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호화 저택의 숨겨진 비밀

엘름그렌 드락세트 ‘내일’ 전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1월 1일 12:00 오전

오늘날 미술계의 스타 듀오가 세상의 부조리를 꼬집는 방식은 독특하고 과감하다. 우선 그들은 박물관 안에 집 한 채를 지었다


▲ 꼬마아이 밀랍인형, 그 아이를 그린 벽난로 위 초상화


▲ 피우다 만 담배…

“유일무이한 주택! 최고 문화 유산지에 새로운 아파트 개발!” 런던의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입구 바로 옆, 대형 부동산 광고판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박물관 부지에 아파트가 생긴다는 뜻인가? 순간의 당혹감은 이내 야릇한 호기심으로 바뀐다. 설마 박물관 안은 아니겠지. 대영제국이 최고 영광을 누리던 1852년,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왕자가 건립한 이 박물관은 8만 점이 넘는 세계 최고의 장식예술작품 컬렉션으로 유명하다. 나는 오늘 ‘내일(Tommorow)’이라는 전시를 보기 위해 전시 안내표지판을 따라 2층 도서관을 지나 중세 유물부터 빅토리아 시대 명화들까지 시간과 장소를 초월한 다양한 방을 지나, 비로소 ‘엘름그렌 드라세트(Elmgreen & Dragset)’ 2인조 작가가 전시장으로 택했다는 공간을 찾아냈다.

이 전시가 바로 거대한 박물관 속에 탄생한 ‘신주거 공간’이다. 엘름그렌 드락세트 듀오는 ‘내일’이라는 전시를 통해, ‘내일’이면 75세가 되는 건축가 노먼 스완 건축가의 집을 보여준다. 전시장을 찾은 관객은 전시에 대한 설명 대신 건축가에 대한 설명만 읽을 수 있다.

“74세 노먼 스완은 사우스켄싱턴(박물관이 위치한 런던의 부유 지역)의 대형 아파트에 지금도 살고 있다.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시간제 강사로 수 십 년간 근무했으나 그마저도 이젠 은퇴했다. 스완은 (실패한) 건축가로서 그의 계획 중 어느 하나도 실현시키지 못했다. 자신이 물려받은 문화적 유산, 혈통에 대한 속물적인 우월감, 그의 선조들이 수집해놓은 골동품과 그림들로 가득한 저택…. 그 속에서 정작 현재를 사는 그의 삶은, 부엌 뒤 자그마한 서재 안에서 몽상을 좇는 신세로 축소되어버렸다.”


▲ 수상한 ‘상징’으로 지어진 박물관 속 호화저택 ⓒElmgreen & Dragset. Photography Stephen White

조용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무단침입이라도 한 듯 미안한 기분. 가정부 복장을 한 사람이 “웰컴” 하고 틀에 박힌 인사를 한다. 오래전 유행하던 도자기와 조각품, 고서들을 자세히 보기 위해 걸어가다가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왼편 벽난로에 쭈그리고 앉은 꼬마아이 조각상 때문이다. 살아 움직일 것 같은 밀랍인형, 그 바로 앞 벽난로 위에는 그 꼬마아이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영국 사립학교 교복을 입은 걸 보니 쭈그리고 앉은 그 밀랍 꼬마와 동일인물이다.

수상한 자취는 계속된다. 응접실 탁자 위에 놓인 2011년 8월 발행의 신문들을 보니 런던 폭동에 관련된 기사다. 런던 토트넘에서 마크 더건이라는 흑인 청년이 경찰의 총격으로 숨진 것에서 시작된, 런던에서는 상상하지 못했던 그 폭동. 이런 저택 안에 있으면 폭동이 일어나도 딴 세상 얘기처럼 느껴졌으리라. 다시금 강조하지만 이것은 진짜 집이 아니라 ‘전시’다. ‘내일’의 관람객은 소파에 앉아도 되고 그랜드 피아노를 쳐봐도 된다. 초현실적인 공간이지만 현실적인 디테일이 많아 등장인물에 대한 무한 상상이 가능하다. 이 공간을 창조한 엘름그렌 드락세트 듀오 특유의 유머가 곳곳에서 발견된다. 영국의 화려한 빅토리아 저택에서 흔히 있는 일(천장에서는 물이 새는 일 등)이 전시장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똑… 똑… 똑… 낙숫물 소리에 화답이라도 하듯 욕실의 닫힌 문 저편에서 샤워 물줄기 소리가 들려온다.

