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니아홀① 세계를 향해 활짝 열어놓은 창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7월 1일 12:00 오전


▲ 표트르 대제의 청동기마상

유럽에서 가장 먼저 필하모니 협회를 만들어 필하모니아 말리홀과 볼쇼이홀에서 212년의 역사를 일구어온 음악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 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푸시킨의 예언대로 유럽을 넘어 세계를 향해 창을 활짝 열고 있다

대자연이 우리로 하여금

유럽으로 향한 창을 열고

바다를 향해 두 발을 당당히 딛도록 했으니…

이제 새 항로를 따라 이곳으로

각국의 선박들이 깃발을 날리며 모여들고

우리는 주연(主演)을 베풀리라.

푸시킨 ‘청동기마상(The Bronze Horseman, 1833)’

성스러운 돌의 도시의 기원

상트페테르부르크! 일찍이 대문호 푸시킨이 칭송했던 ‘성스러운 돌의 도시’다. 러시아의 북쪽, 발트 해와 인접한 핀란드 만에 위치해 구소련 시절에는 레닌그라드로 불렸다.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광대한 러시아, 그중에서도 유럽의 문화와 양식에 가까운 도시다. 러시아 황제 표트르 1세가 스웨덴의 침입을 막기 위해 1700년부터 요새를 건설할 계획을 가졌다. 하지만 라도가 호수에서 발원, 74킬로미터를 흘러 핀란드 만으로 종착하는 네바 강 하구는 사람이 살 수 없는 늪지대였다. 표트르 대제는 가까이 핀란드에서부터 멀리 우랄 산맥에서 가져온 화강암으로 거대한 늪을 메우는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역사(役事)를 명령한다.

돌로 메운 광활한 땅의 기초 위에 돌로 모든 건축물이 지어졌다. 도시 곳곳에 물길을 터서 운하로 연결했다. ‘나무의 도시’ 모스크바의 잦은 화재를 경험한 끝에 얻은 지혜였다. 그리하여 돌(petra)에서 유래한 자신의 이름과 같은 성 베드로에게 의지한 ‘신탁(神託)의 도시’가 세상에 태어나게 된 것이다. 전쟁에서 승리한 표트르 대제는 1712년 마침내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옮겼다. 이후 페테르부르크는 200년 동안 러시아 정치·문화예술의 중심지였다.

차이콥스키의 마지막 교향곡 ‘비창’에 얽힌 일화

1893년 10월 28일.

1703년 표트르 대제에 의해 건설되어 로마노프왕조의 황금기를 구가하며 ‘유럽으로 열린 창’ 역할을 온전히 감당했던 ‘차르의 도시’는 알렉산드르 3세의 치세 말기인 19세기의 끝자락에 이르러 헤어날 수 없는 혼란에 시달리고 있었다. 벌써 겨울로 접어들어 흰 눈발이 날리는 가운데 저녁이 되자 시민들은 시내 중심가 넵스키 대로 왼쪽편의 예술광장 한쪽에 자리한 필하모니아 볼쇼이홀로 몰려들었다. 러시아가 자랑하는 대작곡가 차이콥스키의 새 교향곡이 이날 초연되기 때문이었다.

황실 교향악단(현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입장하고 차이콥스키가 직접 지휘봉을 잡고 포디엄에 올랐다. 얼굴은 창백했다. 어둡기 그지없는 도입부에 이어 바이올린이 드디어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러시아 대륙의 무한한 생기가 소생되었고, 이면에는 운명의 장난으로 영원히 이별한 폰 메크 부인의 얼굴이 겹쳐졌다. 마침내 그 모든 상념은 마지막 ‘아다지오 라멘토소’에 집약되어 맥박은 끊어졌다.

그러나 청중의 반응은 냉담했다.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 암울하게 가라앉은 피날레를 이해하는 사람은 지휘자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결과는 작곡가에게 또다시 깊은 절망을 안겨다주었다. 이미 정신적으로 재기 불가능한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그에게 더 이상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차이콥스키에게 ‘백조의 호수’가 되고 말았던 마지막 교향곡 6번 ‘비창’은 이렇게 세상에 탄생했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촉발된 차이콥스키의 우울한 정서는 결혼의 실패와 든든한 후원자 폰 메크 부인과의 결별,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시 러시아 민중들의 처참한 현실까지… 그 모든 감성이 ‘비창’ 속에 담겨 있었다. ‘비창’이 연주되고 정확히 9일 뒤인 11월 6일 운명의 장난과도 같이 작곡가는 하늘나라로 갔다. 그리고 다시 12일 후, 초연했던 필하모니아 볼쇼이홀에서 ‘비창’이 성대하게 연주되자 비로소 청중들은 오열하며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 필하모니아 말리홀

