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르트 바일(1)

20세기 음악극의 문제아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4월 1일 12:00 오전

‘마하고니 시의 흥망성쇠’ ‘서푼짜리 오페라’의 작곡가로 알려진 쿠르트 바일.
그의 문제적 음악극을 공동 창작한 인연들을 되돌아본다

쿠르트 바일은 20세기 음악 역사에 가장 주목해야 할 작곡가임에 틀림없다. 1900년에 태어나 그 절반에 해당하는 50년의 삶을 살다 간 유대인 혈통의 독일 작곡가는 20세기 음악이 안고 있던 숙제에 선명한 질문과 해답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그가 제안한 서사극적 오페라에는 신화와 동화에 갇혀 있던 음악극을 현실 속으로 옮겨주었고, 클래식 음악의 관성을 혁신하며 대중음악의 다양한 요소를 현대음악으로 이식시켜주었다. 바일이 제시한 뮤지컬 작법은 브로드웨이의 관습을 일깨우는 또 다른 혁신과 ‘열린 음악’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클래식과 대중음악이라는 이분법적 구분을 거부한 채, 좋은 음악과 나쁜 음악의 기준으로 실험과 혁신을 거듭했던 쿠르트 바일의 음악은 20세기 음악의 가장 전형적인 기록이며, 진지한 탐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데사우 궁정 극장의 유대인 소년
쿠르트 바일은 1900년 3월 2일, 독일의 동부에 위치한 소도시 데사우의 유대인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알베르트 바일은 데사우에 위치한 유대 교회인 지나고게에서 신학 교사이자 성가대의 합창 지휘자였다. 4남매 중 셋째로 태어난 쿠르트 바일은 아버지로부터 직접 피아노를 배우며 음악적 재능을 넓혀나갔다. 열 살 때 바그너의 오페라에 심취하여 장문의 감상문을 남길 만큼 그는 오페라 작곡가를 열망하고 있었다. 1915년 쿠르트 바일은 극장에서의 공개 연주회에서 쇼팽과 리스트의 작품을 연주했고, 이때 내비쳤던 음악적 재능으로 인해 1916년에는 음악 교사였던 알버트 빙의 추천으로 데사우 궁정극장의 반주자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소년 쿠르트 바일은 1913년에 생애 첫 번째 작곡 ‘유대인의 혼례를 위한 노래’와 아카펠라 합창곡 ‘기도’와 같은 습작을 발표했고, 1916년에는 5개의 연가극 ‘오프라의 가곡’ 등을 남겼다.
1918년 3월, 데사우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쿠르트 바일은 베를린 음악대학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오페라 ‘헨젤과 그레텔’의 작곡가 엥겔베르트 훔퍼딩크에게 작곡법을 배웠다. 바일의 관심은 음악에만 갇히지 않았다. 베를린 종합대학에서 철학 강의를 들었으며, 독일의 반유대정책에 항거하는 학생회 활동에도 열심이었다. 이 무렵 자신의 첫 번째 교향곡도 발표했다. 릴케의 시를 바탕으로 한 7악장의 교향시로 300만 마르크의 장학금을 수여 받지만, 데사우의 유대 공동체에서 제공되던 보조가 끊기면서 학업은 중단되어야만 했다. 바일은 고향 데사우로 돌아와서 프리드리히 극장으로 개명된 극장 전속 반주자로 일하다가 극장의 음악감독과 잦은 마찰을 빚으며 다시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
독일 서부의 도시 뤼덴샤이트 극장에서 음악감독으로 일하던 시절, 바일은 평소 동경하던 부소니에게 배움을 얻고 싶어졌다. 극장 측의 연장 계약 제의를 거절하고 전업 작곡가로서의 활동을 결심할 즈음 스위스에서 귀국한 부소니의 마스터클래스에 참가, 그 문하에 들어갈 수 있었다. 바일은 1921년부터 1924년 부소니의 사망 직전까지 부소니의 곁에서 보다 넓고 풍부한 현대음악의 세계와 가치를 깨칠 수 있었다. ‘현대음악의 모세’라고 불리며 20세기 음악의 새로운 경향을 예견했던 부소니의 영향은 훗날 쿠르트 바일이 서사극으로서의 오페라 개혁을 주도하는 데 정신적·양식적 기초가 되어주었다. 부소니의 곁에 머무는 동안 바일은 참신하고 혁신적인 스타일의 관현악 작곡을 꾸준히 발표했고, 독일의 음악계에서 가장 주목 받는 신진 작곡가로 부상하고 있었다.

