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학적인 연주, 피에르 로랑 에마르 피아노 독주회

신예슬 - 자유 주제 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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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3월 1일 12:00 오전

시학적인 연주, 피에르 로랑 에마르 피아노 독주회

“현대 피아노 음악의 수호자”라는 묵직한 수식어를 달고 있는 프랑스의 피아니스트 피에르 로랑 에마르. 그의 첫 내한 독주회가 지난 2012년 11월 25일 오후 5시 LG아트센터에서 열렸다. 연주된 곡목은 하인츠 홀리거(Heinz Holliger, 1939~)의 ‘엘리스- 세 개의 녹턴(Elis- 3 Nocturnes for Piano)’, 슈만(Robert Schumann, 1810~1856)의 교향적 연습곡(Symphonic Etudes Op.13), 드뷔시(Claude Debussy, 1862~1918)의 프렐류드 중 여섯 곡(6 Preludes from Book II), 리게티(Gyorgy Ligeti, 1923~2006)의 에튀드 6곡(6 Etudes)이었다. 진지한 대규모 작품도, 가벼운 소곡 일색도 아니었던 본 공연의 프로그램은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적당함이 있었다. 각기 다른 무게의 추들이 놓여서 평행을 이루고 있는 천칭처럼.
객석에 앉아 공연을 기다리는 5분 남짓의 시간에 관객들은 주로 프로그램을 들여다보고 있다. 각자의 관심사 및 이해도가 다른 탓에 사람들이 들여다보는 페이지는 각각이다. 필자의 경우, 이전까지 에마르의 연주를 음원으로만 듣거나 에마르의 이름을 텍스트로만 접했었기에 표지 사진에 눈길이 갔다. 신중하게 걷지만, 발걸음이 무겁진 않을 것 같은 인상. 왠지 연주에 기대가 된다기보다는 ‘신뢰’가 가는 느낌이었다. 어느새 LG아트센터의 크나큰 매력으로 자리 잡은 유쾌한 안내 멘트가 나오고, 에마르가 등장했다. 가장 최근에 구성된 그의 연주 프로그램인 이 네 곡은 공연 상황에 따라 그 순서가 바뀌기도 하지만 이날은 하인츠 홀리거의 ‘세 개의 엘리스’가 첫 곡이었다. 그리 낯선 형태의 현대음악은 아니었지만, 내게는 이것이 일종의 선언처럼 느껴졌다. 관성 탓일까, 붉은 객석에 앉는 것은 언제나 뭔가에 달큰히 취하는 기분이다. 그러나 높은 확률로 청취가 감상보다는 생각으로 이어지는 현대의 작품들은 종종 ‘너와 함께 태어난 음악은 이래. 아직도 고전, 낭만시대의 꿈을 꾸고 있니? 이걸 들어봐. 그리고 꿈 깨!’ 라고 말하는 듯했다. 물론 하인츠 홀리거의 작품도 그러했다.
홀리거의 작품 ‘엘리스-세 개의 녹턴’은 게오르크 트라클(Georg Trakl)의 시집에서 발췌한 문구들로부터 시작된 작품이다. 각 문구는 ‘1. 엘리스, 검은 숲에서 검은 새가 부르는 것, 그것이 너의 몰락이다. 2. 엘리스의 수정 같은 이마에 흐르는, 차게 식은 땀을 밤마다 마시는, 푸른 비둘기. 3. 엘리스, 금빛 거룻배가, 외로운 하늘에 맞닿은 너의 심장을 흔드는구나’ 이다. 이 문구들에서 느껴지는 공통적 요소는 ‘밤’ ‘외로움’ ‘붕괴’의 이미지다. 홀리거는 이러한 문학적 텍스트와 이미지들의 캐릭터를 무조음악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서정성이 느껴지도록, 그리고 표현적으로 구현해냈다. 물론 낭만시대의 ‘밤’에 대한 과하게 아름다운 예찬은 없었다. 홀리거의 밤은, 이를테면 밤의 꿈에서 깨어나 창문을 열고 찬 공기를 맞으며 낯섦과 어두움에 대한 공포를 맞닥뜨렸을 때 느껴지는 깊은 ‘밤’의 여러 가지 캐릭터를 표현한 것에 가까울 것이다. 각각의 녹턴은 유사한 뉘앙스로 거의 쉬지 않고 연주되었다. 밤의 고요함, 그리고 밤의 고독에서 느껴지는 어떠한 공포들 등 밤의 이미지는 에마르의 손에서 명확히 표현되어 관객들에게 들렸다.
