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정의 하프 특강

47현 무게를 감당한 천상의 소리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3월 1일 12:00 오전

하프에 대한 단골 질문 두 개. “하프는 얼마나 비싸요?” 다음 단계는 “하프 연주가 그렇게 어렵다면서요?”
하프를 둘러싼 풍문만 들릴 뿐 여전히 낯선 이 악기를 오케스트라 무대에서 접할 때면 그 소리가 괜히 더 신비롭게 들려온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한 속 시원한 대답은 다음과 같다. 두 개의 반음을 한 번에 올릴 수 있는 더블 액션 하프의 최소 비용은 취미용으로 쓸 만한 바이올린 한 대보다는 비싸지만, 전공자들 세계에서 비교하자면 관악기 다음으로 저렴한 악기군에 속한다는 사실. 물론 각양각색의 종류 중 무릎 위에 올려놓고 심심할 때 퉁탕거려볼 수 있는 귀여운 사이즈도 선택 가능하다.
하지만 ‘어떻게 연주하는 악기냐’는 두 번째 질문에 대답하기엔 그리 쉬워보이지 않는다. 페달을 밟느라 분주한 하피스트를 백조에 비유한다는데, 공연장의 연주자들은 드레스로 예쁘게 가리지 않는가. 직접 특강을 들으러 하피스트 곽정의 스튜디오를 찾았다. 주빈 메타가 지휘하는 이스라엘 필과 협연한 화려한 경력을 갖고 있기도 했지만, 그보다 하프 페스티벌에 적극 참여하다 직접 하프 페스티벌을 주최하기 시작한 ‘하프 전도사’로서의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2012년 곽정은 제1회 코리안 하프 페스티벌을 개최해 국내 하프 연주자 130명이 서울역사박물관에 한데 모이는 연주회를 기획하기도 했다. 200여 명밖에 되지 않는 소박한 하프 인구의 저력을 모아보기 위해서였다. 올해 5월 4~5일에 예정된 제2회 페스티벌을 앞두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곽정은 기꺼이 취재에 승낙했다.
명동 한복판에 위치한 스튜디오에 들어가니 그녀는 바쁜 일정 속 얻은 독감 때문에 힘들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테이블에 앉아 올해 열리는 페스티벌과 그녀가 예술감독으로 운영 중인 하피데이 앙상블에 대해 이것저것 묻는데, 그녀는 힘을 도저히 쓸 수 없는 모습이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하프 먼저 구경해봐도 될까요?”라고 요청하자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난 곽정. 악기 관리를 위해 히터도 틀지 않는 냉방에 들어서자 “자자, 이거부터 보셔야 해요”라며 마법에 걸린 듯 기운을 냈다. 그녀는 10여 종의 하프들 사이 제일 뒤에 위치한 가장 작은 검정색 악기부터 시작해 하프 개량의 역사를 조곤조곤 들려줬고, 이어 어려운 현대음악 주법까지 일사천리로 쉼 없이 설명했다.

초보자를 위한 레버 하프 하프는 크게 페달이 있는 하프와 페달이 없는 하프로 나뉜다. 어린아이나 직장인이 취미로 하프를 배울 때 처음 접하게 되는 하프가 바로 이 레버 하프. 발로 페달을 밟는 대신 레버를 손으로 올리고 내려 반음을 조절한다. 우리가 흔히 아는 하프는 발로 페달을 밟아 레버를 조정하도록 개량된 것이니 이것이 하프의 원형이라 보면 되겠다. 12〜13세기 프랑스에서 활약한 음유시인이 즐겨 사용했다 해서 트루바두르 하프라고도 한다. 무릎에 놓고 칠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사이즈도 있는데, 화려하고 거대한 하프만 있다는 선입견을 없애기 위해 곽정은 레버 하프를 무대에 정기적으로 올린다. 온음을 한꺼번에 올리지 못하고 반음씩만 올릴 수 있는 게 단점이다.

까다로운 악기 관리법 하프는 악기에 대한 일반 상식과 살짝 비껴가는 부분이 많다. 하프도 일종의 현악기지만 바이올린과 같은 다른 현악기와 달리 최근에 만들어진 악기가 더 좋다는 것. 이 점은 관악기와 비슷한데, 관악기와 다른 점이 있다면 금으로 도색되어 있다고 해서 값이 훨씬 비싸지거나 소리가 더 좋아지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취향에 따라 금색과 원목 중에 선택한다.
“새 악기가 잘 훈련되어 2~3년이 지났을 때 제일 좋은 소리를 내고, 이후 7~8년 동안은 제법 쓸 만해요. 10년이 지나면 시한부 인생에 접어들었다고 봐야죠. 열두 살에 처음 하프를 배울 때 샀던 악기를 지금도 레슨에서는 사용하지만, 연주용으로는 부적합해요.”

