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 프라하

영원한 건축의 도시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3월 1일 12:00 오전

알폰스 무하의 아틀리에, 아르누보 시대의 호텔, 벨 에포크의 낭만적인 레스토랑을
고스란히 간직한 도시 프라하. 다양한 예술 사조 흐름 가운데 마주친, 변함없는 시간과
공간 속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시민회관 입구. 체코 민족의 시련과 부활을 상징하는 모자이크화 ‘프라하에 경의를’을 보려면 목뒤 살이 접히도록 고개를 젖혀야 한다. 그 영광스러운 광경 앞에서 떠오른 건 역설적이게도 체코의 굴욕사였다.
때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39년. 체코슬로바키아공화국의 대통령 에밀 하하는 아돌프 히틀러의 끈질긴 무력 압박에 일말의 저항 없이 백기를 들었다. 피 한 방울 보지 않고 프라하에 입성한 히틀러는 득의양양하게 승리를 선언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이로써 존재하기를 멈췄다.”
에밀 하하라고 해서 제 나라를 하릴없이 그냥 내주고 싶었을까? 대통령도 국민도 파죽지세의 독일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승리할 수 없을 바에야 이 도시라도 지키자. 십 수 세기 동안 침략과 약탈로 점철된 역사일지라도 프라하는 유구한 역사 안에서 쌓아온 것이 많다. 만약 대통령 에밀 하하가 수치심 때문에 항복하지 않았다면, 체코 국민이 명분을 위해 거세게 저항했다면 천년의 유물들은 히틀러의 광기, 폭격의 아지랑이 속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명분보다 실리. 프라하에 붙은 ‘유럽 건축사의 살아있는 교과서’라는 별명은 패자가 획득한 영리한 전리품이다.
교과서의 내용은 훌륭하지만 안타깝게도 재미는 없다. 게다가 천 년의 건축사는 아무리 파란만장한 기승전결을 갖췄다 한들 양이 너무 방대하다. 전공학도가 아닌 이상 솔직히 건축 사조를 읊으며 프라하를 여행하는 게 무슨 재미가 있을까? 하여 10세기부터 19세기 초, 로마네스크·고딕·르네상스·바로크·신고전주의 같은 지리한 단어들은 뚝 잘라냈다. 배회하기로 마음먹은 시절은 약 100년 전, 벨 에포크로 불리는 아르누보 시대부터다.
파리 못지않게 프라하에도 벨 에포크 시대의 분위기가 진하다. 공은 아르누보 사조를 시작하고 완성한 체코의 예술가 알폰스 무하에게 있다. 프라하에 머무는 나흘 동안 바츨라프스케 광장과 구시가지, 블타바 강변에 즐비한 아르누보풍의 살롱과 카페, 극장과 호텔을 종횡무진했다. 무하의 뮤즈이자 파리 사교계의 여신, 사라 베르나르가 되어 이 도시를 여행하는 기분이었다. 쇠퇴하는 아르누보의 바통을 이어받은 것은 1910년 이후의 예술가와 건축가를 매료시킨 입체파다. 1920년경까지 유려한 곡선과 화려한 패턴의 아르누보풍 대신 삼각형·다각형·피라미드 형태를 이용하며 입체감을 부각시킨 건축물과 인테리어, 장식들이 프라하에 모습을 드러냈다. 입체파가 시들해진 이후에는 기능주의와 공산주의, 해체주의가 차례로 프라하 거리의 풍경을 바꿨다.
사조를 따라 건축물을 둘러볼 때 겉만 슬쩍 구경한다면 여정은 더욱 지루해지고 재미라곤 눈곱만큼도 없다. 다행히 프라하의 오래된 건축물은 안으로의 접근이 용이하다. 구경 가치가 있는 건축물마다 가이드 투어라는 합법적 훔쳐 보기의 수단이 있기 때문이다. 약간의 귀찮음을 무릅쓰고 가는 곳마다 참견꾼처럼 속살을 살폈다. 만약 시민회관의 홀과 시장의 방이 어떤지 꼬치꼬치 찾아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알폰스 무하가 살았던 시대의 사람들은 어떤 모양의 문고리를 잡고 어떤 테두리를 가진 거울에 제 얼굴을 비췄는지, 물고기는 어떤 모양의 어항에 살았는지, 사람들은 어떤 의자에 앉아 차를 마셨는지 알 수 있었을까? 입체파를 사랑한 이들이 조명·창틀·난간·가구뿐 아니라 옷을 거는 벽걸이마저 꼬장꼬장하게 입체파 양식을 고집한 것을 짐작이나 할 수 있었을까? 거리와 건축물, 인물마다 품은 이야기가 넘치는 도시에서 나는 매일 1만 5천 보 이상을 걸어야 했다. 태어나지 않았던 시대의 공간을 과분히 겪은 대가로 3킬로그램의 몸무게를 잃었다. 그것만으로도 실은 굉장한 성과다.


