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새

민족적 정체성의 글로벌 상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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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8년 9월 17일 12:01 오전

이 춤의 운명이라니_3
무용 작품의 탄생과 파장을 담은 인생 이야기

“저는 러시아적 발레가 필요합니다. 러시아 오페라·교향곡·노래·춤·선율은 있지만 러시아 발레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제가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디아길레프-

알렉세이 라트만스키 안무의 ‘불새’ ©Andrea Mohin/The New York Times

발레단을 운영하는 것은 마치 코끼리 한 마리를 키우는 것과도 같다. 모양새는 나지만 유지가 어렵다. 따라서 전막 공연을 할 수 있는 대규모의 인력과 시설, 자원을 갖춘 발레단은 왕실이나 국공립 단체의 후원 없이는 사실상 존립이 불가능하다. 본디 화려한 볼거리를 통해 부와 권력을 과시하는 데서 출발했던 발레는 이처럼 처음부터 경제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문화를 콘텐츠로 보고 이를 경제의 논리로 환원하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발레단과 거리가 먼 단어가 ‘스타트업’일 것이다. 그런데 한 세기 전 매우 성공적인 스타트업 발레단이 있었다. 러시아의 흥행사 세르게이 디아길레프가 조직했던 발레 뤼스(Ballets Russes)이다. 1909년에 결성되어 1929년 디아길레프가 사망할 때까지 20년간 존속한 발레 뤼스는 발레의 모더니즘을 구축하고 예술적 혁신의 구심점이 되었다. 무용수도 아닌 한 개인이 만든 신생 단체가 문화예술계를 뒤흔들었다는 것, 그리고 탄탄한 후원이 없는 민간단체가 1차 세계대전에도 살아남아 세계적으로 활동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여기엔 열정으로 뭉친 이들의 노력과 기민한 사업 감각이 작용했다. 바로 스타트업의 정신이다. 그리고 디아길레프와 뜻을 함께했던 이들이 글로벌마켓을 겨냥하여 내놓은 대표적인 기획상품이 ‘불새(L’Oiseau de Feu, 1910)’다.

 

해외관객을 겨냥한 글로벌 기획상품

레옹 박스트가 그린 ‘불새’의 한 장면

‘불새’는 ‘러시아적인 것’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이다. 발레의 역사에서 민속적이고 이국적인 것에 대한 탐닉은 루이 14세 시대까지 너끈히 거슬러 올라가지만, 타국의 관객을 겨냥하여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을 상품화한 발레작품은 ‘불새’가 처음이다.

‘불새’는 발레 뤼스의 두 번째 시즌인 1910년 6월 25일 파리 오페라극장에서 초연되었다. 1909년의 첫 시즌에서 발레 뤼스가 ‘레 실피드’ ‘장미의 정’ 등의 작품을 선보이자 파리 관객들은 이들의 세련되고 수준 높은 작품에 열광하면서도 한편으론 민족적인 색채가 부족하다고 평가했다고 한다. 이는 어불성설이다. 왜냐하면 발레는 러시아의 근대화 및 서유럽화를 위한 하나의 전략으로 도입되었고, 따라서 러시아인에게 발레란 서유럽 문화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유럽에서 러시아는 멀고 먼 야만의 땅, 이국적이고 동양적이며 원초적인 문명이었고, 서유럽인들은 러시아 발레에서 프랑스적인 세련됨이 아니라 그들이 상상했던 러시아를 보고 싶어 했다. 기민한 흥행사였던 디아길레프는 다음 시즌의 목표를 파리 관객들이 원했던 ‘러시아 풍으로(du vrai Russe)’로 삼았으며, 이를 위해 작곡가 아나톨리 랴도프에게 작곡을 의뢰하며 아래의 편지를 보냈다.