콘서트용 그랜드 하프 레버 하프를 연주하는 사람은 하퍼라고 부르는데, 페달이 달린 하프를 연주할 줄 알아야 드디어 하피스트로 불릴 수 있다. 더블 액션 하프라 불리는 콘서트용 하프는 크게 기둥·목·울림판·받침대·몸통으로 구성되며, 악기가 작을수록 울림판과 몸통이 작아지고 음량도 줄어든다. 콘서트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47현 외에 36·40·42현 등 줄의 수도 다양하다. ‘페달이 달린 하프’라고도 부르며, 발로 페달을 밟아 레버를 움직일 수 있게 된 1차 개발에 이어 온음을 올릴 수 있게 된 2차 혁명이 이루어진 후 현재까지 그 형태가 지속된다. 디스크가 돌아가면 각 디스크에 부착된 두 개의 포크가 줄을 잡아당겨 현의 음높이를 높여주는데, 이러한 디스크가 아래위로 두 개씩 달려 있어 온음 이동이 가능해졌다. 즉 기존에는 B♭에서 C, C에서 C#으로만 이동이 가능했다면, 이제 B♭에서 C#으로 한 번에 도약할 수 있게 되었다. 연주할 수 있는 음이 많아진 건 하프 연주자들에게 행복한 발전이기만 할까? 곽정이 슬쩍 덧붙인다.
“마리오 카스텔누오보 테데스코의 하프 협주곡 3악장의 경우 5분 동안 무려 500번 페달이 바뀌어요. 하프는 바이올린과 달리 활을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은 편리하지만, 손만큼 발도 연습을 많이 해야 하는 악기죠.”
각 계이름마다 하나씩의 전용 페달이 있어 초보자들은 어떤 페달을 밟아야 하는지도 알기 어렵다. 프로 연주자들도 무대 위에서 “오로지 감각”으로만 본능적으로 밟을 수밖에 없는데, 그래서 사실 큰 실수들이 생기기도 한단다.


▲ 손을 둥글게 해 현 위쪽에서 연주하는 하모닉스

다양한 주법 말러 교향곡 1번을 보는데 하프에서 ‘턱턱’ 막힌 소리가 나는 게 신기해 그 음색의 비결을 물었다. “에투페라는 기법이에요. 현을 뜯자마자 현의 진동을 중단시키는 기법이죠. 보통 하프는 현의 가운데를 뜯기 때문에 진동이 멈추지 않아 피아노처럼 정확한 스타카토 효과를 내지 못 합니다. 현을 뜯자마자 손바닥으로 막아 울림을 방지하여 꽉 막힌 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기타처럼 울림을 적게 해 코맹맹이 같은 소리를 내려면 현 아래쪽에서 뜯으면 된다. 이 주법의 이름은 프레 드 라 타블. 현대곡이나 재즈에 많이 사용된다. 하프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아름다운 아르페지오는 한 번에 8화음까지 낼 수 있다. 여덟 개의 손가락만 이용하기 때문인데, 음의 간격이 같을 경우엔 연주하기 쉽지만 간격이 달라지면 어려워진다. 그렇다면 하피스트에게 가장 연주하기 쉬운 주법은 무엇일까? 높이가 다른 두 음 사이를 미끄러지듯 이어가는 글리산도는 간단히 페달을 조율하면 되므로 가장 손쉽게 연주할 수 있다.

