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실피드’

적자를 뛰어넘은 사생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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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9년 3월 18일 9:00 오전

이 춤의 운명이라니_마지막회
무용 작품의 탄생과 파장을 담은 인생 이야기

 

“나는 파리의 ‘라 실피드’를 딱 한 번 봤다. 이 발레가 맘에 들었지만 나의 버전을 만든다면 더 나을 것이라 느꼈다. 게다가 음악도 코펜하겐으로 가져오기엔 너무 비쌌고 프랑스 버전의 제임스는 단지 ‘프리마돈나’를 위한 발판에 불과했다! 이 작품이 지닌 아름답고도 시적인 사상은 허상의 행복을 추구하다가 진짜 행복을 잃는다는 것이다. 이 절대적으로 뛰어나고 시적인 사상을 프랑스 버전에선 찾아볼 수 없다. 왜냐하면 여성 무용수의 기량을 감상하느라 바쁘니까 말이다” -오귀스트 부르농빌

 

결혼식 전야에 약혼한 사이인 남녀가 춤추는데 요정이 나타나 끼어든다. 요정은 남자의 눈에만 아른거리고 그의 주변을 서성거린다. 남자는 자신을 신뢰하는 약혼녀에게 충실하고 싶지만 어쩐지 자꾸만 요정에게 눈길이 간다. 친지와 친구들의 축복 속에서 혼약하는 남녀의 춤에 요정이 합류하면서 양다리를 걸치는 남자의 심리극으로 변모한다. 어두컴컴한 공간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전개되는 삼인무는 남자의 흔들리는 내면을 훔쳐보는 듯 은밀하고 위태롭다. 마치 현실 세계에 3차원의 가상 이미지를 겹쳐놓은 증강현실(AR)처럼 관객은 내면의 시선을 조정하여 이 춤을 2인무 혹은 3인무로 바라본다.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갈망

‘라 실피드(La Sylphide, 1832)’는 스코틀랜드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2막 발레다. 막이 오르면 난롯가 옆 안락의자에서 잠든 제임스 곁에 요정 실피드가 앉아있다. 실피드는 제임스 주위를 맴돌며 춤추지만 제임스가 깨어나 다가가면 사라진다. 가족친지가 모여 제임스와 약혼녀 에피의 예식을 준비하는 동안 실피드가 끼어들어 제임스를 유혹하다가 제임스의 약혼반지를 낚아채 밖으로 날아간다. 혼란에 빠진 제임스는 약혼녀와 하객들을 버리고 실피드를 쫓아간다.

2막은 안개가 가득한 실피드의 숲이다. 제임스가 실피드를 잡으려 하나 번번이 실패한다. 약이 오른 제임스는 마녀 매지를 찾아가 실피드를 잡을 방법을 요청하고 매지가 건네준 스카프로 실피드를 잡는다. 그러나 날개가 떨어진 실피드가 죽어버리자 다른 실프들이 실피드를 데리고 날아간다. 어둠 속에서 매지가 킬킬거리고 제임스는 에피가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것을 목격한다. 에피와 실피드를 모두 잃은 제임스가 절망한다.

‘라 실피드’는 아돌프 누리의 대본, 장 마들렌 슈나이츠회퍼의 작곡, 필리포 탈리오니의 안무로 1832년 5월 14일 파리 오페라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오페라 가수였던 누리는 당시 유행하던 두 작품에 영향받아 대본을 썼다. 하나는 샤를 노디에의 ‘트릴비, 혹은 아르겔의 요정’(1822)으로 스코틀랜드의 시골 아녀자를 남자 요정이 유혹한다는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한 해 전 초연된 마이어베어의 오페라 ‘악마 로베르’로 특히 달빛 아래 공동묘지에서 수녀들이 춤추는 발레 장면인 ‘수녀의 밤’이 큰 인기를 끌었다. ‘악마 로베르’의 주역가수였던 누리가 대본을 쓰고, 원장수녀 역할을 맡았던 발레리나 마리 탈리오니가 실피드 역을 맡았다.

‘라 실피드’에는 머나먼 이국땅에 대한 호기심과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갈망이 녹아있다. 작품이 초연된 1830년은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으로 불안정한 시기였다. 오랜 혼란 속에 프랑스인들은 힘든 현실보다 모험과 환상을 갈망하고, 예견된 실패를 알면서도 자기파멸에 끌리는 등 모순적이고 양면적인 태도를 지니게 되었다. ‘라 실피드’는 인간과 초자연,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흔들리는 낭만주의적 인간상을 담고 있다.