“저는 러시아적 발레‐그런 것은 없었기 때문에 최초의 러시아 발레‐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러시아 오페라, 러시아 교향곡, 러시아 노래, 러시아 춤, 러시아 선율은 있지만 러시아 발레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파리 그랑 오페라와 런던의 대규모 드루리 레인 극장에서 내년 5월에 공연하기 위해‐제가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집단적 창작품입니다. 그것은 1막 2장이 될 발레 ‘불새’입니다.”

‘불새’는 ‘예술경영’이라는 용어가 생기기도 전에 시장조사를 바탕으로 기획된 글로벌 문화상품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는 디아길레프가 ‘우리’라고 칭했던 이들의 신념과 열망을 담은 집단 창작물이었다. 디아길레프는 1898년에 ‘예술세계(Mir iskusstva)’라는 잡지를 창간하여 알렉산더 브누아, 레옹 박스트 등 개혁적 성향의 예술가들과 함께 운영한 바 있는데, 이들은 발레 뤼스의 핵심 멤버가 되어 서유럽에 러시아의 예술을 선보이겠다는 목표를 공유했다. 발레 뤼스가 탄생했을 때는 피의 일요일을 비롯하여 차르가 지배하던 억압적인 군주체제에 균열이 가던 시기였다. 발레 뤼스의 협업자들은 황실 친화적이고 관료주의적인 황실극장에서 벗어나 러시아인으로서의 자의식을 담아내고 예술적 혁신을 이루기를 꿈꾸었다.

‘불새’는 미셸 포킨 안무,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작곡, 알렉산더 골로빈의 무대·의상, 레옹 박스트의 의상디자인으로 초연되었다. 1909년의 첫 시즌 직후 일종의 위원회가 조직되었으며 긴밀한 공동작업을 통해 ‘불새’의 대본과 세부사항을 구체화했다. 민담가 알렉산더 아파나시에프가 수집했던 러시아 민속 설화들을 짜깁기하고 서유럽 관객들이 원하는 이국적이고 세련된 형식으로 구현했다. 포킨이 대본작업부터 꼼꼼하게 참여하였고, 늑장부리는 랴도프 대신 신예 작곡가 스트라빈스키가 투입되었다. 황금색과 붉은색을 섞는 과감한 색 조합과 토착적 음향을 반영한 선율, 그리고 튀튀 대신 러시아의 전통 튜닉과 동양식 바지를 입은 무용수들은 창작자와 관객 모두가 원하던 ‘러시아적인 것’을 구현하였다.

 

기묘한 새

발레에는 유독 새가 많이 등장한다. 백조·흑조·파랑새·카나리아 등은 인간과 사랑에 빠지거나 유혹하거나 인간에게 축복을 내리는 존재이다. 발레가 동화적인 소재와 상승하는 움직임을 두 축으로 삼아왔다는 점에서 새는 발레에 최적화된 캐릭터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불새는 위의 새들과는 조금 다르다. 여성형이지만 나긋나긋하거나 사랑스럽지 않고, 완벽히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으며 인간에게 쉽게 잡히지만, 악을 다스리고 자연을 지배한다. 한마디로 쉽게 사랑하거나 미워할 수 없기에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이다.

‘불새’는 러시아 민속설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반(Ivan)이라는 차레비치(차르의 아들)가 황금 사과를 먹던 불새를 붙잡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반에게 잡힌 불새는 황금 깃털을 이반에게 주며 미래의 위기에 도와줄 것을 약속한다. 이반은 사악한 마법사 카슈체이에게 사로잡힌 공주 무리를 만나 차레비나 공주와 사랑에 빠진다. 카슈체이의 무리가 이반을 돌로 만들려 했으나 이반은 불새의 도움으로 카슈체이의 영혼이 담긴 알을 깨트림으로써 마법을 푼다. 불새의 승인 아래 이반과 차레비나가 결혼식을 올리며 왕위에 등극한다.

