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디 레인’

상상을 자극하는 두 남자의 누아르 연극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1월 1일 12:00 오전

단순한 무대, 두 명의 배우 그리고 대사. 절제된 무대 위에 그려지는
화려한 스펙터클 누아르의 묘미


▲ 이석준(대니 역)·이명행(조이 역)

“사람은 자기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할 권리가 있는 거죠. 경찰이란 것들이 내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인간들을 막아야 되는 거잖아요?” (대니)


▲ 폭주하는 시카고 경찰 대니 역을 맡은 문종원

“이만큼을 얻기 위해, 잃어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는 것은 참 이상해요. 그러니까, 대니는 나의 일부였는데, 이젠 영원히 사라졌어요…” (조이)

시카고의 한 경찰. 그는 아내와 자식을 보호하는 가장이란 명분하에 길거리 창녀의 뒤를 봐주며 쏠쏠한 뒷돈을 챙긴다. 결혼도 하지 않은 채 혼자 살고 있는 알코올 중독자인 그의 동료를 돌보는 데도 적극적이어서 언제나 집으로 초대해 식사는 물론 잠자리까지 제공한다. 평소 그를 적대시하던 포주의 총격에 의해 집은 난장판이 되고, 맹목적으로 범인을 추적하는 그의 행동은 경찰의 권한을 넘어 극단으로 폭주하고 결국은 죽음에 이른다. 이 과정을 함께 한 동료는 그의 가정과 직장 모두를 차지한다.

연극 ‘스테디 레인(A Steady Rain)’의 줄거리다. 이렇게만 놓고 보면 참으로 익숙하기 짝이 없는 전형적인 누아르 이야기다. 마약·매춘·뒷거래·총·배신·비리 경찰 등 누아르 영화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한데 어우러져 도덕의 경계가 모호한 채 욕망만이 출렁거리는, 유혈이 낭자한 시카고 뒷골목 풍경을 구성하고 있다. 그런데 빤한 누아르 장르 관습이 총동원되었음에도 ‘스테디 레인’이 흥미로운 것은 영화가 아니라 연극이라는 점이다.

관객이 마주하는 무대 위에는 두 배우가 마주보고 앉을 수 있는 책상과 의자뿐이다. 거기엔 대니가 자랑하는 52인치 TV가 있는 안락한 그의 집도 없고, 그가 뒤를 봐주는 창녀 론다가 자신의 아기를 몰래 넣어두는 양말장도 없다. 시카고 뒷골목은 물론 대니가 그토록 지키고 싶어 했던 가족들조차 나오지 않는다. 지나치게 단순해서 도대체 이곳에서 어떻게 누아르의 끈적거리는 핏빛 욕망이 드러날 것인지 의심스러운 무대를 가득 채우는 것은 바로 배우들의 대사다.

‘스테디 레인’은 작가 키스 허프 스스로 ‘대화극’이라 명명했고, 기획사인 노네임씨어터컴퍼니가 ‘내러티브 시리즈’로 기획한 작품이다. 이는 두 명의 배우가 풀어내는 대사가 곧 이 작품의 핵심임을 설명한다. 서로 상반된 성격을 지닌 시카고 경찰 대니와 조이는 총격이 일어나기 전후의 사건들을 특별한 행동 없이 모두 대사로 전달한다. 두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와 각 인물의 비교적 긴 내레이션을 통해 다양한 인물과 그들이 얽혀 있는 사건의 전후 맥락이 고스란히 무대 위에 그려지는 것이다.