▲ 시민회관 시장의 방. 알폰스 무하의 작품이 벽과 천장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 시민회관의 연회장. 가이드 투어로만 접근할 수 있다


▲ 무하 박물관 내부


▲ 프라하에서 가장 눈부신 아르누보 건축물로 손꼽히는 시민회관

프라하에서 가볼 만한 건축물 리스트

ART NOUVEAU 아르누보
시민회관 Obecni Du˚m
프라하에서 가장 눈부신 아르누보 건축물로 손꼽힌다. 문고리부터 바닥·의자·창문·벽·천장까지 모든 장식이 아르누보 디자인의 정수다. 1906년 체코의 문화·예술·건축계를 이끌던 30명의 예술가와 건축가가 체코 민족 부흥 운동의 일환으로 힘을 모아 세웠다. 여행자의 대부분은 프라하를 상징하는 음악제 ‘프라하의 봄’이 열리는 스메타나 홀이나 로비, 레스토랑 등에만 접근한다. 아르누보의 속살까지 핥고 싶다면 건물 내 안내 센터에서 가이드 투어를 신청해보자. 내부 구경의 첫 행선지는 1,200석을 갖춘 스메타나 홀. ‘프라하의 봄’을 비롯해 1년 내내 크고 작은 음악 공연이 열린다. 1918년 10월 28일에는 이곳에서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이 선언됐다. 견학은 지휘자·연주자들이 머무르는 공간이자 프라이빗한 이벤트가 열리는 여성용 홀과 남성용 홀로 이어진다. 단풍나무로 만든 의자, 대리석 테이블, 화려한 장식을 곁들인 거울과 어항 등으로 꾸며져 있다. 면바지와 셔츠 차림으로 들어선 것이 무안해질 만큼 고풍스럽다. 백미는 아르누보의 거장 알폰스 무하가 총력을 기울여 꾸민 공간인 시장의 방이다. 벽과 천장 전면을 장식한 벽화에는 슬라브족을 상징하는 인물들, 체코 역사와 신화 속 위인들이 있다. 색이 아름답고 위용이 압도적이다. 시민회관 곳곳을 샅샅이 다 훑으면 90분 정도가 훌쩍 지나간다.
www.obecnidum.cz

호텔 에브로파 Hotel Evropa
바츨라프스케 광장에는 사조가 제각각인 건축물이 변함없는 모습으로 각축을 벌인다. 아르누보 디자인의 대표 주자는 호텔 에브로파다. 1889년에 처음 문을 열었고, 1903년에 아르누보 스타일로 재개관했다. 숙박을 한다면 더없이 이상적인 경험이겠지만 성수기엔 호락호락하지 않다. 머물지 못하더라도 지나치지는 말자. 건물의 외관과 내부는 모두 110여 년 전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곳에선 꽃과 나무, 열매에서 모티프를 얻어 디자인된 아르누보 장식의 디테일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바깥에선 발코니·난간·창틀·벽화를, 안에선 가구와 바닥·천장·조명 등을 살펴볼 것. 1층의 아르누보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는 것도 좋다. 티타임과 함께 80분간 호텔을 둘러볼 수 있는 가이드 투어 프로그램이 있다. www.evropahotel.cz

호텔 파리 Hotel Paris
관광을 작정한 이에게 호텔 파리는 최적의 위치를 제공한다. 시민회관은 건너편, 구시가지는 5분 거리에 있다. 프랑스 호텔 체인 콩코드 계열로 1904년에 지어졌다. 프랑스식 아르누보의 화려함을 작정하고 보여준다. 신혼 여행자나 숙소에 공들이고 싶은 여행자라면 로열 타워 스위트에 묵어보길. 동그란 창문에 담기는 프라하 구시가지의 풍경이 환상적으로 펼쳐진다. 1층에 위치한 레스토랑 사라 베르나르는 클래식한 아르누보 인테리어의 정석을 선보인다. 푸른색 세라믹 타일로 장식한 모자이크, 오리지널 조명을 비롯해 벽과 바닥, 천장의 화려한 문양 등에 눈이 즐겁다. 프랑스와 체코식 퓨전 요리를 맛볼 수 있다. www.hotel-paris.cz

카페 슬라비아 Café Slavia
체코 민주화 운동의 선구자 바츨라프 하벨, 소설가 밀란 쿤데라, ‘나의 조국’의 작곡가 스메타나를 비롯한 체코 지식인들의 사랑방이었다. 1881년부터 문을 열어 현재까지 카페로 성업 중이다. 안으로 들어서면 아르데코 스타일의 천장과 조명이 눈에 띈다. 묵직한 갈색과 상아색의 건축재가 조화를 이루는 고전적인 인테리어다. 카페 슬라비아를 단골처럼 즐기고 싶다면 해 질 무렵 찾아 블타바 강이 보이는 창가 쪽 자리에 앉을 것. 그다음 반 고흐가 사랑했던 술로 유명한 압생트 한 잔을 시킨다. 도수가 무려 70도에 이르는 독주로 환각 효과가 있어 제조나 유통이 금지된 국가도 있다. 정면을 바라보면 당신과 같은 처지의 남자가 그림 속에 있다. 빅토르 올리바의 작품 ‘압생트 마시는 사내’다. 해장 음식으로 체코 스타일의 팬케이크 팔라친키를 추천한다. 흡연석을 구비하고 있어 끽연가에겐 더없이 천국이다. www.cafeslivia.cz

