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운드아티스트 김창훈, 소리 탐험가의 하루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1년 1월 18일 9:00 오전

ARTIST’S ESSAY

 

소리 탐험가의 하루

사운드아티스트 김창훈

©임주희

마지막 잎새 달인 12월 어디 즈음에 나는 걸려있다. 무엇이든 좀 해소되길, 떨어지길 모든 국민이 염원하듯 나 역시 기다리고 있다.

작년은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냈다. 2019년은 음반 ‘샤인-광주 사운드스케이프’ 발매 이후 정지영 감독의 영화 ‘블랙머니’(2019) 동시녹음과 음향 강연, 그리고 다양한 녹음 작업 의뢰로 내 생애 나름 바빴던 한 해로 기억된다. 그해 겨울 새로운 사운드스케이프 작업에 대한 즐거운 고민으로 연말을 보내었었다. 그러나 코로나가 덮치기 전, 탐구 대상을 찾아 떠난 3박 4일의 답사 여행이 소리 탐험가로서 마지막 여정이 되어버렸다. 좋은 기운을 이어 더 열심히 달려 볼 심산이었는데…….

연초의 답사 여행 이후 어떤 움직임도 없이 정체됐다. 각인된 표본마냥 나의 동선이라곤 집 주변 편의점이나 가끔 쉼을 틔우는 작업실에 가 여러 소리를 들어보는 것이 전부였다. 산으로, 들로 다니는 것을 좋아하고 낯선 곳에서 잠도 잘 자는 나에게 너무나 긴 고통의 나날이었다.

오늘의 일과를 나열해보면 이러하다. 아침에 2층 발코니에서 외부로 노출된 화분용 선반에 어제 놓아둔 언 물그릇을 비워 다시 새 물로 갈아주고, 먹이통을 한번 살펴보았다. 커피를 끓이고 최인훈의 ‘광장’을 마저 읽고, 초등학교 1학년 아이의 하굣길을 함께했으며, KBS 라디오 클래식 음악 채널을 들으며 저녁 식사로 갈치와 명태를 구웠다.

‘소리 탐험가’의 하루가 오늘도 이러했다. 이제는 자격지심도 들지 않는다. 가끔 늦은 밤에 달을 보러 나가 마음을 다져보는 것으로 긴 잠을 설칠 뿐이다. 아침의 그 물그릇과 작은 모이통의 주인은 우리 동네 새들이다. 우리 집 발코니로 아침과 해 질 녘 날아오는 새의 종류는 단출하다. 흔히 알고 있는 직박구리, 참새, 비둘기, 까치 아마 이즈음일 것이다. 가장 적극적인 새는 단연 직박구리다. 물 먹는 모습이 자주 관찰된다.

겨울철 도심에서 새들은 먹이, 특히 물 구하기가 쉽지 않은 듯하다. 자연으로 소리를 녹음하러 나가면 어느 때 어느 순간 이름 모를 새들이 내 사운드스케이프의 중요한 요소로서 큰 역할을 해주었다. 무료한 일상처럼, 한적한 풍경화처럼. 인상을 쓰다가 한번 날아오르거나 혹은 어두운 그늘 나뭇가지에 앉아 자신의 존재를 숨긴 채 저마다의 존재감을 드러내준 새들.

제주 소리풍경 작업을 정리한 앨범 ‘지구의 리듬-제주 사운드스케이프’(2014)의 9번 트랙 ‘물찻오름’에는 사려니숲에 보석처럼 자리하고 있는 산정호수에서 이른 아침 휘파람새 소리가 큰 인상으로 가득하다. 제법 넓은 산정호수의 공간을 가득 채운 그 지저귐이 나를 원시림의 자연 깊숙이 빨려 들어가게 했다. 물리적인 시간의 길이를 뛰어넘어, 오롯이 귀 기울이게 하는 자연 공간의 에코(echo)음. 인위적인 사운드 이펙트로 흔히 접하게 되는 그 신묘한 느낌을 가공하지 않은 순수한 자연의 울림만으로 온전하게 담을 수 있었다. 후일 이 앨범의 타이틀 음원으로 정했다.