운명적 만남 I. 카이저와 레냐를 만나다
쿠르트 바일의 꿈은 오페라 작곡가가 되는 것이었다. 이를 실현할 수 있게 한 인연 중 첫 번째가 1920년대 독일의 오페라 극작가로 명성을 떨치던 게오르크 카이저와의 만남이다. 1922년, 카이저는 바일이 지휘자로 참가한 발레 마임극 ‘마술의 밤’에서 22세 청년의 번뜩이는 재능과 열린 감성을 보았다. 카이저는 곧바로 바일에게 새로운 발레 공연의 작곡을 주문했다. 바일이 카이저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데 10주의 시간이면 충분했다. 그렇게 태어난 작품이 바일의 첫 번째 오페라 ‘주연배우’다. 최초의 발레 공연으로 출발한 프로젝트는 단막의 오페라 형식으로 변모되었다. 1926년 3월, 독일의 드레스덴 국립극장에서 초연된 쿠르트 바일의 오페라 데뷔는 대성공이었다. 20분간의 기립 박수, 마흔 번의 커튼 콜이라는 특별한 찬사가 더해졌다. 카이저는 쿠르트 바일의 재능과 감각을 신뢰하며 당시 독일 문학계의 초현실주의를 이끌던 시인 이반 골을 소개했으며, 둘은 칸타타 형식의 ‘새로운 오르페우스’와 단막 오페라 ‘로열 팰리스’를 함께 완성했다.
1926년 말에는 카바레 송의 작사가이자 음악평론가 펠릭스 요아힘손과의 공동 작업으로 가극 ‘그래서’를 생산했다. 오페라 ‘주연배우’의 성공에 뒤따르는 연이은 작업 요청으로 쿠르트 바일은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바일에게 평생의 동반자 로테 레냐를 소개해준 이도 게오르크 카이저였다. 1898년 빈에서 태어난 로테 레냐는 배우이자 가수, 무용수로 활약했다. 바일보다 두 살 연상이었다. 카이저와의 공동 작업 중 소개로 만난 두 사람은 금세 사랑에 빠졌고, 3년의 열애와 동거 후 1926년 1월 결혼했다. 로테 레냐는 쿠르트 바일의 작품에 주역으로 참가하며 독일의 카바레 송을 대표하는 가수로서 현대 오페라와 뮤지컬 역사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 브레히트와 바일의 만남

