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은 시작 속에 있다”고 엘리엇은 노래한다. 응모작을 개별적으로 심사하기 전, 올해에는 당선작을 내기가 어렵지 않겠느냐는 것이 심사위원들의 중론이었다. 그리고 결론은 그 속에 있었다.
예선을 거쳐 최종 심사의 대상으로 뽑힌 세 편의 응모작에 대해, 심사위원 전원이 한결같이 “세 편 모두 재미있게 읽었다”는 소회를 피력했다. 소재가 적절했다든가 읽을거리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읽을거리가 있다는 것과, 그것을 뛰어난 솜씨로 요리했다거나 제대로 소화했다는 것과는 다르다. 게다가 자유 주제 평론과 공연평 사이에 괴리가 있었다. 당선작을 낼 수 없었다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듣는 음악에서 읽는 음악으로’(신예슬) ‘김세형 가곡의 재조명’(김상헌) 두 편을 우수작으로 뽑을 수 있었던 것은 다행한 일이다. 두 편 모두 취지어수(取之於瘦), 남들이 거들떠보지도 않거나 많은 사람들의 눈에서 멀리 떨어져 잊혔거나 소외된 곳에서 소재를 찾았다는 것을 치하하고 싶다.
돌 속에 묻혀 있어 눈여겨보는 사람이 별로 없거나 많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가버리는 구슬을 찾아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평론가의 소중한 덕목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김세형 가곡의 재조명’은 역사적으로 응당 평가되어야 할 작곡가임에도 소홀한 대접을 받아왔던 김세형을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심사위원들의 주목을 받았다.
천리마를 가려낼 줄 아는 백락(伯樂)은 어느 시대나 어느 분야에도 드물다. 그렇거늘, 많은 사람들이 ‘정다운 가곡’과 ‘애창곡’ 타령이나 되풀이하고 있는 터에, ‘욕됨을 당하고 노예들의 손에서 보통 말들과 섞여 마구간에서 죽어버린(只辱於奴 人之手, 騈死於槽歷之間)’ 천리마를 누군가 찾아 나섰다면 어찌 장하다 하지 않으랴. 물론 김상헌 홀로 김세형을 찾아낸 것은 아니라는 점을 스스로도 밝히고 있지만, 백락이 모처럼 천리마를 찾아냈다 해도 그 천리마에 관심을 보이고 돌보려는 후속 타자가 없다면 헛된 일이다. 김상헌은 그 후속타자라는 몫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그런데 김세형을 재조명하는 것은 좋았지만 ‘그의 가곡 어떤 점이 어떻게 훌륭한가에 대한 설득력이 약하다’는 지적도 있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공연평이 자유 주제 평론에 비해 너무 격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교본이 있을 수 없어 평자의 안목이 생생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이 공연평이다. 김상헌은 자유 주제 평론에서 백리마 정도는 찾았구나 싶었는데 공연평에서는 안도색기(按圖索驥), 두꺼비를 천리마랍시고 들고 나온 백락자(伯樂子·백락의 아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씁쓸했다. 끊임없는 변신으로 앞으로 더욱 성장해주기 바란다.
‘모-노, 읽기 위한 음악’을 내놓으면서 슈네벨 스스로도 많은 독자들의 공감을 얻으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호기심 어린 눈길을 잠깐 던져본다든가, 이러쿵저러쿵 입방아를 찧어댄 사람이야 적지 않았겠지만 이 작품이 등장하고 나서 반세기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 작품을 진지하게 캐고 들어간 음악도는 극소수였을 것이다. 그 몇 사람의 순례 행렬에 투신한 신예슬에게 갈채를 보내고 싶다.
“‘단선적인’ ‘일방향의’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mono라는 단어는…”이라고 모노의 뜻을 규정하면서도, 신예슬은 ‘단선적’이거나 ‘일방향’이라기보다는 폴리(poly)적인 시각, 복선적이며 전방위적인 시각으로 이 작품에 접근해갔다. 그렇기는 해도 참신하고 산뜻한 시선은 별로 느낄 수 없었다는 것이 좀 아쉽다.
무릇 아름다움이란 ‘주관과 객관, 창조자와 향수자(享受者) 상호의 교접 속에서만 태어날 수 있는 그 어떤 것’이라고 알렉산더 네하마스(Alexander Nehamas)는 주장한다. 슈네벨 또한 향수자의 마음속에 그려지는 어떤 풍경, 상상세계에서 배태되는 심상(imagery landscape)의 창조를 기대하고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것이 앤티뮤직의 신호탄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음악의 개념에 대한 새로운 틀 짜기에 참여한 사람으로 신예슬이 존 케이지(‘4분 33초’), 아르보 패르트(‘타불라 라사’) 등에 대해 잠깐이나마 언급했다는 것은 적절한 처사였다. 그런데 그것이 너무 ‘잠깐’에 그치고 말았다는 것이 또한 아쉽다. 그들이 추구했던 어떤 공통인자(가령 소리와 정적, 정적 속에 내재된 소리의 세계, 정적 회귀에의 갈구 등)에 대한 좀 더 깊은 고찰이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글 전체가 너무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라고 지적하는 심사위원이 있었는가 하면, “일반 독자를 상대로 하는 글을 쓸 수 있을까”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이런 지적을 받아들여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을 좀 더 단순하고 명료하게 기술하는 기술을 터득한다면, 앞으로 치솟아 오를 무한한 공간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더러는 잘못 조리되어 설익은 채로 남겨진 부분이 없지는 않았어도 전체적으로는 신예슬의 공연평이 어느 응모자에 비해서도 음미할 만했다는 것을 부언하고 싶다.
2013 제15회 객석예술평론상 심사위원장 음악평론가 이순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