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난새와 한국대학생연합오케스트라의 공감(共感)II

김상헌- 자유 주제 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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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3월 1일 12:00 오전

금난새와 한국대학생연합오케스트라의 공감(共感)II

프로에 대하여 잘 아는 아마추어는 많다. 그러나 모든 프로는 한때 아마추어였음에도, 아마추어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프로는 드물다. 대중 중에도 아마추어에 주목하는 이는 거의 없다. 그렇다면 아마추어의 활동이란 단지 프로가 되기 위한 하나의 과정으로서, 또는 전문성이 결여된 단순한 취미로서 언제나 프로의 활동에 비해 초라하고 의미 없는 것일까?
대부분의 음악 전공자들은 음악을 좋아하기에 전공의 길을 택한다. 그러나 전공의 길을 걸으며 ‘좋아하는 대상’으로서의 음악은 사라져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대신 ‘이기기 위한 음악’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콩쿠르에서 우승하기 위한, 대학이나 오케스트라에 입학·입단하기 위한, 남들보다 잘하기 위한 음악. 이렇듯 어느덧 ‘즐기기 위한 음악’은 잊어버리고 ‘경쟁을 위한’ 음악에 몰두하게 되는 것이 많은 음악 전공자들의 현실이다. 물론 그 두 가지의 음악이 양립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이기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는 말처럼, 진정으로 즐길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프로이자 대가일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프로의 음악은 경쟁을 전제로 한다는 굴레에서 본질적으로 벗어날 수 없다.
반면 아마추어의 음악은 즐기는 것을 전제이자 목표로 삼는다. 그렇다면 프로에 버금가는 전문성에서 ‘경쟁’을 제외하고 ‘즐김’만을 남겨둔다면 어떨까?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음악을 즐기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 아닐까? 2012년 2월 5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있었던 한국대학생연합오케스트라(Korea United College Orchestra)의 공연 ‘금난새와 한국대학생연합오케스트라의 공감(共感)II’를 통하여 그러한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해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한국대학생연합오케스트라는 전국 25개 대학의 학생들로 구성된 아마추어 오케스트라로 2010년 3월 창단했다. ‘연주자는 연주만 하고 관객은 객석에 앉아 듣기만 하는’ 우리사회의 음악 관습을 극복하고 전문가인 동시에 소비자인 ‘프로슈머(prosumer)’를 지향하는 것이 이들의 목표다. 각 대학교 내 오케스트라 동아리나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동아리는 흔히 찾아볼 수 있어도 전국 대학생들의 자발적인 연합 오케스트라의 창단은 국내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또한 순수 아마추어 오케스트라로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공연을 가진 것 역시 이들이 처음이라 한다.
사실 서양음악사에서 아마추어와 프로의 구분이 엄격하게 나누어진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르네상스·바로크 시대는 물론 고전주의 시대에도 아마추어와 프로의 구분은 명확하지 않았다. 특히 오케스트라 분야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였다. 하이든(Franz Joseph Haydn)과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의 교향곡들은 아마추어와 프로가 혼재한 오케스트라에 의해 초연되었으며,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의 수많은 협주곡은 아마추어 연주자를 위하여 작곡되었다. 이렇듯 고전주의 시대만 해도 아마추어와 프로는 서로의 활동 영역을 공유하는 음악적 동반자였다.
그러나 낭만주의 시대에 들어서며 아마추어와 프로의 구분이 뚜렷해진다. 파가니니(Niccolo Paganini)와 리스트(Franz Liszt)로 대표되는 이른바 ‘비르투오소(virtuoso)’ 연주자들의 대두와 함께 고도의 기교를 요구하는 작품들의 등장은 공적인 연주회에서 아마추어 연주자들의 입지를 좁혀버렸다. 또한 산업사회로의 전환과 함께 연주회에도 상업적인 요소가 자리 잡으며 대중 앞에서의 연주는 전문가들의 영역으로 점차 굳어갔다. 낭만주의 시대에 중산층의 확장과 함께 아마추어 음악가들의 양적인 팽창이 이루어졌으나, 반면 이들의 영역은 프로의 영역과 엄격하게 구별된 것이다. 이후 아마추어 연주가들의 활동은 전문 음악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쉬운’ 음악과 함께 공적인 장소가 아닌, 살롱을 비롯하여 클럽이나 협회 등의 사적인 장소에 국한된다.