비조성음악인 홀리거의 작품을 연주할 때 그의 – 아도르노 식으로 표현하자면 – “들을 수 없는 것을 듣게 하는” 능력이 돋보였다. 그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은 작곡가가 그려냈던 기보되기 전의 최초의 이미지인 것처럼 원전성이 느껴졌고, 에마르의 연주를 듣고 있으면 마치 그 작품들이 타당해지는 듯한 느낌을 갖는다. 에마르는 ‘어떻게 연주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이 작품을 어떻게 연주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아마도 에마르는 작품을 접할 때 ‘시학’의 과정에서부터 인식하지 않을까. 에마르의 연주에서 느껴지는 어떤 진정성·원전성은 그 ‘창작의 시발점’에의 관심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리라고 생각한다. 또한 그는 연주라는 권력적인 매개체를 통해서 관객들이 작품과 만나게 됨 또한 잘 알고 있지만 그걸 가능케 하는 것이 작품의 존재임을 강하게 인식하고 있다. 이날의 공연은 에마르의 연주를 듣는 것이 아닌 ‘특정 작품의 연주’를 듣는 것으로 필자에게 다가왔다. 에마르의 연주에서 작품에 대한 깊은 고민, 작품의 아이디어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가 다분히 묻어났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세 개의 엘리스의 잔향이 남긴 에마르의 연주에 대한 생각들이 퍼져나가고 있을 때 C#단조 화음이 울렸다. 이미 꿈에서 깬 나는 차갑고 낯선 바람을 쐬고 있는데 그제서야 에마르는 꿈을 이야기한다. 슈만의 교향적 연습곡, 피아노의 교향적 가능성을 양껏 느껴볼 수 있는 대곡이다. 이 곡을 생각하면 슈만의 또 다른 대곡 ‘카니발’이 생각난다. ‘카니발’이 축제에 참가한 인물을 묘사하는 음악 외적 캐릭터가 섬세하게 구현된 곡이라 한다면 교향적 연습곡은 순수한 음악적 캐릭터, 그리고 피아노적(pianistic)인 캐릭터를 다양한 방법으로 구사해내는 곡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에튀드이자 변주인 교향적 연습곡. 테마가 시작되자 리브레토도 연기자도 없는, 오직 음악뿐인 음악극이 시작된다. 에마르는 테마부터 도돌이표에 의한 반복을 충실히 이행했을 뿐만 아니라 악보에 기보된 사항들을 꼼꼼히 지켰다. 그러나 작품을 제대로 연주한다는 것이 악보를 제대로 재현시킨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그는 슈만 사후에 추가된 유작 에튀드까지 이날 공연에 포함시켰다. 에마르가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는 것은 슈만의 악보에 기보된 작품이 아니라, 아직 기보되지 않고 상상 속에 존재하던 그 작품, 혹은 그 이미지였다. 에마르는 악보 또한 존중하지만 가장 존중하는 것은 작품이다. 물론 그 이미지를 재현하는 과정에 있어서 미스터치라는 작은 흐트러짐도 있었지만 전체적인 흐름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에마르의 뛰어난 ‘작품 본연’의 접근은 이러한 연주의 본질적 측면뿐만 아니라 세부적 음의 표현에 있어서도 두각을 드러냈다. 에마르의 슈만은 굉장히 단호하지만 그 소리만큼은 굉장히 부드러웠고, 한 음 한 음을 대하는 그의 명확한 태도는 가히 놀라웠다. 에마르는 이 작은 한 음, 이 화음이 어떤 맥락에서 등장했고 어떻게 소리 나야 할지 정확히 알고 있는 듯 했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었다. 겉모양에 속기 쉬운 아름다운 협화음들이 사실은 전후 맥락에 따라 엄청난 불협화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 평탄하게 진행되는 와중에 어떤 지점에서 그 진행이 ‘멈칫’하고 방향을 트는지를 드러내는 것. 이는 마치 풀기 어려웠던 수학 문제의 증명을 보는 듯한 시원한 기분이었다.
