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스바리톤 사무엘 윤, 오페라 가수의 21세기 확장판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4년 10월 21일 9:0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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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가수의 21세기 확장판

베이스바리톤 사무엘 윤

 

예술의전당 보컬 마스터 시리즈의 세 번째 주인공. 종합 무대 예술을 꿈꾸다

 

 

사무엘 윤의 일정은 촘촘하고 바쁘다. 2022년 둥지를 튼 서울대 교수 생활을 이어가면서도 지난 5월에 음반 ‘From Darkness to Light’를 출시했다. 4월에는 대구오페라하우스에서 ‘파우스트’를, 9월엔 서울시오페라단 ‘토스카’ 등의 굵직한 명작을 소화했다. 강릉시향의 ‘가곡의 밤’(10.24), 국립합창단의 ‘전쟁 미사’(11.8·19) 등 국공립단체의 공연에도 협연자로 오른다. 다양한 무대에서 목소리를 뿜어내고 있는 그는 현재 예술의전당 ‘보컬 마스터 시리즈’(11.16)를 위한 특별한 무대를 준비 중이다.

2012년 바그너 음악의 성지인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데뷔한 이후 그는 바그너가 음악으로 이루고자 했던 ‘총체 예술(Gesamt-kunstwerk)’를 늘 잊지 않고 있다. 이를 반영하듯 그는 모든 장르를 아우르는 유연성과 적응력을 보여주며, 국내 성악계의 문화를 바꾸고 있다.

그런 그를 볼 때마다 인간의 신체가 ‘항상성’을 유지한다는 생각이 떠오른다. 외부의 환경이 변해도, 몸의 기능을 계속 유지한다 는 성질 때문이다. 독일에서 한국으로, 오페라 극장에서 대학으로 환경을 바꾼 사무엘 윤의 삶도 항상성을 유지 중인 듯하다. 보이는 것은 변했지만, 이를 수행하는 사무엘 윤 자체는 여전하다. 관객에게 감동이 될 노래를 부르기 위해 고민하고, 도움이 필요한 학생들을 살피는 삶. 어찌 보면 그의 삶에 찾아온 변화는, ‘변화’보다 ‘진화’에 가까운 확장이다. 앞으로 어떤 무대가 펼쳐질지, 하반기에 ‘사무엘 윤’의 공연만 잘 챙겨보아도 우리는 발전하는 성악의 현주소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노래 이상의 가르침

2022년, 사무엘 윤은 23년간의 쾰른 극장 생활을 접고 한국에 돌아왔다. 이유는 딱 한 가지,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그는 2년째, 서울대 음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엄격한 선생인 편이죠. 학생들이 악보에 단어 뜻, 의역 버전 가사, 발음 기호를 빼곡히 적어 오지 않으면 레슨을 안 해주니까요. 재능이 많은 학생일수록, 더 엄하게 해요. 반면 노래가 잘 안되고 자존감이 떨어진 친구들한테는 한없이 부드럽답니다.(웃음) 유럽 극장 가수 시절, 수많은 유학생의 노래를 들어주며 생긴 노하우죠.”

후배 음악가들에 대한 그의 각별한 관심은 이미 잘 알려져 있었다. 공연을 위해 유럽 곳곳의 도시를 방문할 때면 그 지역의 한국 유학생들 사이에는 ‘사무엘 윤 선생님이 지난번처럼 극장 연습실에서 노래 들어 주신다’는 소문이 돌았다. 수십 명의 유학생이 모였고, 오전 11시에 시작한 레슨은 다음 날 새벽이 되어야 끝나기도 했다. 레슨비는 받지 않았다. 독일 입시에 실패하고 6개월간 집 밖에도 나오지 않던 유학생들도 모자를 푹 눌러쓰곤 사무엘 윤을 찾아왔다.

“그런 친구들의 노래는 한 시간이 넘도록 들어줬어요. 그래도 유학을 오는 20대 중반은 이미 삶과 음악에 대한 개념이 정착된 상태라 도와주는 데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최소한 대학생 때부터는 음악가로 잘 준비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느꼈죠. 교직 생활을 시작한 지금, 학생들에게 음악가가 되기 위해 늘 강조하는 것은 ‘타인에 대한 배려’입니다. 내가 아닌 관객을 위해 노래한다면, 더 좋은 발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무대도 철저하게 준비하게 될 것이라고요.” 등

 

새로운 무대를 만들다

마포문화재단 ‘M 연가곡 시리즈’(2024) © 마포문화재단

‘관객을 위해 노래하라’는 가르침은, 사무엘 윤 자신도 실천 중인 가치다. 귀국 후 그가 선보인 공연들에는 관객을 위한 고민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2023년, 국제 무대 데뷔 25주년 기념으로 선보인 콘서트는 그 신호탄이었다. 1부는 독일 가곡을 오케스트라 버전으로 편곡했고, 곡 사이를 박수 없이 연결해서 하나의 스토리로 만들었다. 2부는 오페라 아리아들에, 사무엘 윤만의 몰입도 높은 연기와 연출을 더했다. 지난 5월에는, 공연명과 동명의 음반 ‘From Darkness to Light’가 데카 레이블에서 발매됐다.