무하 박물관 Mucha Museum
체코에서 아르누보를 제대로 이해하고 싶다면 알폰스 무하의 작품들을 접하면 된다. 그의 포트폴리오 자체가 아르누보의 시작과 끝이다. 시민회관 내 시장의 방, 성 비타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등 프라하 곳곳에서 무하의 작업을 만날 수 있지만 전부를 보고 싶다면 무하 박물관을 찾을 것. 무하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긴 운명적인 작품, 사라 베르나르의 연극 포스터 오리지널 석판 인쇄본이 이곳에 있다. 무하의 트레이드마크인 ‘슬라브 처녀’ 연작, 슬라브 여인들의 초상 사진을 비롯해 그의 사적인 공간과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사료들도 다양하게 갖췄다. 무하의 생애를 정리한 비디오 아트까지 보고 나면 그가 창조한 벨 에포크 시대의 낭만에 마음을 뺏기지 않을 수 없다. www.mucha.cz

CUBISME 입체파
검은 성모의 집 House of The Black Madonna
체코의 역대 왕들이 대관식을 위해 거친 길, ‘로열 웨이’는 바로크와 로마네스크풍의 건축물이 즐비한 길이다. 그 유구한 고대 건축의 숲에서 유독 다른 얼굴을 한 건축물이 눈에 띈다. 체코 입체파의 출발점이 되는 ‘검은 성모의 집’이다. 1912년 체코 입체파 운동의 창시자 요세프 고차르가 설계했다. 2층 외벽 모서리의 검은 성모상이 있다면 제대로 찾은 것. 겉만 입체파가 아니다. 1층에는 입체파에 영감을 받은 디자인 제품들을 전시, 판매하는 곳이 있어 약 40여 명의 현대 입체파 아티스트와 디자이너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2층에 위치한 그랜드 카페 오리엔트는 입체파 문외한을 깨우치는 공간이다. 입체주의가 적용된 가구·조명·벽걸이와 같은 소품들이 입체파 풍이 무엇인지 세세히 알려준다. 카페 안엔 당대의 향수를 품은 체코 노인들이 대부분이다. 얼핏 보이는 역전 다방 같은 분위기가 매력적이다. 4층과 5층에는 입체파 뮤지엄도 자리 잡고 있다.
www.grandcafeorient.cz

FUNCTIONALISM 기능주의
빌라 뮐러 Villa Müller
1920년대, 입체파의 바통을 이어받은 건축 사조는 기능주의다. 건축 사조의 각축장이던 프라하 역시 ‘형식은 기능에 따라 결정된다’는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았다. 프라하 교외 지역에는 기능주의에 관심 있는 건축학도들이 교과서처럼 여기는 건축물이 있다. 오스트리아 빈 출신의 건축가 아돌프 루스가 디자인한 ‘빌라 뮐러’다. 건축 사조에 관심이 없어도 구경할 만하다. 집 구조가 기상천외하다. 1·2·3층 등으로 구분되는 기존의 층 개념을 완전히 뒤집었다. 굳이 층의 개념을 부여하자면 0.7·1.5·2.2층 정도가 되겠다. 대리석과 원목 등의 고급 건축재를 아낌없이 사용해 꾸민 부르주아의 집을 훔쳐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가이드 투어를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다. www.mullerovavila.cz

DE-CONSTUCTIVISM 해체주의
댄싱 하우스 Dancing House
노베 메스토 강변엔 19~20세기 무렵 프라하에 세워진 상기할 만한 건축물들이 늘어서 있다. 그중 허리를 꽉 잡힌 여성 댄서와 리듬 타는 남성 댄서가 왈츠를 추는 듯한 모습의 기이한 유리 건물 하나가 시선을 끈다. 1996년에 완공된 댄싱 하우스다. 해체주의(비대칭·탈양식·비정형 등을 추구하는 현대의 건축 사조) 건축의 교주로 추앙받는 미국의 건축가 프랭크 게리와 크로아티아 출신 건축가 블라도 밀루니치의 합작품이다. 완공한 해에 미국 ‘타임’ 지에서 최고의 디자인 작품으로 선정할 만큼 화제가 됐다. 주변에 있는 중세 시대 건축물과 묘하게 대조를 이룬다. 내부가 궁금한 이에겐 꼭대기 층의 블타바 강을 조망하는 스카이라운지 레스토랑이 호기심을 충족시켜준다.

글 류진(자유기고가) 사진 전재호


▲ 호텔 에브로파는 110여 년 전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 프랑스식 아르누보의 화려함을 보여주는 호텔 파리


▲ 체코 지식인들의 사랑방이었던 카페 슬라비아


▲ 무하 박물관에서는 알폰스 무하의 작품뿐 아니라 사적인 공간과 생활까지 엿볼 수 있다


▲ 체코 큐비즘의 출발점이 되는 검은 성모의 집


▲ 프라하 교외 지역에 자리 잡은 빌라 뮐러


▲ 해체주의 건축가 프랭크 게리의 대표작 댄싱 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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