운명적인 만남 II. 브레히트를 만나다
쿠르트 바일이 20세기 음악 문명에 남긴 선연한 파문은 1927년 4월, 독일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시인·극작가·연출가인 베르톨트 브레히트와의 운명적 만남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쿠르트 바일은 진작부터 브레히트의 예술관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브레히트의 시집 ‘가정서’를 열독하고 여기에 포함된 ‘마하고니’라는 작품에 빠져 있었다. 아내 로테 레냐의 주선으로 만난 브레히트와 바일은 급속도로 친해졌고, 그로 인해 쿠르트 바일 작곡·베르톨트 브레히트 대본의 연결 고리는 역사적인 공조를 출발할 수 있었다. 혁신적인 무정부주의자이자 마르크시스트였던 브레히트, 그리고 유대 교회의 혈통 속에서 성장하며 독일 제국주의에 환멸을 느꼈던 바일. 이들의 예술·정치·사회적 입장은 변증법적 긴장감으로 상생했다.
고전적인 오페라의 양식을 혁신하고, 마법과 환상 안에서의 극이 아니라 실존의 역사 속 음악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신념 아래 두 사람의 협력은 사실주의 오페라의 신문명을 열어주었다. 그 첫 번째 작업 ‘마하고니’는 단 2주 만에 초고가 완성되었다. 실내악 작품으로 출발했던 작품은 수정과 개작을 거듭한 후 온전한 오페라 형식으로 변모하며 ‘마하고니 시의 흥망성쇠’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소개되었다. 1929년 11월, 비로소 제 모습을 갖추게 된 역작 ‘마하고니 시의 흥망성쇠’에는 카바레 송과 재즈, 고전적 오페라 요소가 배합된 새로운 형식의 서사적 오페라 풍자극이었다. 쿠르트 바일은 브레히트와 함께 세공과 연마를 거듭하며 완결한 작품이 베를린 슈타츠오퍼에서 초연되기를 희망했으나, 작품이 지닌 파격과 선정성으로 인한 논란 때문에 극장장 오토 클렘페러의 반대에 부딪힌다. 그 결과 이 작품은 1930년 3월 9일, 라이프치히에서 초연되었다. 선정적인 사창가 장면을 비롯한 일부 장면이 수정·삭제되고서야 공연이 가능했다. 1931년 12월, 쿠르트 바일의 소망대로 베를린에서도 올린 이 작품은 이듬해 봄까지 총 40여 회의 공연을 거듭하며 현대 오페라계에 혁신의 광풍을 불러일으켰다.
‘마하고니 시의 흥망성쇠’가 탈피와 진화를 거듭하는 동안에도 바일과 브레히트의 관심은 다른 작품의 구상으로 이동했다. 두 사람은 1782년 런던에서 공연되었던 영국의 작곡가 존 게이의 ‘거지 오페라’의 현대적 각색을 도모했다. 바일과 브레히트가 현대예술사에 남긴 위대한 선물 ‘서푼짜리 오페라’는 그렇게 태어났다. 베를린의 시프바워담 극장은 1928/1929 시즌을 ‘서푼짜리 오페라’ 한 작품만으로 채우기로 결정했고, 전회·전석 매진의 결과가 뒤따랐다. 작품은 초연 이후 1년간 50개 극장에서 4,200여 회의 공연으로 확산되었다. 1932년에는 18개국의 언어로 번역되면서 세계인의 관심으로 확산되었다. 작품의 수혜자는 바일과 브레히트뿐만이 아니었다. 주역인 창녀 제니 역을 맡은 로테 레냐도 최고의 오페라 가수이자 배우로 명성을 획득했다. 바일·브레히트 콤비는 ‘서푼짜리 오페라’의 성공에 고무되어 곧바로 새로운 작업에 착수했다. ‘베를린 레퀴엠’이라는 라디오 방송을 위한 작품과 쉬프다우어담 극장에서 의뢰한 후속작 ‘행복한 종말’이 이어졌다.
바일과 브레히트의 역사적인 결합을 이끌었던 ‘마하고니 시의 흥망성쇠’는 결국 두 사람의 짧았던 4년간의 공조를 마감하는 결별의 작품이 되기도 했다. 작품의 리허설 중 바일의 음악적인 고집, 브레히트의 사회주의적 입장에서 야기된 갈등은 좁혀지지 않았고, 두 사람의 뜨거웠던 4년간의 협력도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브레히트와 헤어진 후, 아내 로테 레냐와의 관계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둘은 서로의 사랑을 의심하며 새로운 연인을 찾았으며, 1933년 이혼에 합의했다. 이 무렵, 독일에서는 나치즘의 불길이 거세지면서 ‘사회주의 성향’ ‘유대인’ ‘퇴폐 음악 작곡가’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던 쿠르트 바일은 더 이상 독일에 머무를 수 없었다. 이혼 상태였지만 바일과 레냐는 프랑스로 함께 망명을 떠났다. 프랑스에서 의뢰 받은 오페라 ‘칠거지악’을 통해 브레히트와 바일은 재회했다. 1933년 6월, 파리 상젤리제 극장의 초연에서는 로테 레냐가 주연으로 무대에 섰다. 1935년 9월, 쿠르트 바일과 로테 로냐는 뉴욕에서 예정된 성경극을 위해 미국으로 함께 떠났다. 그러나 이 공연은 무산되었고, 바일과 레냐는 프랑스로 돌아가지 않은 채 뉴욕에 정착하기로 결심했다.