이 음원에는 뒷이야기가 있는데, 중반부 즈음 비행기 소음이 함께 녹음된 것이다. 그 부분을 잘라내고 이어 붙여 좀 더 길게 앨범에 수록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렇게 이어 붙이기를 시도하다가 문득 어떤 생각에 포기했다. 물론 전문가의 손을 빌려 감쪽같이 편집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비행기 소음 이전, 다소 짧은 음원을 최종적으로 앨범에 실었다.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왜 이어지지 않을까? 나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문자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하지만 나는 무언가 거대한 지구의 배음을 이 음원에서 느끼고 있었다. 이것은 아마도 ‘지구의 리듬’이 아닐까. 해서 앨범의 제목을 ‘지구의 리듬-제주 사운드스케이프’라고 붙였다.

이처럼 나는 오래전부터 새들에게 신세를 지고 있다. 앨범 ‘카르마-DMZ 사운드스케이프’(2015)에서도, ‘나 물동이 이상숙 이우다-제주 사운드스케이프 II’(2019)에서도, 그리고 광주 5·18 앨범까지. 소리풍경 속에서 새들이 내는 날갯짓, 울음소리들은 무척이나 중요한 존재다. 이 대목에서 부끄러운 사실이 있다면 나는 새 전문가는 아니기에 새소리를 듣고 대개 그 이름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나에게 어떤 신호를 보내올 때 하나하나 이름을 불러주지 못하는 것이 미안할 따름이다. 이런 까닭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내가 사는 집 발코니에서 작은 행동을 하고 있다.

내년 2월이 지나 3월 초순 정도까지 하면 새들도 물 먹을 형편이 나아지겠지. 그즈음이면 나에게도 요즘처럼 암울한 뉴스가 사라지겠지. 내년 봄에는 소리 탐험가로 경상남도 통영을 방문하여 이 지역의 소리 탐구를 하고 있지 않을까? 어느 골목길에서 안익태(1906~1965) 선생의 흔적을 찾아 헤매길 소망한다. 소리 탐험가라는 이름값은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져본다.

도시의 소리풍경에서 우리가 늘 마주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대부분 소음일 것이다. 이 소음은 우리가 소홀히 한 소리다. 어쩌면 그 소홀히 한 소리가 우리에게 괴물이 되어 돌아올 수도 있다. 시끄럽다고 외면하지 말고 귀 기울여 살핀다면 지금보다 나아지지 않을까. 당신의 오늘도 보람찬 하루였기를.


사운드스케이프는 소리(Sound)와 풍경(Landscape)의 합성어로, 현장에서 들리는 자연적이고 인공적인 모든 소리를 포괄하는 소리환경을 뜻한다. 캐나다의 작곡가이자 생태운동가 머리 셰이퍼(1933~)가 1970년대 주창한 개념이다. 김창훈은 ‘사운드스케이프’ 시리즈로 네 장의 앨범을 발매했다.

➊ 광주 사운드스케이프

➋제주 사운드스케이프Ⅰ

➌ 제주 사운드스케이프 Ⅱ

➍ dmz 사운드스케이프

 

 

 

 

 

 

김창훈

김창훈(1975~)은 2000년 영화계에 입문해 다양한 미디어 분야에서 활동 중이다. 영화 ‘만신’(2013)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2019) 등에 동시녹음으로 참여했다. 소리를 찾아다니는 소리 탐험가로서 소리를 통해 풍경을 읽어내며 자연을 넘어 인문과 사회를 성찰한다. 소리풍경을 녹음하여 음반으로 기획·제작하는 라온레코드 대표이다

 

일러스트 임주희

피아니스트 임주희(2000~)는 장형준·신수정·강충모를 사사했다. 발레리 게르기예프/마린스키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며 이름을 알렸다. 취미로 그리는 그림을 SNS에 올리는 등 대중과의 소통에도 적극적인 젊은 연주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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