뭔가 불안하다. 연이어 만난 공간은 페인트가 칠해지는 중인 현대식 부엌이다. 이사를 가려고 짐을 싸놓은 듯한 박스, 부엌 뒤에 남겨진 작은 사무실, 어두운 침실, 그랜드 피아노 위에 액자들을 통해 관람객은 노먼 스완을 알 수 있다. 그나저나 그는 어디 있을까? 샤워 물 소리가 끊이지 않는 욕실에?


▲ 엘름그렌 드락세트 듀오 ⓒElmgreen & Dragset. Photography Stephen White

‘공간’, 배우가 되다

이 드라마틱한 공간은 작가가 직접 박물관의 컬렉션에서 모든 소품(엄청난 가치를 지닌 진품들)을 고르고 여기에 초상화·응접실 세트·소년 밀랍인형 등 자신들의 작품들을 더해 창조해낸 것이다. 미샤르 엘름그렌(Michael Elmgreen, 1961~)·잉가르 드락세트(Ingar Dragset, 1969~)는 각각 덴마크·노르웨이 출신의 작가이며 ‘엘름그렌 & 드락세트’라는 이름으로 활동한다. 20년 동안 같이 작업한 이들은 이미 현대미술계에서는 대스타다. 영화의 한 장면과 같은 공간적 작품은 엘름그렌 드락세트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대표적인 작품이 2009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선보인 ‘컬렉터의 죽음’. 사람의 시체가 수영장 수면 위로 둥둥 떠 있는 이 작품은 많은 관람객들을 소스라치게 놀라게 했다. 블랙코미디 같은 세상의 구체적인 단면을 꼬집어내는 그들의 작품이 이번엔 런던 유수의 박물관 안에서 재탄생한 것이다.

이번 작품을 통해 엘름그렌 드락세트는 영국 현대사회의 복잡한 모순들과 이상주의적 몽상들 속에서 변해가는 사회 양상, 동성애, 그리고 믿기 힘든 런던의 부동산 가격 등 현실을 꼬집는 정치적 의사를 표현코자 했다. 이들이 지적한 ‘불편한 진실’은 전시를 위해 작가가 직접 쓴 극본을 읽어보면 더 적나라하게 밝혀진다. 관람객은 이 집의 주인에 대해서만 간략히 알고 있지만, 전시장에서 읽을 수 있는 책은 열 개의 장(場)과 두 명의 추가 등장인물을 통해 주인공의 과거와 지금을 알 수 있다. 요약하자면 74세 건축가 노먼 스완은 외로운 에이즈 환자로 저당 잡힌 집에서 산다. 오늘 그는 자신의 제자이자 옛 애인이기도 한 성공한 인테리어 디자이너 대니얼 윌더가 자신의 집을 샀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대니얼은 노먼의 은밀한 도움으로 간신히 졸업을 했지만, 사회에 나와서는 졸부들의 허영을 잘 읽어낸 인테리어로 디자이너로서의 성공을 거뒀다. 두 사람의 대화는 끔찍하도록 비열하면서 냉소적이다. 이 극본을 읽고 다시 전시장을 살펴보면 물건 하나하나, 모든 디테일에 심볼리즘이 숨겨져 있다.

아는 만큼 보이는 사회의 악과 욕망, 하지만 한때는 순수했던 사랑과 격려. 이 모든 드라마를 등장인물 없이 ‘무대’로만 표현한 엘름그렌 드락세트의 표현주의에 영국 사람들은 뜨끔할 것 같다. 태양이 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옛 영광 속에 아직도 계급사회를 받아들이고 물려받은 보물에 둘러쌓여 있는 영국의 현실을 꼬집힌 듯한 기분도 들 테니까. 그런데 정작 더 대단한 것은 이런 전시를 위해 외국인 작가들에게 박물관의 소장 창고와 갤러리를 활짝 열고 마음대로 쓸 수 있게 한 영국의 자신감이다.

글 김승민 사진 Stephen White

김승민은 런던의 큐레이터다. 2000년 소더비경매학교에서 예술사를 공부하던 시절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을 자주 방문했고, 졸업 이후 이 박물관 내 다양한 장소에서 전시와 행사를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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