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해 시인 안데스 사진전

그의 시선은 언제나 그곳에 있다

우수 컨텐츠 잡지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4월 1일 12:00 오전


▲ 오래된 직접 민주주의

이 작품들 위에 어떤 글을 더 붙일 수 있을까. 오랫동안 생각했지만, 답은 없다. 그리고 답이 없다는 생각이 들자 지금 나는 오히려 빠른 속도로 자판을 누르고 있다. 무엇을 잘 말해보려고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살아있는 언어 행위이리라.

노동의 의미를 찾아나선 시인
‘박해받는 노동자의 해방’을 뜻하는 필명의 시인 박노해는 그 이름만 불러도 가슴이 뛴다. 1983년 ‘시다의 꿈’ ‘하늘’ ‘얼마짜리지’ ‘바겐세일’ ‘그리움’ ‘봄’ 등 여섯 편의 시로 문단에 등장한 시인은 이후 1980년대를 문자로 뒤흔들었다. 이듬해 출간한 시집 ‘노동의 새벽’이 바로, 그것이다. 1984년 첫 시집 펴낸 후, 활발한 노동운동을 펼치던 박노해는 1989년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결성을 주도한 혐의의 ‘반국가단체수괴’로 1991년 사형 구형을 받는다. 이후 1998년 광복절 특별사면조치로 석방 후 국가의 보상금도 거부한 채,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않겠다”며 세계의 분쟁지역에 눈을 돌렸다. 그는 독일 베를린을 시작으로 세계 빈곤지역과 분쟁의 현장을 돌며 ‘문화나눔’ 운동을 펼치고 있다.
시인 박노해가 세 번째 사진전을 열었다. 서울 종로구 광화문을 지나 청와대를 돌아서 언덕을 올라가면, 부암동 산모퉁이 아래 있는 작은 건물. 그곳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는 잉카의 마지막 후예 ‘께로족’의 삶을 담았다.
그는 문명의 이기를 받아들이지 않는 지역이나, 혹은 문명의 잔혹을 받아들인 지역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이제 글을 넘어 ‘카메라’라고 했다. 그리고 가장 반기는 것도 그것이라고 했다.
잉카의 옛 수도 쿠스코에서 해발 5천 미터의 높은 안데스 산맥을 오르면 만날 수 있는 께로 마을은 아직도 현대문명을 뒤로 하고 그들만의 의식과 방법으로 살아가고 있다. 알파카를 치는 목축업과 감자 농사, 여인들이 옷감을 짜는 소일거리가 그들의 생업이다. 족장을 선출하는 방식이나 물물교환의 방법, “130여 명의 남녀노소가 초원에 둘러앉아 눈비를 맞아가며 여섯 시간 동안 회의를 이어”가는 모습은 진정한 민주주의의 발현이다.

그가 구현하는 작가 정신
시인은 께로족이 사는 방법을 그만의 시선으로 담아내 작가 정신을 보여준다. 줌이 없는 버튼식 필름 카메라는 왜곡을 허용하지 않으며, 특별한 사진을 제외한 흑백의 형식도 같은 의미다. 또한 유심히 작품들을 살펴보면 대부분의 사진은 피조물의 아래에서 시선이 시작된다. 초미의 전지적 시선을 배척한, 철저하게 아래로부터의 의식이 느껴진다.
넓지 않은 전시장을 한 바퀴 돌면 묘하게 한 부족의 이야기를 습득한 기분이 들고 만다. 물론 사진마다 있는 그의 글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고독한 전위의 걸음으로 만년설산을 넘어간다”는 께로스의 청년,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그 뼈를 다듬어 연주해왔다”는 잉카 전통 악기 께나. 께나를 부는 아빠와 그 뒤를 잇는 딸을 담은 사진은 사진 한 장에 몇 백 년이 스민 기운이다.
시인의 말대로, “세계 속에 어둠이 이해할 수 없는 빛… 삶은 기적이다”. 그렇게 그들은 오늘의 방법으로 기록되고 있다. 물론 카메라는 시인 박노해의 시선의 일부일 뿐, 우리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분쟁의 시대를 살고 있는 작가의 시선과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평화’를 향한 진정한 캠페인의 의미라고 할까. 시인은 지금 인도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고 했다. 7월 10일까지, 라 카페 갤러리.

글 정우정 기자(wjj@) 사진 박노해


▲ 아랫마을 장터로 가는 청년


▲ 감자알은 작아도 감사는 크다


▲ 께나를 불며 만년설산을 넘어가다

안데스 산맥의 만년설산
가장 높고 깊은 곳에 사는
께로족 마을을 찾아가는 길에

희박한 공기는 열 걸음만 걸어도 숨이 차고
발길에 떨어지는 돌들이 아찔한 벼랑을 구르며
태초의 정적을 깨뜨리는 칠흑 같은 밤의 고원

어둠이 이토록 무겁고 두텁고 무서운 것이었던가
추위와 탈진으로 주저앉아 죽음의 공포가 엄습할 때

신기루인가
멀리 만년설 봉우리 사이로
희미한 불빛 하나

산 것이다

어둠 속에 길을 잃은 우리를 부르는
께로족 청년의 호롱불 하나

이렇게 어둠이 크고 깊은 설산의 밤일지라도
빛은 저 작고 희미한 등불 하나로 충분했다

지금 세계가 칠흑처럼 어둡고
길 잃은 희망들이 숨이 죽어가도
단지 언뜻 비추는 불빛 하나만 살아 있다면
우리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세계 속에는 어둠이 이해할 수 없는
빛이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거대한 악이 이해할 수 없는 선이
야만이 이해할 수 없는 인간정신이
패배와 절망이 이해할 수 없는 희망이
깜박이고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그토록 강력하고 집요한 악의 정신이 지배해도
자기 영혼을 잃지 않고 희미한 등불로 서 있는 사람
어디를 둘러 보아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에
무력할지라도 끝끝내 꺾여지지 않는 최후의 사람

(중략)

삶은 기적이다
인간은 신비이다
희망은 불멸이다

그대, 희미한 불빛만 살아 있다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박노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Back to site top
Translat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