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헌
자유 주제 평론
김세형 가곡의 재조명 :
선생후숙 숙이후생의 작곡가
공연평
금난새와 한국대학생연합오케스트라의 공감II
김세형 가곡의 재조명 : 선생후숙 숙이후생(先生後熟 熟而後生)의 작곡가
1. 두 종류의 작곡가
서양음악사에는 두 종류의 작곡가가 존재한다. 어느 한 시대를 정점에 올려놓은 작곡가와 어느 한 시대와 다른 한 시대를 연결한 작곡가. 전자에 해당하는 작곡가로는 바흐(Johann Sebastian Bach)와 하이든(Franz Joseph Haydn), 베르디(Giuseppe Verdi) 등을 들 수 있으며, 후자에 해당하는 작곡가로는 몬테베르디(Claudio Monteverd)와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등을 들 수 있다.
서양음악사에는 뚜렷한 몇 차례의 양식적 변화가 있었다. 대위법적 음악에서 모노디 양식으로의 전환, 계속저음 양식에서 갈랑 양식으로의 변화, 그리고 조성음악에서 무조음악으로의 전환 등이 바로 그것이다. 서양음악사에 비해 짧은 역사를 지니는 한국의 양악사에도 그 흐름의 변화는 존재한다. 그러나 그 의미와 양상은 서양음악사와 다르다. 서양음악의 ‘수용과 숙성’에서 그것의 탈피와 ‘한국적 정체성 추구’로의 전환이 한국 창작음악에서 나타난 최초의 주목할 변화이다.
선생후숙 숙이후생(先生後熟 熟而後生). 먼저 미숙함에서 출발한 후 익숙해지고, 완전히 익숙해진 이후에 그것을 뛰어넘는 새로운 경지가 창출된다는 말이다. 즉, 서양음악에서 탈피하기 위해선 먼저 서양음악을 정통하게 알아야 한다. 김세형이 바로 그러한 작곡가였다. 홍난파나 현제명, 박태준을 비롯한 한국의 초기 가곡 작곡가들에 비해 학술적·대중적 인지도는 적을지 몰라도, 그의 음악은 오히려 그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작곡가들의 음악에 비해 시대를 앞서나간 면모가 담겨 있다. 그는 동시대의 작곡가들에 비해 한층 ‘성숙한’ 서양음악을 달성한 한편 다른 작곡가들보다 한 발 앞서 서양음악을 탈피하여 ‘한국적’ 음악 찾기를 모색하였다. 즉, 홍난파·현제명·박태준과 김순남·이건우·나운영의 사이에 김세형이 존재하는 것이다.
2. 서양음악의 수용과 성숙, 그리고 탈피와 정체성 찾기
문화와 문화의 만남은 변화를 수반한다. 우리나라의 서양음악 수용이 능동적이었는지, 아니면 수동적이었는지는 많은 논란이 따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상호 교류에 의하여 양쪽 모두가 서로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것이 아닌, 어느 한 쪽에서 다른 한 쪽으로 일방적인 수용이었으며 매우 급격하게 이루어졌음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탈식민주의 이론(post-colonialism)에 따르면, 서로 다른 두 문화의 만남에서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일 경우 그 수용에 세 가지의 단계가 나타난다. 첫 번째 단계는 ‘동화 단계’로, 피식민지 사회의 지식인들이 자신들을 점령한 권력의 문화에 동화되는 단계이다. 두 번째 단계는 ‘문화적 민족주의 단계’로, 피식민지 사회의 지식인들이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기억하고 자신들을 동화시키려는 시도에 저항하는 단계다. 마지막 세 번째 단계는 ‘민족주의 단계’로, 문화적 민족주의를 거친 뒤 이제는 자신이 나서서 사람들을 움직이려는 단계다.
