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WAY
작곡가 이신우
가지 않은 길
그리고 이제 걸어갈 길
본인의 과거와 현재,
작곡계의 전세대와 후세대를 연결하는 작품 발표회
이신우(1969~) 서울대 작곡과에서 강석희를 사사, 영국 왕립 음악원, 런던대학교, 서식스 대학에서 마이클 피니시를 사사했다. 가우데아무스 작곡콩쿠르, 레너드번스타인 예루살렘 작곡 콩쿠르 등에 입선했고, 대한민국작곡상·안익태작곡상·난파음악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서울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예술이 문화적 산물이라면, 그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과 닮아있을 것이다. 우리가 느끼는 고통과 슬픔, 위로와 위안, 그리고 기쁨과 사랑 등. 그런 점에서, 작곡가 이신우의 음악은 우리의 삶과 닮아있다. 과장되지 않은 서정으로 음악적 서사를 풀어가기에, 그의 음악은 자연스레 인간의 보편과 본성, 그리고 근원에 다가간다. 팬데믹을 겪으면서도 작곡·녹음·출반을 했지만, 하지 못했던 것 하나, 바로 미뤄둔 공연 ‘가지 않은 길 I’을 이제 시작한다.
팬데믹이 한창일 때 ‘죽음과 헌정’ 음반 녹음을 진행했는데 이제야 현장에서 관객과 만날 수 있게 되어 감회가 새롭겠습니다.
연구년이었던 2020년 2월에 영국에 도착했고, 4월에 코로나로 영국 전역이 봉쇄됐습니다. 덕분에 세상의 소리들이 정지됐고, 홀로 내면의 소리에 집중할 수 있었죠. 이 시기에 네 작품을 썼고 기존에 있던 작품과 함께 이듬해 8월 녹음해서 12월에 음반을 발매했습니다. 그리고 2년의 기다림 끝에 이번 공연이 성사됐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기다림이 없었더라면, 단순히 음반 발매 기념음악회로 끝나 버렸을 겁니다. 길이 잘 열리지 않을 때 기다릴 줄 아는 지혜가 생겼습니다.
작곡, 무한한 창조주에게 뛰어드는 일
지금까지 기독교와 관련한 작품들을 발표해 왔습니다. 이러한 주제 의식이 음악 언어에 영향을 끼쳤다는 생각이 듭니다.
생애 전환점은 ‘시편 20편’(1994~1996, 개작 1998)으로부터 ‘애가(愛歌)’(1999, 개작 2021)에 걸쳐있었던 것 같습니다. 1994년 런던에서 참가한 요한복음 성경공부는 제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저는 이 사건을 기독교에의 귀의라기보다는 진리와의 만남, 발견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이 변화로 인해 기존에 제가 썼던 음색·짜임새·구조·강세 등, 음악 요소 자체를 탐구했던 어법으로는 새롭게 발견한 세계를 담을 수 없었죠. 그러므로 ‘애가’에서 거의 저 자신 내면의 정직한 소리를 따라, 직관에 의존해 나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의 과정은 제가 하는 이 음악 행위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가치가 있는지, 스스로 의문을 품고 미학·철학·인문학·예술 등을 공부하며 음악어법을 탐구하는데 주력했던 시기였습니다. 20세기 서구 현대음악의 미학에서 튕겨 나와 용감하게 홀로 선, 일종의 저항이었죠.
진리를 표현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이번 공연 첫 대화 주제가 ‘놓아버림(letting go)’입니다. 보다 정확히는 에고(ego)로 집중된 시선을 뒤로 물러서 관찰자의 시점으로 바꾸는 것이죠. 저는 개인적으로 에고에 함몰되어서는 온전한 창조력에 닿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에고의 두려움, 욕망을 내려놓고 우리 존재의 근원으로부터 오는 순수한 창조성을 포착하고, 이 에너지가 온전히 창작자의 몸과 마음을 통해 음악으로 발현될 수 있도록 놓아버리는 것이죠. 아무리 탁월하다고 해도 인간의 에고적 관점에서 나온 작품은 우리를 흥분시키거나 감탄하게 할 수는 있어도, 우리 존재 자체를 뒤흔드는 진정한 감동을 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온 존재를 열어, 에고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무한한 우주, 창조주에게로 뛰어드는 것,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창작의 원리이자 신비입니다.