좀 더 현실적인 차원에서 ‘라 실피드’는 누구와 결혼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서사이기도 하다. 에피-실피드의 이분법은 결혼에 대한 교훈, 즉 동족과의 결혼이 건전하고 안정적이되 지루하겠지만 다른 종과의 결혼은 매혹적이되 위험하고 비극적이라는 교훈을 담고 있다. 누구를 위한 교훈인가? 제임스다. 그는 친지와 친구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약혼녀를 버리고 다른 여자를 쫓아간 남자다. 막장드라마의 설정이다. 그러나 제임스는 악역이 아니고, 관객은 약혼녀를 버린 이 남자에게 감정이입하고 공감한다. 따라서 실피드는 평범한 인간이 자기파멸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음을 설득시킬 만큼 매력적인 존재여야 한다. 주인공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동시에 순수하고 사랑스러우며 경이로운 존재인 실피드라는 캐릭터를 설득시킨 것은 안무가 필리포 탈리오니의 딸이자 주역 발레리나였던 마리 탈리오니의 힘이었다.

 

미운 오리 새끼 아이돌 만들기

19세기의 발레는 예인(藝人)의 가업이었다. 발레가 귀족들의 취미에서 전문적인 무용수의 직업으로 바뀐 후 무용가 집안의 자손들은 국적에 얽매이지 않고 전문직 네트워크 속에서 전 유럽의 극장과 무용단을 옮겨 다니며 활동했다. 탈리오니 가문 역시 18세기 말부터 4대에 걸쳐 유럽 전역에서 활동했던 이탈리아의 무용가 집안이다. 그중에서도 필리포 탈리오니와 그의 딸 마리 탈리오니는 유럽, 러시아, 미국까지 진출하며 낭만발레의 상징이 되었다. 아버지 필리포는 파리와 밀라노에서 피에르 가르델, 오귀스트 베스트리스 등 당대 최고의 마스터에게 배웠으며 스웨덴에서 발레마스터로 임명되어 그곳의 프리마돈나와 결혼했다. 이후 그가 오스트리아, 독일 등에서 활동하는 동안 딸 마리는 어머니와 함께 스웨덴에서 지내며 발레를 배웠다. 그녀는 처음부터 두각을 드러내진 않았다. 구부러진 어깨와 비쩍 마른 다리 때문에 흉하고 기형적이라고 평가될 정도였고 테크닉 역시 약했다. 오스트리아 빈에 정착한 필리포가 마리를 데뷔시키려고 데려왔을 때 오랜만에 만난 딸은 기대 이하였다.

아버지 밑에서 마리는 6개월간 집중적인 훈련을 받았다. 오전 두 시간은 한 다리씩 번갈아 가며 하는 반복연습을, 오후 두 시간은 아다지오 움직임과 조화로운 포즈 취하기를, 그리고 잠들기 전 두 시간은 점프 연습만 했다. 흐느적거리던 무용수가 강철 같은 테크니션으로 거듭났다. 연습의 하이라이트는 토댄싱(toe dancing), 그야말로 발끝으로 서는 기술을 마스터하는 것이었다. 당시 이탈리아 무용수들이 발끝으로 서서 몇 초간 머무는 묘기를 과시하곤 했는데, 마리는 이 노골적인 곡예를 보다 우아하고 세련되게 정제시켰다. 공단으로 만들어진 당시 슈즈는 오늘날의 토슈즈와는 달리 앞코가 딱딱하지 않았기에 발끝으로 올라서면 체중을 그대로 받아 짓눌린다. 그럼에도 탈리오니는 얼굴을 찡그리지 않고 우아하게 날아오르는 듯 움직였다. 그녀가 동시대의 발레리나보다 월등했던 점은 요정같이 가볍게, 우아하게, 정숙하게,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전혀 힘들지 않은 듯 해내는 것이었다. 이런 움직임은 당시로선 낯선 방식이었다. 사람들은 이를 ‘탈리오나이저(taglionizer)’라는 동사로 묘사했다.

