 미국인 자매 앨리스와 엘레노어 쇤펠트를 기리기 위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쇤펠트 자매는 음악 교육을 통해 문화교류를 이루고, 동서양이 하나가 되는 것을 지향했다. 미국인 연주자들이지만, 중국에서 콩쿠르가 개최된다는 점이 흥미로웠고 또한 이들의 철학을 지지하기에 지원했다.

콩쿠르가 중국 하얼빈에서 열렸는데.

하얼빈은 유네스코 지정 음악도시이고, 1908년 창단된 하얼빈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중국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곳이다. 하얼빈 정부 협력으로 세계국제콩쿠르연맹(WFIMC) 총회도 이곳에서 개최되고 있다. 실제 콩쿠르 현장에도 많은 관료들이 관람을 하는 등 정부가 음악에 대해 가지고 있는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쇤펠트 콩쿠르 파이널 라운드 ©Alice/Eleonore Schoenfeld International String Competition

결선은 하얼빈 콘서트홀에서, 갈라 콘서트는 하얼빈 대극장에서 개최됐다. 연주 당시 기억에 남는 것은.

중국은 유럽에 비해 관객 연령 층이 젊다. 특히 갈라 콘서트 관객들의 뜨거운 반응이 인상적이었다. 각 홀의 음향과 시설 모두 좋았고, 도시가 음악 발전을 위해 다각도로 투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번 콩쿠르 참여를 통해, 중국 클래식 음악 시장의 성장 가능성을 엿본 부분이 있었다면.

콩쿠르가 ‘ConGioia’라는 사이트를 통해 실시간으로 중계되었는데, 생중계 동시 접속자 수가 3천 여 명까지 올랐다. 중국 클래식 음악 관심도가 높다는 것을 느꼈다.

 

 

 


05
TRADITIONAL ART

글 전인평(한국음악평론가협회 회장·중앙대 명예교수)

사진 국립창극단

 

중국의 전통과 미학을 품은 고전,

경극과 금곡(琴曲)의 부활

아직도 인기 많은 경극과 금곡(琴曲)으로 살펴보는 중국의 전통음악

 

중국은 넓은 국토에 한족과 55개의 소수민족이 함께 살아가는 다양한 문화의 나라이다. 마오쩌둥 시대에 공산당 정부는 선전 도구로 전통음악을 활용했다. 서양음악보다 전통음악이 지방민에게 훨씬 쉽게 파고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음악은 모름지기 대중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공산당의 방침은 전통음악을 새롭게 변모시켰다. 전국에 수많은 악단·극단·무용단 등이 국영으로 운영되었으며, 지방마다 예술학교를 설립해 직장 분배 제도에 따라 졸업생들이 100% 취업할 수 있는 제도가 운용되었다. 그로 인해 이전까지 사회적으로 낮은 지위의 차별 대우를 받던 음악인들은 예술가로 대접받게 되었고, 안정적인 직업인으로서의 활동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2010년대 중국의 시장경제 체제 전환으로 급변했다. 예술학교의 직장 분배 제도는 사라졌고, 졸업생은 스스로 직장을 찾아야 했다. 서양음악의 영향을 받은 대중음악이 성행하며 전통음악은 점차 움츠러들게 되었다. 다행인 점은 지방 정부에서 민족악단을 지원하고, 강남(양쯔강 이남)지방의 월극(越劇)이나 스촨지방의 천극(川劇) 같은 전통 지방 희극단을 육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 각 성(省)의 민족악단은 과감하게 서양음악의 화음을 사용하고, 성악 전공자를 단원으로 영입해 무대의 성격을 기악 중심에서 종합 무대로 꾸며가고 있다. 이는 청중의 이해도를 높이기 위한 것으로,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다음에 설명할 경극과 금(琴) 음악은 중국의 시장경제 체제 전환 이후에도 살아남은 전통예술이다.

 

예술성과 대중성을 아우른 ‘패왕별희’

경극은 예술성과 대중성을 확보한 전 세계를 통틀어 유례없는 종합극이다. 중국의 서사 음악 교육은 희극학원(戲劇學院)이라는 전문 교육 기관이 담당하고 있다. 특히, 경극은 하루 종일 경극만 방송하는 TV 채널이 있을 정도로 중국 내에서 인기가 높다.

오늘날까지 상연되고 있는 경극 ‘패왕별희’를 살펴보자. ‘패왕별희’의 주인공 항우는 한신의 모략에 빠져 포위당한다. 이때 항우의 초(楚)나라 군사들은 사방에서 들리는 초나라 노랫소리에 크게 동요한다. 고립무원의 절망적 상태를 나타내는 ‘사면초가(四面楚歌)’라는 고사성어는 이러한 상황에서 생겨난 말이다. 애첩 우희와 항우의 이별 장면은 압권이다. “대왕이시어, 검을 주소서” “절대 안 되오” “대왕이시어, 어서 검을 주소서” “절대 안 되오, 안 되오” 우희는 항우의 간절한 만류를 뿌리치고, 칼춤을 추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어 홀로 탈출한 항우도 결국 오강(烏江)에서 자결한다.