한국 양악사 속 아마추어 음악가의 존재와 의의도 서양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서양음악이 제도권 교육에서 완전히 자리 잡기 전, 1930년대에 이르기까지 중앙악우회와 경성제국대학 관현악단, 그리고 연희전문학교 관현악단과 같은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모임은 공적인 연주를 통하여 서양음악의 보급에 실질적인 역할을 했음은 물론, 음악교육의 한 축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의 대중적인 활동은 1934년 프로 오케스트라인 경성관현악단과 1936년 경성방송교향악단의 창단 이후 급속히 줄어들었으며 이때부터 시작된 아마추어와 프로의 명확한 구분은 오늘날까지 이른다.
그렇기에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임에도 불구하고 프로 못지않은 수준급 실력을 갖추고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 선 한국대학생연합오케스트라의 연주는 여러 가지로 큰 의미를 갖는다. 이들은 이날 연주회에서 라흐마니노프(Sergei Rach-maninoff)의 피아노 협주곡 2번 C단조 Op.18과 쇼스타코비치(Dmitrii Dmitrievich Shostakovich)의 교향곡 5번 D단조 Op.47을 연주하였다. 라흐마니노프의 협주곡은 피아니스트 유영욱의 협연으로 이루어졌는데, 유영욱의 뚜렷하고 힘 있는 연주를 정확하고 탄탄하게 받쳐주는 오케스트라의 균형 감각이 여느 프로 오케스트라 못지않았다. 첫 악장은 긴장이 덜 풀렸기 때문인지, 아니면 콘서트홀의 음향에 완벽히 적응하지 못하였기 때문인지 다소 둔탁한 음색과 경직된 표현력이 아쉬웠으나 마지막 악장에서는 풍성한 음향과 생기 있는 표현력으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 C단조 Op.18이 가진 짙은 호소력을 충분히 전달하였다. 협주곡은 오케스트라뿐만 아니라 협연자의 역할과 기량이 곡 전체를 좌우하므로 한국대학생연합오케스트라의 실력을 온전히 평가할 수 없었다면, 잠시의 휴식 시간을 가진 뒤 2부에서 이어진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 D단조 Op.47는 이들의 진면목을 그대로 드러내는 연주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마추어 오케스트라가 연주하기엔 너무 무겁고 어려운 곡이 아닌가 하는 걱정은 기우였다. 어두운 색채감을 바탕으로 숨 막히는 긴장감은 물론 절망·분노·아픔·해학 등 온갖 감정을 전 악장에 걸쳐 일관성을 유지하면서도 폭넓게 표현해내는 연주는 분명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의 연주라 믿기 힘든 모습이었다.
물론 이들의 연주가 흠잡을 곳 없이 완벽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라흐마니노프의 협주곡 연주에선 지휘자 금난새가 연주 도중 마치 오케스트라 연습 때처럼 단원들에게 지시사항을 말로 전달하는 경우가 있었다. 오케스트라와 금난새 간의 연습이 충분하지 않았음을 짐작하게끔 하는 대목이었다. 또한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에선 각 파트별로 연주자들이 자신의 파트에 집중하기 급급하여 전체적인 앙상블을 놓치는 부분도 종종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날 이들의 연주가 여느 프로 오케스트라의 연주 못지않았음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예의 재치 넘치는 금난새의 해설도 연주회를 더욱 풍성하게 하였다. 워낙 ‘해설이 있는 음악회’로 유명한 금난새지만, 이날 금난새의 해설은 그 자체로 공교롭게도 역사적·미학적 측면과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었다. 연주자는 무대에 등장하여 한 마디 말도 없이 그저 연주에만 몰두하며 관객은 어두운 객석에서 오로지 그 연주를 감상하는 연주 형태는 낭만주의 시대 들어 형식주의 미학의 완성과 함께 만들어진 관습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금난새의 해설은 그 자체로 아마추어와 프로, 그리고 관객의 거리가 서로서로 보다 가까웠던 낭만주의 시대 이전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이렇듯 이날의 공연은 능동적으로 음악을 즐기고 누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줌으로써 음악과 예술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끔 하였다. 권력이나 부를 쉽게 가져다주지 않는, 어떻게 보면 쓸모 없어 보이기도 하는 음악과 예술의 존재 의의는 그것이 우리의 삶을 풍족하고 행복하게 해주는 데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프로에 버금가는 실력을 지녔음에도 순수하게 ‘즐기기 위해’ 음악을 하는 한국대학생연합오케스트라의 모습이야말로 이러한 음악과 예술의 의미에 그 무엇보다 잘 부합하는 것이 아닐까. 언제부터인가 ‘엘리트 체육’에 대한 비판과 함께 ‘생활 체육’이 우리 사회의 화두로 떠올랐듯이, ‘생활 음악’이 활성화되어 한국대학생연합오케스트라와 같은 단체가 더욱 많아지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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