탈리오니가 미운 오리 새끼에서 백조로 환골탈태할 수 있던 것은 딸의 장점을 발굴해내고 돋보이게끔 적극적으로 밀어준 아버지 필리포의 힘이었다. 필리포는 ‘악마 로베르’ ‘라 실피드’ ‘하렘의 반란’(1833), ‘다뉴브의 딸’(1836) 등 여러 작품에서 마리를 주역으로 세웠다. 오늘날의 잣대에선 발레단의 안무가가 그다지 인정받지 못하던 자기 딸을 주역으로 캐스팅한다면 공정하지 못하다는 비판을 받을 터이다. 그러나 당시에 발레는 예술가 집안의 ‘패밀리 비즈니스’를 존중했기에 오히려 탈리오니 부녀의 명성을 높여주었다. 또한 그는 공기 중에 떠 있는 듯한 포즈, 소리 내지 않고 발끝으로 이동하기, 한 다리를 높이 들어 올리는 데벨로페(developpé) 등 ‘라 실피드’에 나오는 동작들을 오직 마리만 해낼 수 있도록 훈련하고 그녀에게만 기회를 주었다. 무용수의 특성에 걸맞은 작품을 만들고 이에 맞춰 맹훈련을 시켜 데뷔시킨 필리포의 전략은 아이돌 가수 기획사를 연상케 한다. 마리 탈리오니는 철저히 만들어진 상품이었고, 이는 공전의 히트작이 되었다.

 

요정 발레의 표본

‘라 실피드’의 인기로 마리는 단숨에 국제적인 스타가 되었다. 탈리오니 부녀는 런던(1832), 상트페테르부르크(1837), 밀라노(1841) 공연에서 환영받았다. 러시아에서 그녀의 토슈즈가 200루브르에 경매되었고, 발레 마니아들이 이를 요리해서 먹었다는 일화도 있다. 그녀의 이름을 딴 케이크와 모자, 향기가 나는 종이에 인쇄한 패션 잡지도 있었다. 또한 동판화가 유행하면서 탈리오니의 이미지는 국제적으로 퍼져나갔다. 탈리오니는 요정이었고, 연예인이었고, 우상이었다.

탈리오니의 실피드는 오늘날 우리가 아는 발레의 시발점이 되었다. 우리가 아는 발레란 아름다운 여성이 튀튀 차림에 토슈즈를 신고 사뿐히 뛰어오르는 것이다. 이 튀튀는 탈리오니에게서 왔다. ‘라 실피드’에서 화가 유진 라미(Eugène Lami)가 탈리오니를 위해 얇은 모슬린 천을 겹쳐 만든 것이다. 불과 한 세기 전 프랑스 왕실에서의 발레가 귀족 남성이 거추장스러운 예복과 가면, 가발을 갖추고 행하던 궁정 예법이었다면 ‘라 실피드’의 국제적 인기는 발레의 이미지를 단숨에 바꾸어 놓았다. 튀튀는 발레의 정체성이 되었다. 낭만발레의 후속작인 ‘지젤’이나 ‘파 드 카트르’도, 고전발레의 ‘백조의 호수’나 ‘라 바야데르’도, 포킨의 ‘레 실피드’나 발란신의 ‘세레나데’도 모두 여성화된 백색 발레(ballet blanc)의 유전자를 공유한다. 일상생활에서도 튀튀를 입고 다닌 탈리오니 덕분에 당시 여성들은 풍성한 모슬린 치마에 날개를 연상케 하는 리본을 허리에 묶고 다녔다. 오늘날에도 발레리나 플랫슈즈나 튀튀 패션이 꾸준히 유행하니 ‘라 실피드’는 그만큼 강력하게 유전자를 퍼트렸다고 할 수 있다.

 

덴마크에 이식된 씨앗

1837년 탈리오니 부녀가 러시아로 떠난 후 파리 오페라 발레에선 ‘라 실피드’가 1860년까지 레퍼토리에 남아 있다가 사라졌다. 그런데 이와는 별개로 ‘라 실피드’의 사생아가 탄생했다. 덴마크의 안무가 오귀스트 부르농빌(Auguste Bournonville)이 이 작품의 대본을 토대로 자신의 버전을 만든 것이다.

부르농빌 역시 탈리오니처럼 무용가 가문 출신이다. 프랑스 무용가인 아버지를 둔 덴마크 출신의 부르농빌은 프랑스 파리로 유학했으며 파리 오페라 발레에 들어가 마리 탈리오니의 파트너로 춤추기도 했다. 1829년 덴마크로 돌아간 그는 로열 덴마크 발레의 주역무용수이자 안무가, 발레마스터가 되었다. 1934년 5월 부르농빌은 파리에 와서 ‘라 실피드’를 관람했다. 그는 이 작품을 덴마크에서 올릴 생각이었기에 발레리나 루실 그란까지 데리고 갔다. 원작의 악보를 구매하려 했으나 너무 비싸서 포기하고는 파리를 떠나기 전날 단돈 2프랑 10센트에 누리의 대본 한 부를 구매했다. 덴마크로 돌아온 그는 20살의 젊은 작곡가 바론 헤르만 뢰벤스키올드에게 새롭게 작곡을 맡겼다. 1836년 11월 28일 코펜하겐 왕립극장에서 초연된 부르농빌의 ‘라 실피드’에서 부르농빌이 직접 제임스 역을, 루실 그란이 실피드 역을 맡았다.