▲ 말리홀 내부

필하모니 협회의 탄생과 말리홀의 전통

1802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유럽 처음으로 필하모니 협회가 발족했다. 피렌체 태생으로 러시아로 건너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삶을 마감한 18세기 유럽 최고의 건축가 카를로 라스트렐리가 건축한, 넵스키 대로 30번지에 위치한 필하모니아 말리홀이 협회의 회합장소였다. 라스트렐리는 푸시킨의 동명 서사시 ‘청동기마상’ 동상을 만든 장본인이기도 했다. ‘러시아 필하모니 협회’는 하이든이 초대 회원이었으며, 가면무도회와 시 낭송회, 음악회가 주기적으로 열렸다. 창립 당해 연도인 1802년 하이든의 오라토리오 ‘천지창조’가, 1824년에는 베토벤 합창음악 최대의 걸작 ‘장엄미사’가 초연돼 필하모니홀의 입지는 유럽의 쟁쟁한 공연장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수준으로 격상되었다.

1828년 바실리 엥겔하르트 왕자가 홀의 새 주인이 되었다. 파리 출신의 건축가 파벨 자코트(1798~1860)가 리모델링을 거쳐 신고전주의 양식의 더욱 아름다운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엥겔하르트의 우아한 살롱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예술가들이 수시로 모여들었다. 푸시킨·주콥스키·레르몬토프·투르게네프를 비롯해 안톤 루빈시테인·리스트·클라라 슈만·탈베르크 등 당대 최고의 지성들이 유럽 전역에서 몰려들었다. 특히 가면무도회의 인기가 높았는데 러시아 황제의 가족들도 종종 엥겔하르트의 집에 들러 음악과 함께 춤을 즐길 정도였다.

20세기 들어서도 홀의 예술적 향기는 식지 않았다. 필하모니아 말리홀은 1949년 5월 15일 대중에게 첫 개방되었고, 미하일 글린카의 이름을 따 ‘글린카홀’로 명명되었다. 쇼스타코비치·셰드린·슬로님스키의 작품이 말리홀에서 초연되었고, 클래식계의 위대한 스타 대부분이 이 홀의 무대에 서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다. 리히터·코간·길렐스·오이스트라흐·네이가우스·소콜로프·로스트로포비치 등 러시아의 위대한 연주자뿐 아니라 글렌 굴드·구스타프 레온하르트·카티아 리차렐리 등 생존하는 세계 정상의 거장들이 말리홀을 거쳐 갔다. 500석 규모의 말리홀은 현재 독주회와 실내악 공연에 관한 한 최상의 어쿠스틱을 자랑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건립 300주년 기념 ‘예술광장 페스티벌’이 한창이던 2003년 1월 2일의 필하모니아 말리홀.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의 작곡가 세르게이 바네비치의 콘서트 오페라 ‘니콜렌카 이르테네프의 삶으로부터’가 블라디미르 체르누센코가 지휘하는 국립 카펠라 합창단과 오케스트라에 의해 막을 올렸다. 톨스토이의 3부작 ‘Childhood, Boyhood, Youth’에 기초한 매력적인 음악극은 공연 도중 객석 통로에서 어린이들의 춤이 어우러져 청중과 연주자가 하나가 되었다. 중간중간 들려오는 낭독자의 낭랑한 스토리텔링은 마이크 없이도 홀 전체에 또렷하게 들렸다. 무도회·시 낭송·콘서트로 이어지는 말리홀의 전통을 고스란히 접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 필하모니아 볼쇼이홀 내부

활짝 문을 연 볼쇼이홀 시대

한편 필하모니 협회에서 주최하는 공연이 인기를 얻으면서 말리홀은 포화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여기에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민들의 예술에 대한 열기가 고조됨에 따라 더 큰 회합장소와 콘서트홀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음악가뿐 아니라 유럽 최고의 건축가들의 주요 활동 무대이기도 했다. 그 무렵 나폴리 태생의 카를로 로시는 황실의 부름을 받아 현재 러시아 국립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는 미하일로프스키 궁전, 궁전광장을 싸고 있는 육군본부의 아치를 설계해 인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고전주의 양식을 표방하는 로시가 새로운 공연장 건축의 총책임을 맡았고, 로시의 제자이자 말리홀을 재건축해 명성을 얻었던 자코트가 실무를 담당했다. 마침내 1839년 상트페테르부르크 귀족 협회가 자금을 댄 필하모니아 볼쇼이홀이 문을 열었다.

