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축제는 여름의 축제와 다릅니다. 만약 같은 음악가가 같은 무대에서 같은 작품을 연주한다 하더라도, 가을에 듣는 것은 또 조금 다릅니다. 이달 서울·울산·전주에서 여러 축제가 열립니다. 반갑게도 월드뮤직과 우리음악, 현대무용과 같은 신선한 장르들이 주를 이룹니다. 이들을 묶어 하나의 기사를 써야 했는데, ‘생각’을 그 중심에 두기로 했습니다.
지난해 울산월드뮤직페스티벌에서 플라멩코 보컬의 지존이라 불리는 두켄데의 음악을 들었습니다. 제목도 모르고 가사도 모른 채, 한 남자가 무대 위에서 홀로 온몸을 짜내고 피 토하듯 소리를 짜내는 걸 ‘무방비 상태로’ 지켜보았습니다. 창자가 끊어질 듯하다는 단장(斷腸)의 슬픔이 서울 어느 굽이굽이 고개에만 있었던 게 아니었습니다. 그는 몸이 끊어져라 노래했습니다. 가사가 있는, 그러나 무언가(無言歌). 그 노래를 듣다가 송순섭 명창의 환영을 보았습니다. “아흐흐흑” 굵게 울음을 통하는 송 명창의 소리와 그럼에도 주름진 광대가 실쭉 올라가 마치 웃고 있는 듯한 얼굴.
플라멩코 음악을 듣다가 우리소리를 떠올린 건 자연스러운 과정을 통해서였습니다. 나이가 제법 많은 무대 위 저 남자는 왜 저리 피 토하듯 노래하나. 과연 어떠한 시간과 공간을 살아냈기에. 나는 과거에 이미 저러한 울음과 노래를 토하던 이를 본 적 있다. 우리는 왜 그런 소리를 갖게 되었을까.
플라멩코를 들으며 우리소리를 떠올렸지만, 거기에 비교는 없었습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과 생각은 이미 너무도 보편화·세계화되어버린 음악들이 건네왔던 것과는 다른 차원에 놓여 있었습니다.
여러 브람스 교향곡을 들으며 누가 더 잘하나, 나는 어떤 녹음이 더 좋은가를 가끔씩 ‘생각’하곤 합니다. 물론 이 또한 즐거운 생각이지요. 그런데 이 가을에는 좀 다른 생각을 해보고 싶습니다. 새로운 존재를 낯설어하고, 두려워하고, 그러다 혹은 공감하며, 그렇게 새로워지고 싶습니다. 긴 혼돈의 말미에 마기 마랭이 무대 위에 띄웠던 작은 헬리콥터와 그 끝에 매달린 예수상을 보았을 때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가사 끝에 터지는 울분의 노래에 눈시울을 붉혔을 때처럼. 그렇게 남다른 인상으로, 익숙한 음악과 익숙한 하늘을 다시 마주할 수 있을까요.
사실,
이 모든 게 쓸데없이 너무 많은 생각일 뿐일까요.
박용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