마치 문익점이 붓통에 숨겨온 씨앗처럼 탈리오니의 ‘라 실피드’는 대본 한 권을 통해 프랑스에서 덴마크로 이식되었다. 물론 부르농빌의 ‘라 실피드’는 탈리오니의 ‘라 실피드’와 유전자가 일치하지 않는다. 한 번의 공연관람과 짧은 대본으로 작품을 재현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데다 음악마저 완전히 새롭게 작곡된 상태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원작의 설정을 그대로 살렸기에 부르농빌의 ‘라 실피드’는 초연 당시부터 탈리오니의 짝퉁, 혹은 표절작으로 여겨졌다. 문익점의 씨앗이 불법이었듯 ‘라 실피드’ 역시 오늘날의 기준에선 윤리적 문제가 제기되고 국제적 분쟁과 소송이 야기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익점이 우리의 서사에선 ‘위인’으로 추앙되듯 부르농빌 역시 덴마크 발레의 ‘영웅’으로 자리매김했다. 심지어 시간이 흐르면서 탈리오니와 부르농빌의 처지는 뒤바뀌었다. 탈리오니의 ‘라 실피드’는 유럽에서 낭만발레가 쇠퇴하면서 사라졌고 러시아에서는 20세기 초까지 추어졌으나 결국 원본이 사라졌다. 반면 부르농빌의 버전은 나머지 유럽과는 동떨어진 채 단단하게 결속된 로열 덴마크 발레의 전통 속에서 꾸준히 공연되며 거의 변형되지 않고 계승되었다. 오늘날 부르농빌의 ‘라 실피드’는 발레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작품 중 하나로 군림하며 전 세계에서 추어지는 ‘라 실피드’의 안무적 토대가 되었다. 탈리오니가 보았다면 통탄할 일이다.

 

여성 발레에서 다시 남성 발레로

부르농빌 버전의 초연에서 실피드 역은 그가 총애하던 루실 그란이 맡았다. 그란은 ‘북유럽의 실피드’라 불리기도 했지만, 부르농빌의 ‘라 실피드’는 그란을 위한 발레라기보다는 제임스 역을 맡은 자신을 위한 발레였다. 뛰어난 테크니션이던 부르농빌은 발레 교수법에서 한 유파를 형성할 정도로 낮고 빠른 점프와 정교하게 발을 부딪치는 동작들을 개발하고 활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실피드에 가려진 제임스의 역할을 강조하기 위해 마임을 강화하고 다양한 동작으로 구성한 춤을 추가했다.

게다가 북유럽인인 부르농빌은 탈리오니의 ‘라 실피드’에 스며있는 현실 도피적이고 자기 파멸적인 인간상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탈리오니가 이성적 판단으론 억누를 수 없는 인간의 감정과 충동을 인정했다면, 부르농빌은 허황된 꿈을 좇다가 패가망신하지 말고 현실의 행복에 충실하자는 교훈을 담고자 했다. 같은 내용이지만 정반대의 해석이라 할 수 있다. 부르농빌은 탈리오니의 버전이 여성 무용수의 매력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관객을 호도한다고 보았기에 자신의 버전에선 소박하고 건전한 공동체의 소중함을 강조하고자 했다. 그는 1막의 클라이맥스인 혼약식에 스코틀랜드 민속춤인 ‘하일랜드 플링’을 비중 있게 다루었다. 제임스와 에피는 이렇다 할 2인무를 추는 대신 하일랜드 플링에 합류한다. 그런데 함께 춤을 추면서도 언뜻언뜻 나타나는 실피드 때문에 제임스가 자꾸 열에서 이탈하거나 이 층으로 올라가 버리곤 해서 에피가 언짢아한다. 개인의 심리나 남녀의 애정보다도 공동체 속 역할이 중요함을 강조하는 부르농빌의 세계관이 덧입혀졌음을 알 수 있다. ‘라 실피드’가 휘게(hygge, 소박한 일상에서 행복감을 찾는 덴마크식 생활방식을 나타내는 말)로 거듭났다.