마법에 빠진 공주를 왕자가 구하는 이야기라니 너무나 익숙한 설정이다. 게다가 여성 새와 남성 인간의 만남이라는 점에서 언뜻 ‘백조의 호수’와도 닮았다. 그러나 막상 두 작품을 겹쳐보면 차이점이 확연히 드러난다. 우선 작품이 시작하자마자 발레에서 가장 중요한 이인무인 파 드 되가 등장하는데 왕자와 공주가 아니라 왕자와 불새가 춤춘다. 파 드 되는 아다지오‐남녀 솔로‐코다로 이루어진 고전적 형식과는 달리 구분 없이 진행되고, 인간과 새는 사랑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지배하기 위한 몸부림을 벌인다. 막상 공주는 튜닉 차림에 긴 머리를 늘어뜨린 채 토슈즈를 신지도 않고 민속적인 동작을 가볍게 행한다. 프티파의 고전발레에선 상상할 수 없는 일탈이지만 실은 면밀히 계획된 혁신이다.

 

작품에 투영된 혁신의 꿈

스테파니 대브니가 출연한 댄스시어터 오브 할렘의 ‘불새’ ©Martha Swope

무용학자 샐리 베인즈는 ‘결혼 각본’이 서양의 예술 춤을 관통하는 대주제라고 표현한 바 있다. ‘불새’는 왕자와 공주의 결혼식으로 끝맺는다는 점에서 결혼 각본에 완벽히 부합하지만, 정작 초점은 남녀의 사랑보다는 악의 소멸과 새로운 사회체제의 설립, 그리고 이를 인정하는 자연의 힘이자 러시아적인 힘에 있다. 창작자들은 설화적인 ‘불새’ 이야기에 오랜 적폐에서 벗어나 사회적 주체로 각성한 러시아인들이 새로운 삶을 영위하는 세상을 투영시켰다. 개혁정신은 발레 뤼스 무용가들에게도 뼛속 깊이 새겨져 있었다. 공룡처럼 군림했던 프티파가 구축한 고전발레가 매너리즘에 빠지자 새로운 발레를 꿈꾸는 신세대 무용가들이 등장했다. 바츨라프 니진스키·안나 파블로바·타마라 카사비나·조지 발란신 등 오늘날 전설로 남은 이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 황실발레학교 출신이지만, 평생고용이 보장된 황실극장에서 안주하지 않고 신생 발레단에 운명을 걸었다. 오늘날로 치면 명문대를 나와 대기업에 취직하는 대신 스타트업 회사에 합류한 것이다. 그 추동력은 발레의 개혁이고, 구심점은 포킨이었다.

황실발레단에서 포킨은 뛰어난 무용수이자 촉망받는 안무가였지만 발레의 개혁을 위해 무용단의 수뇌부와 각을 세웠다. 포킨의 개혁은 상식적이다. 한 마디로 발레를 ‘말이 되게끔’ 만들려 했다. 왜 프리마 발레리나는 무슨 작품이든 상관없이 자기 장신구로 치장하고 나오는가? 언제부터 농민의 무리가 정렬해서 춤추었단 말인가? 결국 포킨의 주장은 작품의 시대 배경 및 배역에 맞는 의상을 입고, 주제에 적절한 움직임을 통해 표현하며, 음악·동작·미술이 서로 연관되게 하자는 것이었다. 어쩌면 당연한 상식이지만, 막상 잘 지켜지지 않았다.

‘불새’는 포킨이 염원했던 상식이 잘 반영된 작품이다. 3~4막의 장황한 전막 발레 보다는 응축된 단막 발레를 통해 전개에 불필요한 부분들을 배제했고, 주역무용수가 솔로 베리에이션으로 테크닉을 과시하지도 않고 끝난 후에 여러 번 인사하느라 작품 진행이 중단되지도 않는다.(포킨은 ‘장미의 정’에서 니진스키의 도약이 유명해지자 이 동작을 넣은 것을 후회했다고도 한다) 춤과 마임이 유기적으로 결합한 움직임은 인물들의 특성을 표현하고 줄거리를 전개한다. 그래서 도드라지는 춤이 없는 대신 무용수들은 이질적이고도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살아있는 개개인으로 존재한다.