우리의 서양음악 수용 과정을 살펴보면 이러한 단계를 그대로 따랐음을 알 수 있다. 19세기 후반 개신교의 찬송가 보급과 양악대의 창설로 인하여 본격적인 서양음악의 수용이 이루어진 이후 1930년대에 이르기까지의 한국 양악사는 첫 번째 단계인 ‘동화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1940년대 광복을 맞으며 우리의 음악을 찾고자 하는 논의가 활발해지며 한국 양악사는 두 번째 단계인 ‘문화적 민족주의 단계’로 들어선다(이후 세 번째 단계가 등장하는 것은 1980년대로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서양음악이 최초로 ‘창작’된 것은 1905년 김인식에 의해서였다. 19세기 말 서양음악이 본격적으로 유입된 이후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창작음악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김인식·이상준·백우용 등에 의해 창가(唱歌)를 중심으로 전개되던 초기의 창작음악은 1920년대 이후 동요와 가곡이 나타나며 양적·질적으로 보다 다양해졌다. 홍난파·박태준·현제명·김동진·이흥렬 등은 1920~1930년대 한국의 창작음악계를 대표하던 작곡가들이다. 하지만 당시의 창작음악은 대부분 작곡 전공 출신이 아닌 성악, 또는 기악 전공 음악가들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장·단조 체계와 기능화성에 충실한 전형적인 조성음악에 머물러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1940년대에 ‘한국 음악’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됨과 동시에 작곡을 체계적으로 공부한 신진 음악가들이 등장하며 변모하기 시작한다. 특히 김순남과 이건우의 등장은 한국 가곡에 가히 혁신적 변화를 가져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순남과 이건우는 둘 모두 작곡가로 전문 교육을 받았다는 점에서 1920~1930년대의 작곡가들과 차별화되며 이들의 음악어법 또한 기존의 작곡가들과 크게 차이 난다. 즉, 1920~1930년대의 음악가들을 서양의 전통적인 조성음악을 배우고 받아들이던 ‘제1세대’ 음악가라 할 수 있다면 1940년대의 ‘제2세대’ 음악가들은 서양의 현대음악을 받아들여 서양음악과의 ‘동시대성’을 꾀했다. 그러나 이들의 업적은 단지 현대적인 음악어법을 받아들였다는 것에 있지 않다. 그들은 현대적인 음악어법을 받아들인 동시에 ‘민족적인’ 요소 또한 추구했다. 즉, 첫 단계인 ‘동화 단계’에서 벗어나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기억하고 자신들을 동화시키려는 시도에 저항하는 ‘문화적 민족주의 단계’로 접어든 것이다. 이후 그들이 추구했던 민족적인 요소의 추구와 한국적 정체성 찾기는 후대의 작곡가들에 의해 꾸준히 계승되었다.
3. 평가절하된 작곡가 김세형
앞서 1920~1930년대 초창기 한국 가곡은 장·단조 체계와 기능화성에 충실한 전형적인 조성음악에 머물러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당시의 가곡은 서양의 ‘성숙한’ 조성음악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숙한’ 수준이었다 할 수 있다. 똑같이 조성 체계와 형식주의 미학을 근간으로 하는 음악일지라도 슈베르트(Franz Peter Schubert)와 슈만(Robert Alex-ander Schumann)의 가곡을 한국의 초기 가곡과 비교한다면 당시 한국의 창작음악은 서양음악에 비해 한참 ‘미성숙’한 수준이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즉, 1920~1930년대의 한국 가곡은 “예술가곡”이라기보다 좋게 말해 “정다운 가곡”이나 “애창곡”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물론 약 1700년대부터 등장한 조성음악을 서구가 200년에 걸쳐 발달시킨 것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짧은 우리나라 조성음악의 역사를 감안한다면 이것은 당연한 현상이며 부끄러운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언어의 강세와 음악의 강세를 흔히 무시하는 등 가사와 음악의 관계가 유기적이지 못하다는 점, 대부분의 반주가 선율에 종속되어 있거나 단순히 화성적 배경을 제공하는 역할에 머무른다는 점, 화성의 사용에 있어 미성숙한 측면이 많이 나타난다는 점 등은 한국의 초기 가곡이 지닌 한계점이다.
그렇다면 이 시기의 한국 가곡은 미성숙한 서양음악의 단계에 머물러 있기만 했으며 한국적 정체성 찾기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던 것일까? 작곡가 김세형의 역할과 업적이 재조명 받아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김세형은 1904년 평양에서 태어나 평양 숭실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한 후 1932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 주 챔먼(Champman) 대학에서 음악이론을 전공했고, 웨스턴 대학원 작곡과를 수료하였다. 이후 국내에서 이화여전 교수·서울대 음대 교수·숙명여대 학장·경희대 음대 학장을 지냈으며 1999년 별세하였다. 김세형 작품 세계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가곡이다. 특히 미국 유학 시절인 1932년 길버트 모일(Gilbert G. Moyle)의 영시를 가사로 연가곡 ‘먼 길(The Long Way)’을 작곡하였는데,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연가곡집에 해당한다(국내에선 한글 가사로 번역하여 1936년 발표). 이에 대하여 당시의 음악 평론가인 김관은 “다른 조선 작곡가가 가지지 못한 새로운 관념과 구상을 가진 작곡가”이며, “조선의 재래 작곡가에게서 찾을 수 없는 새로운 힘과 아름다움을 가진 작곡가”로 평했다.