 

탈리오니 버전 vs. 부르농빌 버전

‘라 실피드’를 공연하려는 발레단의 입장이 되어보자. 탈리오니의 원본은 사라졌고, 부르농빌의 스핀오프는 잘 보존되었다. 그렇다면 사라진 원본의 정통성을 추구할 것인가, 안정적으로 이어져 온 전통을 따를 것인가? 이상 대 현실, 명분 대 실리의 문제다. 대부분의 발레단은 실리를 추구했다. 그런데 드물게 명분을 택한 경우도 있다. 샹젤리제 발레(빅토르 그소브스키, 1946)와 파리 오페라 발레(피에르 라코트, 1972)다. 모두 프랑스 발레단이라는 점에서 낭만발레 종주국으로서의 명예를 되찾기 위한 노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라코트는 초연 당시의 그림과 동판화들, 탈리오니의 안무 노트 등의 아카이브 기록을 참조하여 탈리오니 버전을 복원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대충 훑어보아도 라코트의 버전은 복원작이 될 수 없다. 1막에서 에피와 그녀의 친구들이 캐릭터슈즈대신 토슈즈를 신은 것이나 19세기로선 너무 어려운 테크닉을 수행하는 것은 라코트의 의도가 문자 그대로의 ‘복원’에 있는 게 아니라 오늘날 관객의 눈높이에 맞추었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라코트 버전의 백미는 현대적인 다중시점에 있다. 이 글의 도입부에 묘사한 제임스-에피-실피드가 함께 춤추는 ‘어둠의 춤(Pas d’Ombre)’이다. 발레작품의 관습과는 다르게 남녀 주인공이 혼약의 춤을 추는데 무대가 온통 어둡다. 희미한 팔로우 조명 속에서 붉은 스코틀랜드 의상을 입은 제임스와 에피는 주변 인물들과 구별하기 어렵지만 순백의 긴 튀튀를 입은 실피드는 형광에 가깝도록 팽창한다. 포켓몬고가 등장하기 반세기 전에 간단한 무대연출로 증강현실의 효과를 구현한 것이다. 자신을 둘러싼 현실에 환상이 더해지는 제임스의 주관적인 시점과 그 외의 모두가 지켜보는 객관적인 시점이 공존한다. 심리적이고 영화적이며 사이버네틱한 연출이다.

 

실직노동자 제임스의 환각

고풍스런 요정이야기가 다시금 펑크 키치쇼로 변신한 건 매튜 본 때문이다. 고전발레 패러디로 유명한 영국 안무가인 본은 ‘라 실피드’를 재해석한 ‘하이랜드 플링(Highland Fling, 1994)’을 만들었다. 작품의 배경을 스코틀랜드의 항구도시인 글래스고로 설정했다는 점에서 ‘라 실피드’의 배경이 스코틀랜드였음을 새삼 떠올리게 한다. 탈리오니가 살던 파리에서 스코틀랜드란 ‘머나먼 이국땅’ 정도의 의미였기에 남자가 입는 치마인 킬트 외에는 연관성이 없었다. 그런데 본은 쇠락한 항구도시에 사는 노동자층의 현실을 꿰뚫고자 했다. 제임스는 실직한 조선소노동자이고, 마녀 매기는 마약 판매상이자 타로술사이다. 제임스가 클럽에서 요란한 총각파티를 벌이다가 술과 마약에 취해 변기에 빠져서 좀비 같은 실피드를 만나고, 실피드가 사는 숲은 온갖 쓰레기로 가득한 뒷산 공터다. ‘낭만적인 오줌 발레’라는 부제처럼 본 특유의 B급 정서와 냉소로 가득하다.

그런데 2013년에 스코틀랜드의 대표 발레단인 스코틀랜드 발레가 이 작품의 공연권을 따내고 활발히 순회공연을 펼쳤다. 심지어 본의 개인 무용단인 뉴어드벤처스가 아닌 외부단체가 본의 전막을 공연하는 건 처음이라는 사실도 자랑스럽게 선전했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해묵은 갈등, 그리고 이 작품이 묘사하는 글래스고의 우중충함을 고려하면 의외다. 이는 지역 특성화와 관광 상품화가 중요한 오늘날 ‘라 실피드’가 새로운 국면에 처했음을 암시한다. 프랑스와 덴마크가 ‘라 실피드’의 소유권을 놓고 제아무리 자존심 대결을 펼쳐봤자, 타탄체크와 킬트로 점철된 ‘라 실피드’엔 스코틀랜드의 지분도 있다는 것이다.

 

글 정옥희(성균관대학교 무용학과 겸임교수)

강의·연구·번역과 집필을 통해 춤이 사회에 존재하는 방식에 대하여 사유한다. 유니버설발레단과 중국 광저우시립발레단의 정단원으로 활동한 바 있으며, 현재 성균관대학교 무용학과 겸임교수로 무용을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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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_‘라 실피드’ 적자를 뛰어넘은 사생아-1
©Francette Levieux O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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