그래서일까, 오늘날 발레계에서 ‘불새’의 존재감은 미약하다. 온갖 새들이 모여드는 발레 콩쿠르나 갈라 공연에서 ‘불새’를 찾아보기 힘들다. 불새의 솔로 베리에이션에는 흑조의 32바퀴 후에테 회전동작이나 파랑새의 연속 카브리올 동작처럼 경탄할 만한 테크닉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불새’ 작품에는 ‘백조의 호수’에서와 같은 압도적인 칼군무나 다채로운 볼거리를 제공하는 디베르티스망도 없기에 클래식 발레단의 단골 레퍼토리도 아니다. 포킨은 발레가 상식을 포용하길 바랐지만, 오늘날 관객 역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비상식의 세계를 선호했다.

 

글로벌 마켓의 문화콘텐츠

앨빈 에일리 댄스 시어터 ©Paul Kolnik

거대자본이 투입되어 면밀히 기획된 블록버스터 영화가 흥행에 참패한 경우가 왕왕 있듯이 문화콘텐츠의 성패는 예측하기 어렵고 국제 시장에선 더욱 그러하다. ‘불새’는 1910년 초연 당시에는 파리 관객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불과 6년 후인 1916년에 발레 뤼스를 그토록 기다려 온 미국 관객들로부터는 외면당했다. ‘불새’는 첫 미국투어의 개막작이자 주요 레퍼토리로서 ‘발레 뤼스가 의미하는 모든 것에 대한 본질적인 전형’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또 다른 개막작이던 ‘세헤라자데’가 하렘의 주지육림, 특히 인종 간의 성교를 묘사하며 보수적인 미국 사회를 뒤집어 놓은 사이 ‘불새’는 빠르게 잊혔다.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 ©American Ballet Theatre

‘불새’가 다시금 미국 무대에 등장한 것은 1945년, 발레 뤼스의 마지막 안무가였던 조지 발란신에 의해서였다. 미국에 정착한 러시아 이민자 예술가인 스트라빈스키·발란신·샤갈은 미국 신생발레단인 뉴욕시티발레를 위해 ‘불새’를 개작했다. 그런데 발란신의 ‘불새’는 원작의 반 토막인 29분이다. 게다가 사실적이고 토착적인 무대미술은 샤갈의 몽환적인 그림으로 대체되었다. 이야기의 논리는 추상화되고 오직 불새의 춤만이 남았다. 드라마의 총체성을 강조했던 포킨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간 것이다.

다른 안무가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1982년 존 타라스(댄스시어터 오브 할렘)는 작품의 배경을 러시아에서 또 다른 이국적 배경인 정글로 대체했다. 2007년 모리스 베자르(앨빈 에일리 아메리칸 댄스 시어터)는 군복 차림의 남성군무를 통해 혁명과 부활에 대한 알레고리로 추상화했다. 2012년 알렉세이 라트만스키(아메리칸 발레 시어터)는 공주 무리를 토슈즈에 초록색 칵테일드레스를 입은 틴에이저로, 카슈체이는 새틴 연미복을 입은 악당으로 변신시켰다.

오늘날의 ‘불새’는 변종으로 진화했다. 발레 뤼스의 협업자들이 꿈꾸었던 ‘러시아적인 것’의 색채가 철저히 벗겨졌고, 포킨이 주장했던 상식도 퇴색했다. 그러나 이를 유행 지난 상품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심청’이나 ‘왕자호동’과 같은 민족주의 발레들의 융성, 나아가 컨템퍼러리 안무가들의 발레 형식에 대한 성찰과 실험은 ‘불새’가 사그라진 토양에서 발생했기 때문이다.

 

글 정옥희(성균관대학교 무용학과 겸임교수)

강의·연구·번역과 집필을 통해 춤이 사회에 존재하는 방식에 대하여 사유한다. 유니버설발레단과 중국 광저우시립발레단의 정단원으로 활동한 바 있으며, 현재 성균관대학교 무용학과 겸임교수로 무용을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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