작은 요소들이 어떻게 음악적으로 기능하는지 명확히 드러내는 것. 이는 다음 프로그램이었던 드뷔시의 프렐류드에서 더욱 효과적으로 나타났다. 바로 어떤 것이 농담인지 가려내고 그 농담을 적극적으로 관객들에게 던지는 것이다. 드뷔시 프렐류드 전집을 최근에 음반으로 내놓은 바 있기에 나에게 아마 그의 손에 가장 잘 익어 있는 레퍼토리가 드뷔시일 거란 추측이 있었고, 가히 경탄할 정도의 뛰어난 연주가 나의 추측에 명쾌하게 ‘그것은 당연’하다고 대답해주었다. 이날 연주되었던 여섯 곡의 프렐류드 중 첫 곡이었던 ‘피크웍경을 예찬하며(Hommage a Pickwick Esq P.P.M.P.C.)’는 아이러니적 농담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경우엔 드뷔시의 의도가 작품 전면에 드러나 있기에 어쩌면 ‘오버 액팅’하는 과한 연주를 불러내기 쉽다. 그러나 에마르는 전체적인 균형을 잃지 않으며 웅장한 첫 부분으로 대비되는 피크웍경의 ‘지위’와 고음부의 빠르고 작은 움직임으로 대비되는 피크웍경의 ‘캐릭터’를 과하지 않지만 명확하게 드러냈다. 이와 유사하게 다른 작품들에서도 에마르는 군더더기는 없지만 반짝반짝 빛이 나는 몇몇 순간들을 충분히 선보여줬다. 비교적 편안히 감상하고 있던 나를 압도시켰던 것은 드뷔시의 마지막 곡이었던 ‘불꽃(Feux d’Artifice)’이었다. ‘불꽃’에 대한 에마르의 표현은 너무나 타당하고 당연하게 들려서 그의 모든 표현이 작곡가의 의도인 것처럼 느껴졌을 뿐만 아니라 불꽃을 감상하는 동안은, 지금 감상하는 것이 타건과 타현으로 비롯된 소리를 잠시 잊기도 했다. 소리처럼 명백한 미디어가 투명한 미디어처럼, 마치 들리지 않는 양 나에게 불꽃이라는 단어가 ‘상징하는 바’만을 전달하는 느낌이었다.
이는 작곡가의 의도 자체를 연주로 표현해내는 것을 넘어서는 가능성까지 있다고 생각되었다. 작품이 에마르의 연주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임을 앞선 작품들의 연주를 통해 알 수 있었지만 그 작품들은 스케치로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을 드뷔시의 연주가 끝나고 절실히 느꼈다. 채색을 하는 것은 에마르다. 앞서 연주되었던 홀리거의 작품이 문학적·언어적 캐릭터에의 표현, 슈만의 교향적 연습곡이 교향적·피아노적, 따라서 음악적인 캐릭터의 표현이었다면, 드뷔시의 작품은 문학적·언어적 캐릭터에 대한 음악적 표현이었다. 그리고 리게티의 작품들은 문학적·언어적 캐릭터에 대한 음악적 표현, 곳곳에 숨겨진 음악적 농담 등 여러 요소들이 드뷔시의 음악과 비슷한 주파수를 가지고 있었다. 에마르의 드뷔시 연주에서 절제된 해석이 큰 매력으로 다가온 것과 유사하게 리게티 연주에서도 에마르는 깔끔한 해석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리게티 연주에서 가장 돋보였던 것은 해석보다 그 해석을 가능케 하는 완벽한 테크닉이었다. 대서사시 류의 난곡이라기보다는 테크닉적 난곡으로 널리 알려진 리게티의 에튀드. 많은 이들이 난곡임을 알고 있고 나 또한 그렇지만, 놀라웠던 것은 ‘어렵게 들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약간은 무덤덤하게 연주해나가는 그 태도는 관객이 테크닉보다 드뷔시의 연주에서 그랬던 것처럼 작곡가의 ‘의도’나 표제가 ‘상징하는 바’를 들을 수 있게 했다. 아, 어떻게 많은 작곡가들이 에마르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리게티 연주는 그야말로 그가 ‘현대 피아노 음악의 수호자’임을 증명하고, 어쩌면 그 별칭도 에마르에게 부족할 수 있다는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이날 연주의 프로그램은 첫 내한 공연에서 그의 피아니즘을 선보이기에 완벽했다. 문학적·언어적 캐릭터의 표현에서 음악적 캐릭터의 표현으로, 그리고 문학·언어적 캐릭터에 대한 음악적 표현으로 유기적으로 짜인 프로그램은 그것만으로도 그의 음악에 대한 깊은 이해도를 알 수 있게 했다. 또한 작품의 본질적 핵심을 찌르는 표현뿐만 아니라 표면적으로 들리는 세세한 표현들, 그리고 테크닉·음색까지도 흠잡을 데 없이 높은 완성도를 보였음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작품을 어떻게 연주하는가의 문제는 작품을 어떻게 인식하는가의 문제로부터 비롯된다. 음악을 잘 아는 것, 그리고 잘 표현하는 것. 에마르는 그 자신이 음악을 받아들이는 훌륭한 감상자이자 음악을 연구하는 음악학자, 그리고 소리를 만들어내는 훌륭한 창작자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음향학적으로 소리는 한 번 발생한 이상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에마르의 연주가 만들어낸 소리의 잔향은 여전히 나에게 울리고 있다. 잔향이 빚어낸 이 글이 어떤 이들에게는 에마르가 만들어내는 탁월한 타현의 울림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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