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자매’로 내한하는 연출가 레프 도딘

인간의 본질을 이야기하는 방법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4월 1일 12:00 오전

“연극은 자신을 알아가는, 삶을 배워가는 과정이다.” 시대의 속도를 거슬러, 느리고 진중한 호흡으로 인생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해온 연출가 레프 도딘(흔히 ‘도진’으로 불려왔지만 이 글에서는 국립국어원 외래어표기법에 따라 ‘도딘’으로 표기한다). 그가 상트페테르부르크 말리 극장 배우들과 한국을 찾는다. 이미 ‘가우데아무스’(2001년) ‘형제자매들’(2006년)을 통해 삶의 본질을 꿰뚫는 무대를 보여줬던 말리 극장 배우들은, 2010년 ‘바냐 아저씨’ 이후 3년 만인 이번 내한 공연에서 체호프 ‘세 자매’를 선보인다. 레프 도딘의 한국 방문은 2006년 ‘형제자매들’ 이후 7년 만이다.
고전과 현대문학 등 시대와 장르를 가리지 않고 탁월한 안목으로 다양한 텍스트를 연극화해온 레프 도딘은 1980년부터 현재까지 말리 극장을 이끌어오면서 스타니슬라브스키 시스템에 기반을 두고 배우들을 훈련시켜왔다. 배우들로 하여금 즉흥극·음악·무용·체조·세계사·역사·예술이론·문학 수업 등을 병행하게 하면서 수개월에 걸쳐 작품에 관한 연구와 리허설을 함께 해나가는 방식은 잘 알려진 바다. 무엇보다 ‘영혼으로 말하기’를 요구하는 그와 함께 지내온 배우들은 마치 무대 위에서 살아가는 듯한 연기와 뛰어난 앙상블로 매 작품마다 인간 내면의 깊은 세계를 관객에게 보여줬다.
지난 2010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말리 극장에서 초연된 ‘세 자매’는 러시아 지방 소도시에 사는 세 자매와 그 주변 인물들을 둘러싼 꿈과 이상, 사랑과 배신, 좌절을 그린 작품이다. 인간의 다양한 본능과 욕망이 다층적으로 드러나는 텍스트 위에서 레프 도딘은 체호프가 이야기하는 아픔에 대한 고통스러운 묵인, 회의적이면서도 낙관적인 시선에서 바라본 삶의 총제적인 모습을 실체화시키며 21세기에 유의미한 고전의 가치를 보여준다.
레프 도딘은 현실을 살아가는 이들 모두가 무대 위에 펼쳐지는 인생에 적극적으로 공감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 순간에야 비로소 우리는 레프 도딘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미학의 본질, 고통의 공감을 통한 인간적인 연대에 동참할 수 있을 것이다. 내한을 앞둔 레프 도딘을 이메일로 인터뷰 했다.