그러나 김세형에 관한 평론이나 연구는 지금껏 이것이 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에 대하여 나운영은 김세형의 연가곡 ‘먼 길’을 “그야말로 우리나라 최초의 예술적인 가곡이라고 말해도 좋을 줄로 생각된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에서는 전혀 연주되지 않고 있으니 그 까닭이 무엇일까”라고 적고 있다. 또한 음악학자 노동은은 김세형을 “역사 밖으로 평가절하된” 작곡가라 칭하며 “한국 근대음악사에서 1930년대 중반까지 작품의 미적 가치로나 역사적 가치로 보아서 김세형을 앞지를 수 있는 사람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홍난파와 현제명 산맥으로 이루어진 악단만이 평가를 받게 되었는가?”라고 묻는다.
그렇다면 그의 작품에서 어떻게 동시대의 작곡가들이 비해 한층 ‘성숙한’ 서양음악의 면모와 함께 ‘한국적 음악 찾기’의 시도가 나타나는지 살펴보자.
4. ‘성숙한’ 서양음악, 연가곡 ‘먼 길’
김세형의 가곡 모두가 한국 초기 가곡 작곡가들의 작품에 비하여 ‘성숙한’ 서양음악의 면모를 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의 작품 중 유학을 떠나기 이전, 1929년 작곡된 ‘추억’은 동시대의 한국 가곡과 비교해 그리 큰 차이점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피아노 반주가 선율에 종속되어 있거나 단순히 화성적인 배경을 제공하는 역할에 그치고 있으며 화성의 사용도 무난한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선율 역시 4마디를 기본 단위로 하는 대칭적·규칙적인 악구를 단 한 번도 탈피하지 않아 단조로운 모습을 보이며 순차 진행 위주의 누구나 무리 없이 쉽게 부를 수 있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1925년, 그의 처녀작인 ‘야상’에선 동시대의 가곡들과 차별화된 면모를 일부 엿볼 수 있다. 특히 피아노 반주의 짜임새(texture)가 동시대의 가곡에 비하여 충실하고 탄탄하며 필드(John Field)나 쇼팽(Fryderyk Franciszek Chopin)의 녹턴을 떠올리게 하는 음형으로 이루어져 시의 제목과 상응하는 점이 눈에 띈다. 또한 곳곳에서 반음계적인 변화 화음을 구사함으로써 화성적 어법이 동시대의 가곡에 비해 보다 풍부한 점 역시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초기의 두 작품에 비하여 유학 중에 발표한 연가곡 ‘먼 길’은 그의 작품이 짧은 시간에 한층 발전하고 성숙했음을 보여준다. 앞서 언급하였듯 한국 최초의 연가곡인 이 작품은 ‘그대에게 매인 나의 마음(My Spirit With Thine Enchained)’ ‘모든 행복이 내 것이라도(If All The Happiness That Is Were Mine)’ ‘잘 자오(Good Night)’ ‘오! 복된 잠이여(O! Blessed Sleep)’의 네 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각 연가곡을 통일성 있게 묶어주는 조성 계획이 눈에 띈다. 첫 곡과 두 번째 곡은 B♭장조로써 으뜸조성을 유지하다 세 번째 곡에서 딸림조성인 F장조로 변화한다. 그 뒤 마지막 곡에서 다시 으뜸조성과 장단조 혼용 관계인 B♭단조로 연가곡을 끝마친다. 이러한 조성계획은 연가곡에 통일성을 부여할 뿐 아니라 시의 흐름과도 밀접한 연관을 맺는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시는 연인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노래하는 동일한 내용이므로 으뜸조성에 머물러 있다. 반면 세 번째 곡은 그러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연인이 잠든 사이 그 품을 벗어나 먼 길을 떠나야 함을 토로하므로 딸림조성으로 조성이 변화한다. 이후 마지막 시는 괴롭고 힘든 상황을 잊기 위해 차라리 잠들기를 기원하는 내용이기에 단조의 조성과 어울린다. 또한 연가곡 전체에 순환 동기(cyclic motive)를 사용함으로써 전체적인 응집성을 꾀한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첫 번째 곡에서 등장한 음계의 다섯 번째 음에서 시작하여 음계의 세 번째 음까지 상행하는 동기는 두 번째 곡에서 리듬의 변화와 함께 다시 등장하며, 세 번째 곡에서는 축약된 형태로, 마지막 곡에서는 역행(retrograde) 형태로 사용되어 연가곡 전체를 묶어준다.