분명한 의미를 갖고 있으면서도 작품은 주로 가사가 없는 기악곡입니다. 가사를 통해 의미를 직접 전달하지 않는 이유가 있을까요?
저와 세계관을 같이 하는 연주자들을 만나 작품을 함께 해왔는데 유독 성악가들과는 인연이 깊게 닿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추구하는 세계를 기악으로 주로 작곡하게 됐네요. 예외적으로 2019년에 초연한 ‘네 개의 탄식의 노래’는 소프라노 유현아와 함께 한 작품입니다. 언젠가 다른 작품으로 다시 만날 수 있으면 하는 바람도 갖고 있습니다.
작품 목록에서 유독 현악기와 피아노가 눈에 띕니다.
현악기와 피아노가 인간의 깊은 내적, 영적 측면까지도 전달할 수 있는 악기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소리의 물리적 특질을 넘어 인간의 내적 세계, 심리, 철학, 정신성, 영성 등을 음악에 실어 탐구해 보는 게 현재 제 큰 관심사 중 하나입니다.
한 생(生)을 통해 삶의 진리를 탐구하다
이번 공연의 제목 ‘가지 않은 길’에는 이러한 관심사를 좇은 자전적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애가’가 세상에 다시 나오는 데 22년이 걸렸습니다. 초연 후 제가 확신이 없어 다시 꺼내지 않았기 때문이죠. 내년 2월 아르코창작음악제에서 연주될 제 바이올린 협주곡 ‘보이지 않는 손’ 역시 2000년에 초연된 후 2002년에 3악장을 추가했고, 지금 내년 연주를 위해 3악장을 대폭 수정하고 있습니다. 인생을 통한 성숙과 깨달음이 전제가 되어야 나오는 음악 세계를 추구하다 보니 이리 되었습니다. 제가 추구하는 세계는 ‘느림’과 ‘깊음’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세계일지도요.
‘가지 않은 길’ 시리즈의 첫 주제가 삶의 마지막인 ‘죽음’이라는 것은 다소 충격적입니다. 첫 시리즈의 주제를 이렇게 정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를 정할 당시 코로나로 죽어가는 사람들로 뉴스가 도배됐는데, 그때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로부터 4년 정도 역사·철학·심리학·종교·신화 등 독서로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우주에 있어서 죽음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다. 생명이 있다는 게 오히려 놀라운 일이다”라는 어느 물리학자의 이야기가 이번 공연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죽음을 통찰해 보는 것으로 오히려 현재 우리가 당연하다 여기고 있는 ‘생명’이라는 경이로운 현상을 감탄과 감사로 전환하는 것이죠.
이 공연에서는 ‘시편창’(2016)의 재연과 함께 ‘죽음과 헌정’(2020)이 초연됩니다. 초연곡은 평양에 당도하자마자 죽임을 당한 선교사 로버트 저메인 토머스(1840~1866)에 대한 곡인데, 어떤 작품인가요?
2020년에 런던 내셔널 오페라 스튜디오의 초청으로 ‘12:42’라는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가상 오페라 ‘레드북’ 중 바리톤 아리아 ‘사랑하는 이여, 들으소서(Hear me, my beloved)’를 작곡했습니다. 이 아리아가 로버트 저메인 토머스 선교사의 마지막 순간을 담은 곡이었습니다. 당시 토머스는 신혼의 아내를 중국 땅에서 풍토병으로 잃고도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조선으로 향했다가 1866년 대동강가에서 죽임을 당했는데, 이것이 제게 큰 의문점이었습니다. 그를 낯선 땅, 조선으로 가게 한 힘이 무엇이었을까요? 그 의문이 ‘죽음과 헌정’을 낳게 한 결정적 동기였습니다. 극적 서사가 없는 대신 한 인간이 가진 삶의 가치들을 7개의 짧은 악장에서 파토스적으로 토해내는 걸로 포착해 보려 했습니다. 한 웨일스 청년이 온몸으로 세상에 남긴 메시지, 죽음으로 세상에 내던져진 그의 존재, ‘헌정(offering)’입니다.