오스트리아 빈 무지크페라인잘과 마찬가지로 필하모니아 볼쇼이홀은 세계적인 음악가들만이 오를 수 있는 꿈의 무대다. 차이콥스키의 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 3막 무도회 장면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6개의 찬란한 샹들리에가 빛을 발하는 메인홀의 음향은 세계 최고를 자랑한다. 특히 첼로와 콘트라베이스의 저음은 무대 뒤로부터 바닥을 치며 올라와 황홀한 경험을 만끽할 수 있다. 전면의 파이프 오르간은 웅혼한 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첩경과도 같다. 북구의 ‘백야’를 염두에 두어서일까. 홀 상단으로 낸 창을 통해 여름에는 한밤에도 백야의 불빛이 쉴 새 없이 들어온다. 저녁 공연이 시작되고 한참이 지나도 햇볕이 객석을 따갑게 쏘아댄다. 사방이 꽉 막힌 어두운 공연장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별천지인 셈이다.

붉은 양탄자가 깔린 계단을 밟고 홀 안으로 들어가면 먼저 12개씩 양쪽으로 늘어선 24개의 열주가 보는 이를 압도한다. 핀란드에서만 나온다는 흰색 통 대리석이다. 시민들은 언제나 잘 닦은 구두를 비닐봉지에 넣고 와 물품보관소 앞에서 갈아 신고 입장한다. 음악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예의다. 바흐의 흉상이 정면에 자리한 1층 로비는 갤러리지만 큰 이벤트가 있을 때 뒤풀이 장소로도 사용된다. 2층 복도에는 라흐마니노프 등 이 홀을 거쳐 간 위대한 음악가들의 초상이 걸려 있고, 공연장 운영팀의 사무실이 효율적으로 자리한다. 특히 입구의 5번 문으로 들어가면 티켓 판매소와 함께 음반 가게가 다양한 러시아 음악을 주 무기로 성업 중이다. 같은 건물 안에 있는 도서관에는 구하기 힘든 각종 음악서적과 희귀 악보로 가득하다.

1층은 발코니 128석을 포함 1,148석, 2층은 홀 전체를 돌아가며 316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다. 객석 어디서나 고른 음향을 들을 수 있다. 조금만 인기 있는 콘서트가 열리면 입석 자리도 순식간에 매진된다. 초대권은 기본적으로 없다. 후원 기업이나 VIP, 언론사용 자리는 시야가 좋지 않은 1층 오른쪽 발코니에 있는 16개의 객석으로, 티켓을 팔지 않는다. ‘예술광장 페스티벌’과 같은 페스티벌 기간에는 거의 매일 발코니에 조용히 앉아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장을 볼 수 있다. 정치인 등 VIP가 나타나면 의전 때문에 법석을 떠는 우리 공연장과는 아예 차원부터 다르다.

 


▲ 볼쇼이홀 외벽에 있는 예브게니 므라빈스키의 동판

많은 음악가들이 스쳐간 자리

베를리오즈·바그너·리스트·말러·클라라 슈만·사라사테·드뷔시·쇤베르크가 이 홀에서 연주한 것을 영광으로 삼았다. 보로딘·림스키 코르사코프·무소륵스키 등 러시아 5인조와 글라주노프·스크랴빈·스트라빈스키 등 러시아 작곡가의 주요 작품이 볼쇼이홀에서 세상에 그 진가를 알렸다. 그리고 차이콥스키는 1888년 자신의 교향곡 5번을 이 홀에서 초연했으며 5년 뒤 교향곡 6번 ‘비창’을 지휘하고 운명을 달리했다. 혁명 후인 1921년 6월 21일 ‘페트로그라드 필하모니아’로 이름을 바꾸고 황실 오케스트라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로 이름을 바꿨다. 필하모니아의 첫 번째 디렉터는 에밀 쿠퍼가 맡았다.

