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곡 사이로 흐르는 여울, 아름다운 여울이라 해서 강원도 평창에는 ‘미탄(美灘)’이라는 마을이 있다. 혁혁(奕奕)한 경계를 둘러매고 수더분한 한복 차림으로 사진기 앞에 나선 여인, 그 누가 이 여인을 알겠는가.
글 정우정 기자(wjj@) 사진 김영일
조선 중기 평양의 기생 계월향, 말 잘한다 해서 붙여진 이름의 논개, 평안도 가산의 관기 운낭자. 조선이 그림으로 남긴 여성의 얼굴은 몇 점 되지 않는다. 당대에도 많은 여성들이 활약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오히려 원세대인 고려보다도 적은 수의 인물화를 남겼다. 그 시절뿐이겠냐만은 조선의 기록은 비율의 오류를 남겼다.
김영일의 ‘귀한 사람들’ 사진전을 찾았다. 국악 전문 레이블사를 운영하고 있는 김영일 작가의 전시에 국악인들의 등장은 적어도 나에게는 놀랄 것이 없다. 그들이 한복을 입었다 한들 새로운 것이 없고, 악기를 들고 초상 사진을 찍었다 한들 신선하지도 않으며, 오늘 이곳에 앉아 소리를 듣고 있다고 해도 일상의 조각일 뿐이다.
그러나 발화자의 시점을 제외하고 나면 오늘 전시의 모든 것은 새롭다. 국악을 알지 못하는 만 리 만국의 사람들, 오늘을 알기 어려운 후대 사람들, 이 자리에 있으면서도 오늘을 잘 알지 못하는 이들. 이들 모두가 만나게 될 이날의 초상은 또 하나의 소중한 사료로 남아 오늘을 이야기하게 될 테니, 이번 전시는 작가의 말대로 ‘귀한 사람들’이 될 수밖에 없다.
중앙대학교에서 사진을 전공한 작가는 ‘나의 본업은 사진사’라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명함 속 직함은 레이블사 ‘악당이반 대표’다.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를 음반사 대표로 알고 있다. “십수 년 전, 사진작가 일로 소리꾼 채수정 씨를 만났는데, 이상한 노래를 부르지 뭐예요. 초면에 그 소리가 뭐냐 물었더니, 판소리라고 해요.” 그렇게 국악에 빠져든 김 작가는 많은 국악인들에게 녹음의 기회를 줘야 한다고 생각해 2005년부터 음반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퓨어 레코딩(Pure Recording)이라고 하는 순수 레코딩 기법을 이용해 운당 한옥의 마룻바닥에서 녹음을 해 왔다. 연주자가 연주를 끊지 않고 단숨에 연주해 음반으로 담아내는 과정인데, 당시 느낌을 손실하지 않는 원음 그대로를 추구한다. 이러한 녹음 방식은 자연스러움을 지향하는 국악의 속성과도 잘 맞아 국악인들 사이에서 이슈가 됐다. 그것은 곧, 잘하는 연주자만이 음반을 담아낼 수 있게 되는 예선 아닌 예선이 되어 버렸다. 때문에 실력파 젊은 국악인들과 명인들이 ‘악당이반’을 통해 음반을 남기기 시작했다. 이를 조명해 2009년 KBS는 KBS국악대상 출판 및 미디어상을 ‘악당이반’에게 돌렸고, 이후 2011년에는 우리나라 가곡을 담은 음반으로 미국의 저명한 음악시상식 그래미상 후보에도 오르기까지 했다.
시선이 머무는 사진
개인적으로 2008년부터 그의 음반들을 지켜본 경험에 의하면 그가 내는 음반은 하나같이 재킷 사진이 말을 걸었다. 이것은 과장을 보태지 않은 표현으로, 특히 지성자 명인, 가야금 연주자 고지연, 소리꾼 채수정 앨범의 재킷 사진이 그랬다. 음반을 받아들고 한 사람을 오래도록 지켜보게 하는 것은 분명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4년 만에 다시 만난 그는 ‘사진사’였다. 그리고 그는 원래 사진사였다고 말한다. 이번 전시장에는 익숙한 사진들도 눈에 띄고 낯선 작품들도 있다. 한 쪽 벽은 60, 70대 나이의 국악계 명인들의 초상으로 채워져 있고, 맞은편은 거친 산새를 병풍 삼은 강원도 여인들, 코너를 돌면 명랑이 돋보이는 40, 50대의 연주자들, 그 맞은편은 수줍은 20대의 젊은 음악가들의 얼굴이 전시되어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한국·한복·음악·삶이다. 그 네 가지를 사랑하는, 또는 애증으로 끌어안은 스물두 명의 표정이 그곳에 있었다. 자연스러운 멋을 추구하는 작가의 시선에 포착된 것이다.
측면 사진이 많은 이유를 묻자, 작가는 ‘인간이 정면을 바라볼 수 있는 관계가 몇이나 되겠느냐’라는 의문을 던졌다. 정면을 바라보며 친근하게 말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억겁의 세월을 필요로 할지도 모른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낯설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이치인데, 사진이라는 이유로 정면을 구하며 애써 미소 지을 이유는 없다. 또 구십을 바라보는 망구(望九)의 나이에 정면을 바라보면 뭐 하랴.
“SNS를 통해 일주일 만에 ‘친구’라는 이름으로 인연을 맺은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측면이지요.” 이것으로 찰나의 순간을 받아들여야 하는 현대의 메커니즘을 읽을 수 있다. 작품을 표면적으로만 읽고자 하면 20대 연주자들의 일괄된 시선은 인위적으로 읽힐 수도 있지만 그것이야말로 자연스러운 표현이었다.
전시장 한 편에는 한복을 만드는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가 상영된다. 동대문 재래시장의 한복 상가의 모습이 여실하게 담겨 있다. 실을 만드는 과정부터 천을 떼어 나르는 과정, 제작과 상점에 전시가 되는 과정이 모두 들어 있는데, 끝까지 시청해보기를 권한다. 김영일의 ‘귀한 사람들’, 혹자에게는 익숙하지만 타자들에게는 몹시 낯설 오늘이 그곳에 있다.
3월 19일까지, 아틀리에 에르메스(매주 토요일 4시 우리 음악 공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