“물론 최선을 다해 만든 음반이지만, 영상물이었으면 더 좋았겠다고 생각해요. 제가 구상한 것을 모두 보여드리기 위해서는 무대가 꼭 필요하거든요. 단순히 오페라 아리아만을 나열해서 부르는 형태가 아닌, 스토리와 연출이 있는 공연은 ‘앞으로 사무엘 윤이 한국에서 보여줄 것은 이런 것이다’라는 소개였습니다.”

관객이 즐길 성악 공연이 다양하지 못하다는 것. 사무엘 윤이 귀국 후 국내 공연계에서 처음 느낀 인상이었다. 오페라는 어렵고, 가곡은 지루한 초심 관객을 위해 볼거리가 많은 공연을 기획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처음 탄생한 공연이 바리톤 김기훈과 함께한 듀오 콘서트 ‘도플갱어’(2022.9.27/마포아트센터)였다. 한 곡 안에서 소절을 나눠 불러 정말 두 사람이 도플갱어처럼 보이도록 연출했다. 관객은 숨죽이며 두 사람의 노래에 몰입했다. 공연은 성공적이었다. 지금도 사무엘 윤이 공연하는 곳에는 “도플갱어 공연 또 언제 해줄 거냐”며 찾아오는 팬들이 있다고.

“올해 마포문화재단 ‘M 연가곡 시리즈’(2024.7.19/마포아트센터)에서는 무용수도 등장했어요. 베토벤의 연가곡 ‘멀리 있는 연인에게’를 제목으로, 여러 시대 작곡가의 성악곡은 물론 피아노 독주까지 배치했죠. 이 모든 작업은 클래식 음악이라는 장르를 파괴하지 않은 선에서 가능합니다. 아주 깊고 넓은 바다처럼, 클래식 음악 속엔 우리가 아직 손도 대지 않은 레퍼토리들이 무궁무진합니다. 이런 공연의 기획을 전적으로 지지해 준 마포문화재단에도 박수를 보내드리고 싶고, 제게 기회가 주어진 만큼 더 많은 작품을 연구하고 선보이고 싶습니다. 종합 예술로서의 성악 공연은, 앞으로도 계속 시리즈로 이어갈 계획입니다.”

 

종합 예술을 완성하는 힘

From Darkness to Light DECCA 4876310

독일어권 최고 영예인 캄머쟁어(궁정가수)이자 쾰른 극장의 종신 가수,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주역으로 화제를 모으며 유럽의 극장을 종횡무진한 오페라 가수. 사무엘 윤을 빛냈던 수식어들이다. 새로운 공연을 기획하는 일에 ‘굳이’ 도전하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하다. ‘그럼에도’ 그를 늦깎이 성악도에서 바이로이트의 주역으로까지 끌어올린 열정은 여전히 뜨겁다.

“저도 처음에는 이런저런 걱정이 들었죠. 사람들이 과연 이런 시도를 좋아할까? 지금까지 쌓아온 것들을 무너뜨리는 것 아닐까? ‘굳이 왜 저런 걸 하냐’고 말할 수도 있을 테죠. 그러나 누군가는 창조적인 생각을 하고, 모험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더 좋은 공연 창작 여건이 앞으로의 성악가들에게 주어질 수 있고요.”

그리고 이 모든 아이디어의 시초에는, 오랜 기간 바그너 오페라에 정통한 성악가로서 활동했던 사무엘 윤의 음악적 깨달음이 녹아있다. 바그너가 1849년, ‘미래의 예술 작품’이라는 글을 통해 제시한 ‘총체 예술(Gesamtkunst-werk)’. 기존의 오페라가 음악 중심의 악극이었다면, 바그너는 시와 음악, 여기에 무용과 무대 미술, 무대 기술까지를 모두 아우르는 종합 예술 작품을 꿈꿨다.

