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은 잊기 위해, 아날로그는 기억하기 위해 존재한다.” 사진작가 로버트 폴리도리가 말했다. 전시장을 지나 4층 마지막 전시실을 들어서자 천정에 매달린 짐 다인의 책이 이색적이다. 판화 기법을 통해 회화 작업을 하는 작가 짐 다인의 작품이 슈타이들의 손에 의해 책으로 엮였다. 슈타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그의 책은 40번이라고 했다. 어렵게 40번 책을 찾았다. 여백 없고 글씨 없는 작품, 짐 다인이 그곳에 있었다. ‘A Printmaker’s Document’!
여기 책 앞에 서 있는 이는 게르하르트 슈타이들이다. 그는 1950년 독일 괴팅겐에서 태어났다. 독학으로 사진사·스크린 인쇄사·출판사 자격증까지 따낸 슈타이들은 어려서부터 친구들과 잘 어울리기 힘들어하는 소극적인 성격의 사내였다.
그는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 스크린 프린트의 새로운 시각을 열어준 앤디 워홀의 전시에 영감을 얻어 그는 1970년 그의 협업자 클라우스 슈테크를 만나서 괴팅겐에 스크린 인쇄소를 열고 혁신적인 정치 포스터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인쇄 전문가로 시작한 작업이 점점 출판인으로서의 영역으로 확장되어갔다. 슈테크는 슈타이들에 대해 증언하기를 “아티스트보다 ‘장인’이라는 말을 좋아하는 사람, 우리가 살아남은 이유는 항상 우리 스스로를 마케팅 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양철북’ 작가로 유명한 귄터 그라스와의 협업은 1986년 ‘구리에, 돌 위에(In Kupfer, auf Stein)’ 책을 출판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이후 아이슬란드 작가 할도르 락스네스·에리히 뢰스트·존 맥가헌 등의 유명한 작가들이 연이어 그와의 출판 계약을 맺었으며, 샤넬·펜디 등 패션 브랜드 카탈로그 프린트를 담당하고 있으니, 샤넬의 컬렉션을 디자인하는 카를 라거펠트와도 파트너다. 라거펠트와는 1993년부터 지금까지 계속 작업해오고 있다. 지금도 그는 일 년에 수백 권 이상의 손수 작업을 통한 책을 만드는데, 그 책들은 모두 그가 인정한 작품 한에서다.
작가들이 그를 찾는다. 책 속에 영혼을 불어넣어 작품을 가장 작품답게, 글을 가장 글답게 만들어주는 슈타이들의 작업 방식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해보이면서도 아주 어렵고도 예민한 영역이다. 전시를 돌다보면 출판사에서는 쉽게 볼 수 있는 ‘3교 대지(최종 인쇄를 위한 디자인 시안)’가 여럿 있다. 대지의 표식은 아주 자세하다. “1밀리미터를 밀어라, 색을 보정해라, 톤 다운, 톤 업, 이미지를 키워라… 굿(Good)!” 이러한 과정으로 우리는 한 권의 책을 만나게 된다. 그 속에서 우리는 또 다른 아이디어를 습득하게 되는 것이다.
고흐가 말했던가? “테오에게, 버드나무를 마치 인물을 드로잉하듯이 그린다면, 나무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풍경은 저절로 완성되게 될 거야.” 슈타이들의 작업 방식을 보고 있으니 고흐의 편지가 떠오른다. 수작업의 영역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슈타이들은 오늘도 컴퓨터가 없는 자신의 작업실에서 무언가 머리로 생각하고, 손으로 쓰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술을 가장 예술답게 담아낼 수 있는 직관이 생겨나면 아래층으로 내려갈 것이다. 자신의 동역자들과 함께 ‘핑퐁(탁구)’ 같은 대화를 주고받으러. 10월 6일까지, 대림미술관.
글 정우정 기자(wjj@) 사진 대림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