현대음악의 친구 널따란 나무판을 갖고 있는 하프는 타악기로도 활용이 가능하다. 손톱을 이용해 날카로운 소리를 낼 수도 있고, 심지어 연필이나 스크류 드라이버를 사용하기도 한다. 종이를 끼워 천둥 소리를 흉내 내기도 한다. 솔로 레퍼토리가 많지 않은 하프 연주자들에게 현대음악 작곡가들의 관심은 고마울 수밖에 없을 터. 곽정 역시 이스트먼 음대에서 석사과정을 밟을 당시 작곡을 공부하는 친구들을 힘닿는 데까지 도우며 수백여 곡의 작품을 초연했다.
“악기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가끔 황당한 주문을 할 때가 있어요. 손이 잘 닿지도 않는 저음역에 포르테를 네 개씩 붙인다거나, 마지막 줄엔 디스크가 없어서 반음 조절이 불가능한데 그걸 모를 때도 있고요. 실험정신이 너무 과할 때도 있습니다. 어느 날 한 친구가 유리 조각으로 그어봐달라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되물었죠. ‘네 바이올린을 유리 조각으로 연주하라면 하겠어?’라고요. 그럴 때면 친구들을 연습실에 한가득 데려와 ‘하프 특강’을 열어주곤 했죠.”


▲ 8화음까지 가능한 아르페지오

기타 대신 하프! 기타와 하프는 비슷한 점이 많다. 줄을 튕기는, 가장 원초적인 형태의 현악기라는 점. 그리고 특별한 기술을 배울 필요 없이 양손으로 악기를 감싸 안고 쉽게 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초심자를 위한 취미용 악기로 적격이다. 하프의 대중화를 위해 두 팔 벗고 나서 설명도 하고, 렉처 콘서트 열어 시범까지 열어보여도 “비싸다”는 하프에 대한 편견의 소리가 여전히 들려온다고 한다. 심지어 오케스트라에 객원으로 초대되었을 때, 번쩍번쩍 빛나는 하프를 양 손에 떡 안고 있는 곽정에게 단원들이 늘 던지는 질문도 이것이다. “하프는 비싸지 않나요?” 그럴 때마다 곽정은 대답한다. “선생님 손에 쥐고 있는 활 값에 10분의 일도 안 될 거예요.”
곽정은 제자를 키우는 데 전념하던 과거에 비해 학원을 차리는 등 대중화에 앞장서는 하프 연주자들이 많아졌다고 설명하며, 특히 어린이와 어르신을 위해 좋은 악기라고 자랑한다.
“다른 현악기는 활을 이용하고, 기타도 손톱이나 피크를 이용하는데 하프는 손끝을 자극해서 치매 예방에 아주 좋습니다. 얼마 전 홍콩에 다녀왔는데, 홍콩에는 취미로 즐기는 중장년층 인구가 아주 많아요.”
하프의 매력을 열심히 알리려던 젊은 하피스트 친구는 이제 그저 하프를 그저 멀게만 느끼는 대중에게도 이 악기를 안겨주고 싶은 모양이다.

올바른 자세가 중요 “저는 처음 하프를 시작하는 아이들에게 악기를 사주지 말라고 조언해요. 악기의 소중함과 고마움을 알게 된 이후에 악기를 손에 쥐어야 합니다.” 어느 날 어린 딸을 위해 부모님이 사온 화사한 금빛 하프 증정식이 하프 연주자들의 시작이라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란 말이다. 곽정은 악기를 손에 쥐기 전 두 달간은 실체 없이 자세만 정확히 잡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사실 알고 보면 하프는 매우 혹독한 악기다. 등받이가 없는 의자에 3분의 1 정도만 걸터앉아 42~47킬로그램 무게의 하프를 온몸으로 견뎌야 한다. 하프는 초심자도 쉽게 소리를 낼 수 있기 때문에 그 음색에 반해 아무렇게나 악기를 어깨에 대고 연주하기 쉬운데, 그럴 경우 척추에 무리가 간다. 따라서 고음을 연주할 때는 어깨에 기대지 말고 다리를 A자형으로 벌린 채 무릎으로 악기를 받쳐야 한다고. 하프는 악기 특성상 한없이 친절하고, 또 한없이 혹독하다.
“초보자가 연주할 때 전문 연주자들보다 예쁜 소리가 나는 악기는 하프밖에 없을걸요. 보들보들한 속살이 부드러운 소리를 내죠. 그런데 피가 나고 물집이 잡혀 결국 굳은살이 생기고 나면 손이 아프지 않게 연주할 수 있게 되지만, 소리가 거칠게 나요. 그래서 대회나 연주를 앞두곤 힘들게 만든 굳은살을 뜨거운 물에 담가 풀어버리죠. 그리고 대회가 끝나면 다시 손가락에 피가 나도록 단련해야 합니다.”

글 김여항 기자(yeohang@gaeksuk.com) 사진 심규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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