▲ 두 번의 결혼 서약을 맺은 영원한 동반자 로테 레냐

미국인 쿠르트 바일, 브로드웨이를 점령하다
쿠르트 바일의 미국 망명 생활은 여러모로 새로운 전환이 되었다. 그가 뉴욕으로 오기 2년 전, 뉴욕에서 공연되었던 ‘서푼짜리 오페라’에 대한 뜨거운 반응은 바일에게 희망과 용기를 안겨주는 환영 인사였다. 뉴욕에서 조지 거슈윈의 오페라 ‘포기와 베스’의 리허설을 지켜보면서 쿠르트 바일도 브로드웨이에서의 본격적인 활동을 구상했다. 그의 희망대로 곧바로 첫 번째 브로드웨이 뮤지컬 작업 의뢰를 받았다. ‘조니 존슨’은 철저히 미국적인 관점에서 기술된 뮤지컬이었다. 총 68회의 공연을 거듭하면서 쿠르트 바일은 성공적으로 브로드웨이에 입성했다. 1937년 1월에는 결별 후 4년 만에 로테 레냐와 두 번째 결혼 서약을 맺었다. 쿠르트 바일은 미국인으로서의 생활에 빠르게 적응했다. 그는 미국에서 생활 중 독일어 사용을 거부하고 영어만 사용했고, 언론에서 ‘독일인 쿠르트 바일’이라고 표기하는 것에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다. 1939년에 초연된 ‘크니커보커의 휴일’은 뮤지컬 작곡가로서의 쿠르트 바일의 성공을 일러준 신호탄이었다. 유진 오닐의 명성에 비견되었던 저명한 극작가 맥스웰 앤더슨과 처음 만나 함께 이룬 뮤지컬은 총 168회의 장기 공연을 기록했다. 곧이어 맥스웰 앤더슨과 함께 ‘마그나 카르타의 발라드’를 성공시킨 쿠르트 바일은 1940년 동생 조지 거슈윈의 사망 이후 창작을 중단했던 작사가 아이라 거슈윈과의 공동 작업으로 ‘어둠 속의 여인’을 마무리했다. 미국 전역에서 500여 회의 장기 상연이 이어졌던 이 뮤지컬은 1940년대의 가장 완성도 높은 뮤지컬 작품이라는 평가를 안겨주었으며, 부부가 함께 거주할 대저택을 구입할 수 있게끔 경제적 여유도 선물했다.
1941년,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직접 가세할 때 쿠르트 바일은 징집 서류에 서명하는 등 스스로가 완전한 미국인임을 내비쳤다. 1942년 발표한 뮤지컬 ‘비너스와 단 한 번의 접촉’은 전작의 성공을 뛰어넘는 뜨거운 격찬과 흥행 성적을 안겨주었다. 할리우드 작가주의 영화의 거장 엘리아 카잔의 연출력이 보태진 이 뮤지컬은 총 567회의 공연을 통해 쿠르트 바일이 염원했던 미국적 오페라·미국적 뮤지컬의 실현을 약속해주었다. ‘여기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나’와 이탈리아의 조각가 벤베누토 첼리니의 삶을 그린 ‘플로렌스의 횃불’은 아이라 거슈윈과의 재회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흥행 결과를 낳았다. 1947년 작 ‘거리의 장면’은 쿠르트 바일이 연마해왔던 고전적 오페라의 양식과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다양성이 어우러진 명작이었다. ‘브로드웨이식 오페라’의 이상을 실체로 보여준 ‘거리의 장면’은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최고 영예인 토니상을 쿠르트 바일의 품에 안겨주었다.
1947년, 쿠르트 바일은 12년 만에 고향 독일로 돌아가 2주간 체류했다. 전후 독일에서의 성대한 환영을 뒤로한 채 미국으로 돌아온 쿠르트 바일은 1948년 10월, 또 한 명의 저명한 브로드웨이 뮤지컬 극작가 알란 제이 러너와의 공동 작업으로 ‘사랑의 삶’을 발표했다. 이 작품도 총 252회의 장기 공연으로 이어지면서 쿠르트 바일의 브로드웨이 점령은 거침이 없었다. 곧이어 극작가 맥스웰 앤더슨과 재결합하여 ‘명성 뒤의 상실’을 발표, 총 273회의 공연으로 이어졌다. 독일에서 함께 했던 극작가 카이저와 브레히트와의 결합에 비견되었던 바일과 앤더슨은 1950년, 의욕적으로 새로운 뮤지컬 ‘허클베리 핀’의 작업에 들어갔지만 이 작품은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다. 1950년 4월 3일, 쿠르트 바일은 뉴욕의 자택에서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눈을 감게 되었다. 아내 로테 레냐는 쿠르트 바일 사후에도 그의 서재를 그대로 보존하고, 쿠르트 바일의 재단을 설립하여 남편의 업적을 기리는 사업을 이어갔다. 1981년 11월 27일, 로테 레냐도 쿠르트 바일의 곁으로 떠났다. (2편에서 계속)

글 하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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