경극에는 사랑과 이별, 삶과 죽음, 우정과 배신 등 인간 세상에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이 녹아있다. 경극 속 사건들은 애달픈 사랑과 권력의 무상함, 그리고 인간사의 덧없음으로 사람들의 가슴을 휘저어 놓는다. 그리고 관객은 ‘인간은 하늘의 뜻을 거스를 수 없다’는 겸허함을 배운다. 경극은 중국인들의 마음을 휘어잡는 전통예술 중 하나인데 이는 표현력이 높은 서사 음악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대를 압도하는 무예 기술과 서커스에서나 볼 수 있는 고난도의 기교가 관객을 홀린다.

경극은 본래 남자 배우들의 공연이었다. 가녀린 여성 역할도 남자 배우가 맡아야 하므로 경극 배우들은 어릴 때부터 본인이 남성이라는 점을 잊을 정도로 여성으로 길러지고 교육받았다. 천카이거 감독의 영화 ‘패왕별희’(1993)에서도 우희 역을 맡아 어려서부터 여성성을 강요받은 ‘두지’(장국영)는 패왕 역을 맡은 동성의 ‘시투’(장풍의)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시투가 여인 ‘주샨’(공리)과 결혼하자 그녀를 질투하게 된다. 영화는 고사 ‘사면초가’ 속 비극적 결말처럼 경극 ‘패왕별희’의 항우와 우희를 연기한 두지와 시투의 사랑과 질투를 그린다.

 

고색창연한 금(琴) 음악 ‘광릉산’

중국 전통악기 금(琴)

경극이 대중적인 음악이라면 금 음악은 고고한 선비 음악으로, 공자도 즐겨 연주하던 곡이다. 금 음악은 고색창연한 전통곡으로 오늘날까지 이어져 위나라 죽림칠현의 영수 혜강(223~262)의 철학 사상과 전통을 잘 유지하고 있는 음악이다.

혜강은 ‘금부(琴賻)’에서 금의 연주법(彈法)을 매우 세밀하고 살아 움직이듯이 설명했다. 예를 들어 빠르게 뜯는 쾌탄(快彈)이란, ‘섬섬옥수를 날려 치달리듯(飛纖指以馳) 빠르게 뜯는 연주법’이고, 두 현을 동시에 뜯는 양현동탄(兩弦同彈)은 ‘두 미인이 나란히 나아가 빠르게 치닫듯이 연주하는 탄법’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고대 중국의 대표적인 악곡은 혜강의 ‘광릉산(廣陵散)’이다. 이 곡은 혜강이 즐겨 연주한 음악으로 그가 참수되기 전에 연주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광릉산’은 유명하여 부자들이 십만 금을 내놓고 한번 듣기를 청할 정도였는데, 이때 혜강은 ‘개 귀에는 똥소리가 걸맞다’라며 거절하였다. 죽림칠현의 일원인 산도(205~283)가 공직에 뜻이 없던 혜강을 이부상서에 추천하자 그는 산도에게 절교의 편지를 보내는데 이것이 빌미가 되어 혜강은 사형당하게 되었다. 그 편지는 친구에게 보내는 형식이었으나, 사실 당시 집권층을 비난하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혜강은 참수되기 직전 고관들이 그토록 듣기를 바라던 ‘광릉산’을 연주하였는데, 죽기 직전 그는 “너희들 들으라고 연주한 줄 아느냐? 저승 가는 길동무를 위해 한 곡 연주한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금(琴)은 중국 공산당의 악기 개량 사업에도 불구하고 용하게도 전통을 온전히 유지하였다. 그래서 중국의 유구한 철학 사상과 예악 사상을 잘 묘사할 수 있는 악기로 남았다. 한국에서는 금의 철학 사상이 거문고 음악에 실려 선비 악기로 발전하며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처럼 경극과 금 음악은 중국을 대표하는 극음악으로 자리를 잡았다. 일본을 대표하는 극음악으로는 전통 연극 노(能)와 가부키(歌舞伎)가 있다. 일본의 국립극장에서는 전통예술 작품을 일 년 내내 공연한다. 그러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극음악은 무엇이 있을까? ‘우리 것이 좋은 것’이라는 국수주의에 기대지 말고, 예술 자체로 사람을 휘어잡는 작품을 남겨야 하지 않을까. 먼 훗날, 우리 후손들이 현대의 사람들은 무엇을 남겼느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국립창극단 ‘패왕별희’

국립창극단 ‘패왕별희’

 

 

 

 

 

 

 

Performance information

국립창극단 ‘패왕별희’

11월 11~18일 국립극장 해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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