서로가 만나 생긴 ‘케미스트리’
첼리스트 제임스 김과 피아니스트 일리야 라쉬콥스키와의 협업은 어땠는지요.
제임스 김과는 2019년 세종솔로이스츠가 연주한 저의 교향시 ‘여민락’을 함께 하며 알게 됐습니다. 그는 통찰력이 뛰어난 연주자일 뿐만 아니라 소리에 대한 실험과 훈련을 통해 다양한 질감과 볼륨, 표현으로 제 음악 세계를 첼로로 구현할 수 있는 역량을 지녔습니다. 무엇보다 밀도 높은 신작 세 곡을 제임스 김 혼자 소화하는 게 놀랍습니다. 일리야 라쉬콥스키는 바이올리니스트 박지윤의 음반(DUX)에서 제 ‘시편 소나타’를 녹음한 바 있습니다. 소리와 표현의 팔레트가 무척 넓어서 ‘죽음과 헌정’에 다양한 표정을 입혀 입체적이고도 장대한 규모로 구현해 주었습니다.
김승연의 첼로 소나타 1번 ‘경야’가 전지훈의 피아노로 위촉 초연됩니다. 이는 이 음악회가 개인의 작품 발표회를 뛰어넘음을 의미합니다. 김승연 작곡가에 대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김승연은 철학에 대한 방대한 바탕으로 인지에 기반한 음향적 심상과 구조화된 시간 속 인간존재를 탐구하고 있는 작곡가입니다. 외적 화려함과 기술의 진보, 급변하는 시류에 맞서서 자기 정체성을 지켜내려 애쓰는 젊은 작곡가들이 있죠. 그들의 고유한 목소리를 세상에 낼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이 길을 먼저 간 선배로서 제 책무가 아닐는지요. 한편으로는 아직 저만 알고 있는 숨겨진 보석을 세상에 알리는 기분이기도 합니다.
이번 공연에서는 연주되지 않지만 ‘죽음과 헌정’ 음반에 수록된 첼로와 전자음악을 위한 ‘짜릿하게’(2021)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평소 작품과 다른 스타일이 느껴졌어요.
당시 판소리를 소재로 한 카프리스 2번 ‘적벽’이 KBS FM에서 음반으로 나온 상태였습니다. 비올리스트 이화윤을 위해 쓴 곡인데, 어릴 적 판소리를 배운 그의 이력에 착안해 판소리를 소재로 작곡했습니다. 반응이 무척 좋았죠. 그래서 제임스 김에게 ‘클래식 음악 외에 어떤 장르를 주로 듣는지, 무엇에 관심 있는지’도 물었어요. 그때 돌아온 대답이 힙합이었고 제가 그만 경솔하게도(?) 바로 ‘오케이’를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아, 그리고 곡에 카덴차 같은 부분이 있는데 이 부분은 제임스가 직접 작곡한 겁니다. 솔직히 이런 스타일의 작품을 다시 할지는 모르겠습니다. 시도해 본 것만으로도 충분히 신나고 즐거웠습니다.
‘가지 않은 길’ 시리즈는 앞으로 어떻게 진행되나요?
당분간은 이번 공연과 동일한 방식으로 가려 합니다. 내년 12월 10일 예술의전당 IBK챔버홀에 예정된 ‘달항아리를 위한 시’는 비올리스트 이화윤과 피아니스트 고은이 외에 작곡가 김새암과 피아니스트 윤정은이 함께합니다. 2025년은 바이올리니스트 한수진과 공연이 예정되어 있고 작곡가 정연호에게 작품을 위촉한 상태입니다.
글 송주호(음악 칼럼니스트)
PERFORMANCE INFORMATION
이신우 작곡 시리즈 ‘가지 않은 길Ⅰ’
12월 12일 오후 7시 30분 예술의전당 IBK챔버홀
이신우 ‘놓아버림’ ‘죽음과 헌정’, 김승연 ‘마음과 시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