그런가 하면 여러 가지 방법으로 가사의 내용을 음악적으로 그려내는 가사 그리기(word painting) 기법이 곳곳에 사용된 점도 동시대의 한국 가곡에 비하여 진일보한 모습이다. 첫 곡에서는 “고개(hill)” “높이(hight)” “오르다(rise)” “창공(heaven)” 등의 가사를 높은 음으로 처리하여 가사를 표현함은 물론, “얽매이다(enchained)”는 가사에선 이명동음 화음과 표기법을 사용하였다 돌아옴으로써 벗어나려 해도 다시 되돌아올 수밖에 없는 모습을 음악적으로 그려낸다. 두 번째 곡은 “세상 누구보다 행복하게 살아도, 그러해도 그대가 없다면 나는 혼자 한숨을 쉬리라… 모든 행복도 지루하리라”는 가사를 노래할 때 B♭단조로 조성이 변화함으로써 가사의 내용을 뒷받침한다. 세 번째 곡 역시 “지리한 혼돈이 가까웠다. 지금 장미가 피는 네 품을 떠나서 멀리 방황하련다”는 가사에서 F단조로 조성이 변화하며, 이후 잠든 연인의 평안을 노래할 때에는 부분적으로 장단조 혼용 화음을 사용하여 연인을 두고 떠나가야 하는 시적 화자의 마음을 나타낸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곡은 “잠이여 내 영혼을 위로해주며 내 상한 곳을 어루만져라”라는 대목에서 B♭장조로 전조함으로써 평안을 꿈꾸는 시적 화자를 음악적으로 표현한다. 또한 마지막 곡에서 역행 형태로 등장하는 순환동기의 사용은 시간을 거슬러 연인의 품을 떠나기 이전으로 되돌아가기를 희망하는 시적 화자의 내면을 암시하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화성의 사용도 곳곳에서 기능화성에 충실한 전형적인 조성음악의 면모를 벗어나 한층 세련된 측면을 보인다. 풍부한 반음계적 화음의 사용은 마치 슈만의 가곡을 연상시키며, 곳곳에서 기능적인 용법을 탈피한, 그러나 자연스럽게 음악적 흐름을 이끄는 화성의 사용들이 눈에 띈다. 선율 역시 4마디 단위의 대칭적·규칙적인 악구와 누구나 쉽게 부르기 무리 없는 단순한 선율을 탈피하여 한층 세련된 면모를 보인다. 특히 이러한 화성과 선율을 이끌어나가는 종지의 사용도 기존의 한국 가곡에 비하여 한층 발전한 모습을 보여준다. 조성음악에서 종지는 화성 진행의 목적지일 뿐만 아니라 선율의 전개에 큰 영향을 미치며 조성의 확립 및 구조적인 특징들을 결정짓는다. 연가곡 전체에서 “완전 정격종지”는 단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는 반면 다양한 수단을 활용하여 종지를 연장, 회피하는 모습은 김세형이 얼마나 조성음악에 능통한 작곡가였는지 짐작하게끔 한다. 그 밖에 성악 선율의 종속에서 벗어나 한층 풍부해진 피아노 반주와 전주 역시 주목할 점이다.
이러한 ‘성숙한’ 서양음악 작곡가로서의 그의 면모는 또 다른 가곡 ‘임의 생각’에서도 잘 드러난다. 곳곳에서 나타나는 가사 그리기는 물론 풍부한 피아노 반주와 반음계적 변화화음의 사용은 연가곡 ‘먼 길’보다 한층 과감한 면모를 보인다. 잦은 증화음의 사용과 먼 관계의 화음으로의 도약, 그리고 뚜렷한 종지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 점 등은 마치 후기 낭만주의 작곡가 볼프(Hugo Philipp Jakob Wolf)의 가곡을 연상케 할 정도이다.
5. ‘한국적’ 음악 찾기, 가곡 ‘뱃노래’
파격. 앞서 선생후숙 숙이후생(先生後熟 熟而後生)이라 하였듯 격(格)을 깨기 위해선 먼저 그것에 정통하여야 한다. 즉, 서양음악에서 탈피하기 위해선 먼저 서양음악을 정통하게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미 동시대의 작곡가들에 비해 한층 ‘성숙한’ 서양음악을 구사했던 김세형은 1934년 가곡 ‘뱃노래’를 발표함으로써 또 한 번의 변화를 보여준다. ‘뱃노래’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우리나라 가곡에 큰 획을 그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뱃노래’는 성악 선율에서 독립한 피아노 반주가 한눈에 들어온다. 피아노 반주는 분산화음과 아르페지오(arpeggio) 꾸밈음을 이용하여 배가 나아감에 따라 출렁이는 강물을 세심하게 묘사한다. 또한 풍부한 반음계적인 변화화음과 함께 부가음을 가진 화음을 대거 사용한 것도 ‘뱃노래’의 특징이다.