“바그너의 오페라를 수없이, 심지어는 한 오페라 안에서는 세 가지 역할을 모두 소화해 볼 정도로 많이 겪어보면서 제게 남은 한 가지 명제가 있습니다. 바그너가 종합 예술의 극치를 추구했다는 것이죠. 저 또한 모든 예술 장르가 공존할 수 있는 음악극을 지향합니다. 앞으로 이 클래식 음악을 중심에 두고 만드는 종합 무대 예술 속에 국악도, 대중음악도 공존할 수 있지 않을까요.”

 

관객을 위해 무엇이든, 어디든

오는 11월 16일, 예술의전당 보컬 마스터 시리즈는 사무엘 윤이 기획해 온 것의 클라이맥스다. 그간의 관객 반응과 노하우를 더해 가장 대규모로 진행된다. ‘방랑자’를 제목으로 사무엘 윤은 직접 시놉시스를 작성했다. 고독과 슬픔, 혼돈, 절망과 죽음, 구원과 소망이라는 주제를 거치는 한 편의 드라마다.

“처음은 슈베르트의 피아노 독주곡 ‘방랑자 환상곡’으로 시작하려 해요. 어쩌면 관객이 들어오기 전부터 연주가 되고 있을 수도 있고요. 공연에 함께하는 피아니스트 박종화도 저만큼 자유로운 영혼이니 제 연출을 잘 받아주실 것 같습니다. 무용수도 등장할 예정이고요. 오페라 극장에서 선보이는 만큼, 최고의 작품이 나오도록 준비해 보려 합니다.”

이번 공연에는 비주얼 아티스트 박귀섭이 참여한다. ‘BAKi’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무용수 출신의 비주얼 아티스트인 그는 넷플릭스 시리즈 ‘스위트홈2’의 타이틀 영상을 제작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선보여 왔다. 지난 5월,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진행된 전시 ‘LAYER’를 보게 된 사무엘 윤이 박귀섭 작가의 작업실로 직접 찾아가 만났다.

“저는 보는 사람들을 몰입시키는 이들의 작품을 많이 찾아보는 것 같아요. 박귀섭 작가도 그런 분들 중 하나였고요. 예술가들이 모이면 최고의 공연이 탄생합니다. 옛 시절 빈이라는 도시가 그랬듯이요. 그렇게 공연의 다양성을 갖춘 도시라면 더 많은 관객과 예술가들이 모여들겠죠. 그런 구심점이 되는 공연들을 만들어 나가고 싶습니다.”

“한국에서 이렇게 공연을 많이 하게 될 줄 몰랐다”며 사무엘 윤이 읊어주는 하반기 일정은 말 그대로 분주하다. 10월 24일에는 강릉시향과 협연을, 11월 8일과 19일에는 국립합창단의 ‘전쟁 미사’ 공연에도 참여한다. 12월 5일에는 부산시립합창단과 국내 초연작을 선보일 예정.

“다음 시즌에는 도르트문트 극장의 새로운 ‘반지’ 시리즈 프로덕션에도 참여합니다. 네 번째 작품인 ‘신들의 황혼’에 하겐 역으로 출연하기 위해 5월, 독일에 머뭅니다. 연출가 페터 콘비츠니(1945~) 새 연출작입니다. 야닉 네제 세갱 지휘로 로테르담 필하모닉의 투어 공연에도 참여할 예정이고요. 사실 한국과 유럽에서 동일하게 제안이 들어오면, 이제는 유럽보다는 한국 공연을 선택하는 편이에요. 아직 제 노래를 듣지 못한 한국 관객이 있다면 어디든 찾아가겠다는 마음으로요. 요즘에는 지방의 공연장도 열심히 다니고 있습니다. 제 공연을 보고 더 많은 관객이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실 수 있다면야 어디든 가죠.”

허서현 기자 사진 아트앤아티스트

 

사무엘 윤(1971~) 서울대 성악을 전공하고 밀라노 베르디 음악원·독일 쾰른 음대에서 수학했다. 2012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의 타이틀롤을 맡아 화제를 모았다. 1999년부터 쾰른 극장 소속으로 활동했으며, 종신 가수로 퇴직했다. 2022년 독일어권 최고 영예인 캄머쟁어(궁정가수)로 선정됐다. 같은 해부터 서울대 음대 성악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Performance information

강릉시향 ‘가곡의 밤’

10월 24일 강릉아트센터 사임당홀

2024 대한민국은 공연중 – 국립오페라단 ‘오페라 페스타’

10월 26일 국립극장 해오름

국립합창단 ‘전쟁 미사’

11월 8일 과천시민회관, 19일 제주아트센터 예술의전당

‘보컬 마스터 시리즈 Ⅲ – 베이스바리톤 사무엘 윤’

11월 16일 오후 5시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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