▲ 무기력하고 염세적인 조이 역의 지현준

언제 젖었는지 모르는 ‘스테디 레인’처럼

단순한 무대, 두 명의 배우 그리고 대사. 연극의 구성 요소를 가장 최소화한 작품이지만 그 내용은 화려한 스펙터클의 누아르 영화 한 편을 본 듯 풍성하다. 이처럼 형식과 내용의 상반된 묘한 조합을 공연으로 입체화하기 위해서는 그 역학관계를 적절히 조절할 수 있는 연출가의 역량이 중요할 터, 이 작품은 최근 연극계에서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연출가 김광보가 지휘봉을 잡았다. 비교적 단순한 무대 위에 작품의 주제와 특성을 극대화하는 김광보는 무엇보다 작품 속에 연출가가 얼마만큼 드러나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는 명민한 연출가다. 전작인 ‘전쟁터를 훔친 여인들’에서는 대본의 구성부터 배우, 무대 전체를 장악하여 마치 오케스트라 지휘자처럼 요소요소를 조율했다면, ‘스테디 레인’에서는 배우들에게 전적으로 무대를 맡긴 채 작품 뒤로 숨어버렸다. 빈 공간을 채우는 배우의 대사가 절대적인 이 작품은 배우의 연극이라는 것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배우들이 자유롭게 연기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에 집중한 연출가의 영리함은 캐스팅에서도 나타난다. 이 작품을 이끄는 인물은 대니와 조이 두 사람인데, 대니는 가족에게 위협을 가한 상대를 찾아 극단적으로 폭주하는 인물이다. 감정선이 극과 극을 오가야 하며, 욕설과 뒤섞인 과격한 행동을 통해 이탈리아계 미국 경찰의 불같은 성격을 보여줘야 한다. 이에 비해 조이는 아일랜드계 특유의 차분하면서도 한편으론 무기력하고 염세적인 성격 때문에 대니의 폭주를 저지하는 역할을 하지만 의식하지 못한 사이 슬금슬금 그의 자리를 잠식하는 인물이다. 대니가 죽음을 향해 치닫는 행동형 인물이라면, 조이는 언제 젖어들었는지 모르는 ‘스테디 레인’처럼 이성적이며 복합적인 인물이다. 김광보 연출은 이러한 인물의 특성을 캐스팅에 그대로 반영했다.

공연은 두 팀의 더블 캐스팅으로 진행되는데, 이석준과 이명행이 호흡을 맞추고, 문종원과 지현준이 짝을 이룬다. 대니 역을 맡은 이석준과 문종원은 연극보다는 뮤지컬에서 명성을 쌓아온 배우다. 순간의 감정을 극대화시켜 노래로 표현하는 뮤지컬 연기는 대니의 앞만 보고 질주하는 폭주 기관차 같은 성격을 드러내는 데 매우 유효한 부분이다. 연극계에서 주목받는 30대 배우 이명행과 지현준은 조이를 연기하는데, 다양한 연극 작품에서 캐릭터를 섬세하게 입체화한 그들의 연기는 욕망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조이의 내면과 그 변화를 밀도 있게 형상화하고 있다.

대사만으로 모든 것이 진행되는 작품은 배우들이 주목받을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 그 자체로 배우들에게는 큰 부담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연습실에서 만난 이 배우들은 부담이 큰 만큼이나 의욕을 불태우고 있었다. 이석준과 문종원은 대니의 폭주에 정당성과 명분을 찾아가면서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의 쓸쓸한 삶이 지닌 보편성을 관객들에게 전달하고 싶다고 입을 모았다. 이명행과 지현준은 비교적 사건의 보고가 많은 조이의 대사에 생동감을 불어넣기 위해 다양한 해석과 분석을 진행하면서 대니의 자리를 차지하는 조이의 욕망을 구체화하여 관객들을 설득하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대니와 조이, 두 인물의 모노드라마가 결합한 형식이라고 해도 무방한 이 작품은 이렇게 능숙하고 노련한 네 배우를 만나 누아르의 뜨거움을 빈 무대 가득 채우고 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는 의식하지 못한 사이 온몸을 흠뻑 적신다. 대니의 자잘한 비리가 추적추적 그 가족에게 내려 결국은 해체되고, 조이의 욕망은 추적추적 대니에게로 내려 그 자리를 차지한다. 배우들의 대사는 추적추적 무대 위에 내려 두 사람으로 시작된 단조로움이 풍성한 누아르 한 편을 만들어낸다. 관객은 추적추적 내리는 대사로 마음껏 상상하고, 그 상상으로 공포를 맛보고 행복을 느끼며 우리네 삶에 대한 궁극적 질문에 흠뻑 빠져들 것이다. 스테디 레인이 폭우나 쓰나미보다 훨씬 무서운 이유다. 2014년 1월 29일까지 충무아트홀 중극장 블랙.

글 배선애 사진 노네임씨어터컴퍼니

배선애는 연극 열혈팬임을 스스로 고백하는 연극평론가이다. 현재 한국극예술학회 연구이사·계간지 ‘한국희곡’의 편집위원이다. 성균관대학교에서 연극에 관해 강의하는 한편, 드라마터그 작업을 통해 연극 현장을 계속 넘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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