그러나 ‘뱃노래’에서 주목할 점은 이러한 화음들이 기능화성적인 조성음악의 틀을 벗어나는 동시에 전통적인 선율 및 장단과 결합하여 새로운 한국 가곡의 방향을 모색한다는 점이다. 서양의 조성 체계는 음계를 이루는 음들 간의 기능에 따라 형성되는 위계 구조를 그 기반으로 한다. 즉, 조성 체계에서 중심을 이루는 것은 으뜸화음이며, 나머지 모든 화음은 이와 관련을 맺고 맡은 바 기능을 수행한다. 그러므로 부가음을 갖는 화음을 이용하여 화음의 정체성을 모호하게 흐린다면 이는 곧 기능화성의 약화로 이어진다. 또한 반음계적 변화화음을 기능적 관점을 떠나 색채적 측면으로 사용한다면 이 역시 조성 체계를 약화시키게 된다. ‘뱃노래’는 이렇게 약화된 조성 체계의 빈틈을 전통적인 선율과 장단이 파고들어 서양음악과 민족적 요소의 결합을 이루어낸다. ‘뱃노래’의 선율이 음계의 네 번째 음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있는 점, 그리고 이끔음인 음계의 일곱 번째 음이 마지막 종지의 순간에 단 한 번만 선율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한국적’ 음악의 추구는 또 다른 가곡 ‘반딧불’과 ‘우물길’에서도 잘 나타난다. ‘반딧불’은 ‘뱃노래’와 마찬가지로 부가음을 갖는 화음과 색채적인 화음의 사용을 통하여 서양의 기능화성 논리를 약화시킬 뿐 아니라 복합박자인 8분의 6박자를 택하여 민속적인 리듬을 ‘뱃노래’보다 풍부하게 드러낸다. 또한 음계의 네 번째 음과 일곱 번째 음을 선율에서 배재하고 있다.
이렇듯 서양의 조성 체계를 약화시키되 완전히 무너뜨리지 않은 체 전통적인 요소를 결합시켜 한국적인 면모를 추구하는 작곡 방식은 이후 많은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여러 작곡가의 작품에서 등장하는 한국 가곡의 특징 중 하나로 자리 잡는다.
6. 김세형의 재조명
개신교의 찬송가 전파와 양악대의 창설로 서양음악이 본격적으로 국내에 들어온 지 불과 반세기도 안 되어 이처럼 ‘성숙한’ 서양음악을 구사하는 작곡가가 등장했다는 것은 분명 우리 양악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뿐만 아니라 김세형은 그것에 그치지 않고 이를 벗어나 ‘한국적’인 음악의 방향을 모색하였던 점에서 더욱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러한 시대를 앞서나간 측면이 그의 가곡을 대중적인 관심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고, 이것이 다시 학술적인 조명을 힘들게 하였을지 모른다. 그의 음악은 폭넓은 대중적 사랑을 받는 “정다운 가곡”이나 “애창곡”이 되기엔 예술적인 깊이가 너무 깊었다.
김세형이 지금껏 크게 주목받지 못한 또 하나의 이유는 아마도 어느 한 쪽에 뚜렷하게 속하지 않는 그의 활동 시기와 작품 경향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주로 1930년대에 작품 활동을 했던 그를 홍난파와 현제명처럼 1920년대에 한국 가곡을 개척했던 인물로 평가하기엔 무리가 따른다. 또한 그렇다고 1940년대 김순남과 이건우처럼 현대성을 추구하며 한국 창작음악에 혁신적 변화를 가져온 인물로 평가하기도 힘들다. 그러나 이러한 김세형의 입지가 바로 그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그의 작품은 홍난파·현제명·박태준 등 ‘개척자’의 음악에 비해 훨씬 완성도 높고 성숙한 서양음악의 면모를 보여주는 동시에 김순남·이건우 등 ‘개혁파’의 음악에서 볼 수 있는 ‘한국적 음악 찾기’의 모습이 한발 앞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김세형은 한국 최초의 ‘전문적 작곡가’이자 한국 창작음악에서 이처럼 중요한 의미를 지님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에 대한 평론은 물론 그에 관한 일차적인 학술 연구조차 턱없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본 평론이 작곡가 김세형과 그의 작품이 우리 창작계에서 갖는 역할과 의미를 짚어보는 계기가 되는 동시에 후속 평론과 연구를 위한 디딤돌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