2010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세 자매’ 초연을 가졌다. 체호프의 4대 희곡 중에선 가장 마지막에 공연한 작품인데, 이 작품을 무대에 올리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궁금하다.
‘세 자매’는 체호프의 작품 중 가장 복잡하고 모순적이며 다층적인 작품이다. 희곡 속 대화들을 보면서, 이것이 곧 인생의 생생한 증거라고 생각했다. 체호프의 작품이 세심하고 진지한 사색의 결과물이자 고귀한 작품이기에 그러한 판단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나는 현실세계에 있을 법한 존재들을 염두에 두고 ‘세 자매’를 바라보았고, 배우들과도 같은 방식으로 캐릭터를 해석해나갔다. 작품을 관념적으로 분석하기보다는, 우리 스스로의 삶을 들여다보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방식은 언제나 극을 통해 관객이 자신의 삶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과정이자,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다.
‘세 자매’ 무대 위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체호프의 희곡보다 현실적이고 적극적인 것으로 알고 있다. 원작에서 드러나는 정서 가운데 무엇에 중점을 두었나.
작품 속 캐릭터들이 보여주는 인생의 공허함은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보다 오히려 덜하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나는 작품에서 캐릭터들이 자신의 삶을 이어가지 못하거나 계속되는 불안감 속에 살아가는, 비참하고 별난 인간처럼 보이지 않는 데에 초점을 뒀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로 등장하는 그들은 극 속에서 각자 자신의 삶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 하지만 정작 인생에 그들이 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삶의 비극을 느끼게 된다.
그동안 체호프의 상당한 희곡을 무대에 올렸다. 특별히 체호프의 작품을 선호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체호프는 자신만의 작품을 창조했다. 그 이후 생겨난 모든 것은 체호프에 영향을 받아 존재한 것이라 생각한다. 비슷하게는 그리스 비극 이후, 여러 세기가 흘러 셰익스피어의 비극이 등장한 것처럼 말이다. 체호프는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였다. 의사였지만 치명적인 병을 앓았고, 그럼에도 자신의 생을 살아갔다. 찬란하고 위대한 인생의 가치와 더불어 즐거움과 비극, 그 사이의 모순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체호프만큼 온전히 인간의 지성과 감성을 존중하고 인간의 가장 큰 필요를 보여준 사람도 없다. 그가 써내려간 인생의 희극과 비극은 오늘날 그 누가 쓴 것보다도 가장 현대적이다.
최근 많은 연출가들이 무대에서 영상이나 3D 같은 기술을 사용한다. 반면 당신이 연출하는 무대에서는 이런 것을 찾아보기 힘들다. 앞으로도 첨단기술을 무대에서 활용할 생각이 없나.
모든 예술 형식은 가능성과 한계로 정의할 수 있다. 회화는 캔버스와 2차원 평면이라는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고, 문학은 언어와 분량의 한계를 갖는다. 연극은 현존하는 인간의 삶으로부터 권한과 제한을 동시에 받는다. 연극이 영화나 텔레비전을 따라잡기 위해 속도를 높이고, 소리를 증폭시키는 것은 연극만이 지니고 있는 본질과 차이를 잃는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무대 위 배우들을 세밀하게 살펴봐야 한다. 그동안 살아오며 다른 사람을 전혀 주목하지 않거나, 그것에 익숙하지 않았던 만큼 말이다. 현재 나와 함께 하는 배우들은 동료의 울음이나 약하게 떨리는 목소리를 알아차리는 데 능숙하다. 이것은 실존의 영역과 시간에서 마주하는 연극 특유의 강점이자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오늘날의 여타 공연과 달리 연극은 실존하는 인간 대 인간의 접촉을 확고히 지켜내야 한다. 나는 이것이 사람들이 연극을 보기 위해 극장을 찾는 이유라 확신한다. 만약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머나먼 어느 미래에, 이러한 본질을 구현할 수 있는 첨단 기술이 생긴다면. 그리고 혹시 내가 그 기술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 온다면, 그땐 우리 무대에서 그 기술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세 자매’의 무대 디자인 콘셉트는 무엇인가.
‘세 자매’를 위한 무대 디자인의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공허하고 비극적인 장소를 눈여겨봤다. 비극이 서서히 일어나고 그것이 캐릭터의 외면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공간 말이다. 나무를 소재로 무대 위에 세운 세트는 그저 단순히 집으로서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내 설명을 듣는 것보단 직접 공연장에 와서 무대를 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게 훨씬 흥미로울 테니까.
연출가이자 교육자로서 학생 또는 배우와 소통할 때 무엇을 강조하나.
전달하기 위한 노력, 그 자체를 강조한다. 자기 자신을 관객 앞에 보여줄 때 비로소 연극이 가진 더 깊은 의미 속으로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을 배우들, 특히 학생들에게 중요하게 얘기한다. 더불어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뛰어난 감각을 가져야 한다. 스스로의 삶을 이해하려는 시도와 관객이 자신의 삶과 스스로를 보다 더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감각 말이다.
한 명의 예술가가 탄생하기 위한 필수 조건은 무엇인가.
배우가 가진 고유의 능력이 중요하다. 즉 깊이 생각하고 이치를 분별하는 힘과 인생에 대한 지식적인 분량,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는 정서적인 능력이다.
1966년 이반 쿠르게네프의 ‘첫사랑’으로 첫 연출을 시작했다. 이후 40여 년의 시간이 흘렀는데, 그 사이 달라진 부분이 있나.
내 안에 그 어느 것도 변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물론 머리카락 색이나 혈압은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하지만 내 삶의 철학은 그 어느 부분도 변하지 않았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인생의 가치와 사랑의 기쁨을 믿는다. 인생을 사랑하는 동시에 삶의 비극을 이해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비극적인 인생을 이해하게 됐다. 평온함도 보다 더 느낄 수 있게 됐다. 대상이 무엇이든 각각의 다른 면을 발견하고 느끼게 되었다고 할까. 지나간 인생의 대부분에서 생각과 느낌을 좀 더 표현하지 못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한 아쉬움이다.


▲ 레프 도딘

연극을 하면서 느끼는 가장 큰 유익은 무엇인가.
나는 젊은 시절부터 연극이 개인의 삶과 모두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고 믿어왔다. 그리고 당신에게도 연극을 하는 것은 삶을 최악으로 치닫지 않게 만드는 기회가 된다고 믿는다. 순간은 결코 짧은 것이 아니기에, 관객의 인생을 아주 잠깐이라도 변화시키는 기회를 연극을 통해 획득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덧붙이자면 연극을 하는 것이 누군가에겐 유용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결코 해로운 일이 아님을 확신한다. 연극은 세상에서 가장 무해한 일 중 하나이자, 직업적으로도 그리 나쁘지 않은 분야다.
작업에 대한 영감은 주로 어디에서 얻는가.
음악·문학·그림·여행뿐 아니라 새로운 사람들을 알아가는 데에서 영감을 얻는다. 그중에서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각기 다른 삶의 방식들을 관찰하는 것은, 일터로 돌아갔을 때 나뿐만 아니라 당신에게도 강한 원동력이 될 것이다.
현재 준비 중인 작품이 있나.
다음 작업은 체호프의 ‘벚꽃동산’이 될 것이다. 이미 20년 전에 이 작품을 연출했고 해외 투어를 한 적도 있다. 그럼에도 ‘벚꽃동산’은 매우 현대적이고 새로우며 살아있는 작품이기에 다시 무대에 올릴 예정이다.
레프 도딘 연출, 상트페테르부르크 말리 극장 ‘세 자매’ 4월 10~12일, LG아트센터.

글 김선영 기자(sykim@) 사진 LG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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