어디 이뿐이랴! 볼쇼이홀은 전설적인 거장 지휘자 예브게니 므라빈스키가 무려 50여 년간이나 이끌던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당시 레닌그라드 필하모닉)가 그 빼어난 음색을 뽐냈던 역사의 현장이다. 19세기 초반에 궁정오케스트라로 시작해 1882년 알렉산드르 3세의 명으로 탄생한 러시아 대표 오케스트라이자 유럽 오케스트라 순위 10위 안에 항상 이름을 올리는 최정상급 악단이다. 1926년 쇼스타코비치는 니콜라이 말코의 지휘로 볼쇼이홀에서 교향곡 1번으로 데뷔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7번을 2차 대전 중 독일군의 ‘900일 포위’ 가운데 칼 엘리아스베르크의 지휘로 초연해 명성을 얻었던 볼쇼이홀의 상주 교향악단으로 아직껏 건재하다. 알렉산드르 드미트리예프가 1977년부터 현재까지 무려 37년을 지휘대에서 호령하고 있다. 쇼스타코비치 대부분의 교향곡이 초연된 것을 기념해 1975년 작곡가가 세상을 떠나자 볼쇼이홀은 또 다른 이름을 ‘쇼스타코비치홀’로 명명했다. 리히터·길렐스·오이스트라흐·코간 등 이제는 전설로 남은 대가들이 말리홀과 함께 언제나 필하모니아 볼쇼이홀에서 자신의 음악을 선보였다.

 


▲ 필하모니아 볼쇼이홀을 끼고 있는 예술광장
12월 말에서 이듬해 초까지 ‘예술광장 페스티벌’이 열린다

러시아 음악축제의 대표, 예술광장 페스티벌

필하모니아홀의 대표적인 페스티벌은 12월 말에서 이듬해 초까지 열리는 ‘예술광장 페스티벌’이다. 1988년부터 므라빈스키의 뒤를 이어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의 음악감독으로 군림하고 있는 유리 테미르카노프는 1998년부터 시작한 ‘예술광장 페스티벌’의 의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페테르부르크의 전통을 잊어버렸어요. 페테르부르크는 겨울이 문화적 활동 시기입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여름에 관광객이 많이 올 때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어요. 겨울이면 이곳 궁전이라든가 곳곳에서 연주를 하고, 무도회를 열던 페테르부르크의 옛 전통과 정신을 되살려야 합니다. 이 축제는 공산정권 때 없어졌던 과거의 전통을 다시 되살리려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축제는 로시가 건축한 대리석 궁전으로 유명한 러시아 국립박물관과 무소륵스키 극장에서 몇 해 전 이름을 바꾼 미하일로프스키 오페라발레극장 그리고 필하모니아 볼쇼이홀을 끼고 있는 예술광장에서 이름을 가져왔다. 푸시킨 동상이 광장 중앙에 자리한 예술광장은 언제나 책을 읽는 시민들로 넘친다. 우리 연주자로는 사라 장이 2003년 개막연주회에 초대받았던 이 축제는 현재 러시아를 대표하는 국제음악페스티벌이다.

2002년 12월 28일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정도(定都) 300주년을 맞아 야심차게 준비한 첫 공식 행사가 있는 날이었다. 바로 예술광장 페스티벌의 개막공연이었다. 클래식 콘서트로 300년이나 된 이 도시의 저력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오전 11시에 시작된 공개 리허설 때 입석까지 가득한 청중을 보면서 이미 성공적인 축제가 될 것임을 예견하게 했다. 드디어 7시, 예브게니 키신과 테미르카노프가 들어서자 벌써부터 흥분으로 열기가 가득 찼다.

개막연주회는 독일 작곡가 일색이다. 유럽을 향한 무언의 메시지일까.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의 1악장 도입부가 웅혼한 기상으로 퍼져 나왔다. 직사각형의 볼쇼이홀은 피아노의 첫 주제가 흐를 때 이상적인 소리를 홀 구석구석까지 비추고 있었다. 당시 30대 초입이던 키신의 얼굴은 앳된 모습 그대로였으나 그가 전해주는 피아니즘은 거장적인 풍모를 보이며 브람스 음악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제1·2바이올린이 양옆으로 갈리고 콘트라베이스가 무대 왼쪽 뒤로, 금관군이 오른쪽으로 치우치는 악기 배치가 바로 므라빈스키가 확립해놓은 ‘레닌그라드 편성’이다. 압도하는 원색적인 트럼펫과 중후한 저음은 가히 드넓은 러시아의 대평원을 그대로 닮아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들려주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영웅의 생애’는 ‘레닌그라드 사운드’의 맥을 잇는 호탕한 연주를 선사했다. 므라빈스키 시대의 야성미는 다소 반감되었지만 테미르카노프는 자신의 수족처럼 열 손가락을 바삐 움직이며 ‘영웅의 도시’를 자축했다.

유럽에서 가장 먼저 필하모니 협회를 만들어 필하모니아 말리홀과 볼쇼이홀에서 212년의 역사를 일구어온 음악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 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푸시킨의 예언대로 유럽을 넘어 세계를 향해 창을 활짝 열고 있다. www.philharmonia.spb.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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