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제럴드 무어의 겸손함을 회고하며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5월 1일 12:00 오전

피아니스트 제럴드 무어의
겸손함을 회고하며


▲ 제럴드 무어와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

“부디 앉아주세요. 신사 숙녀 여러분, 오늘 밤 제가 반주자로서 겸손하지 못했을까 두렵습니다. 사실 저는 때때로 ‘내 반주가 너무 크지 않을까?(Am I too loud?)’ 라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중략) 이 네 분을 대신해 멋진 밤을 마련해주신 데 대해 가슴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이제 작별을 고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고마움을 표현하면서….”
1967년 2월 20일 밤 영국 런던 로열 페스티벌 홀. 두 시간이 넘는 성악가들의 공연이 모두 끝나고 40년을 오로지 반주만 한 68세의 피아니스트는 기립한 청중 앞에서 생전 처음 빠르고 어눌한 말투로 인사를 건넸다. 그러고는 일생에 한 번 무대에서 홀로 리사이틀을 감행했다. 그건 화려한 기교를 자랑하는 음표투성이의 곡도 아니요, 긴 곡도 아니었다. 바로 슈베르트의 가곡 ‘음악에(An die Musik)’를 피아노로만 연주하는 것이었다. 노랫말 그대로 “참으로 음울한 시간에” 우리를 “더 아름다운 세계로 이끌어주는” 거장의 최초이자 최후의 독주는 고작 1분 30초에 불과했다. 제럴드 무어(1899~1987)의 고별콘서트는 이렇게 끝났다.
1930년대 위대한 베이스 알렉산드르 키프니스는 자신의 레코드에 반주자 무어의 이름이 함께 들어간 것을 알고 경악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반주자는 공연 포스터나 음반 표지에 함께 등장할 수 없었다. 오늘날 ‘이중주’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반주자를 치켜세우며 예우하는 것과는 천양지차인 셈이다. 영국 왓포드에서 태어나 13세에 캐나다 토론토로 이주해 안톤 루빈시테인의 제자였던 함부르크의 가르침을 받을 때만 해도 무어의 장래 희망은 오로지 신실한 성직자였다. 하지만 가난한 그에게 무료 레슨을 해주던 스승이 세상을 떠나자 첼리스트로 성장한 스승의 아들 반주를 도맡으며 은혜를 갚은 것이 남은 삶을 결정지었다. 연주자가 커튼콜을 할 때 마치 하인처럼 무대 구석에 서 있어야만 했던 반주자를 독주자와 동등한, 아니 그보다 더 높은 경지의 예술가로 격상시킨 무어의 공로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슈바르츠코프·로스 앙헬레스·디스카우와의 공연을 마련해준 EMI의 명프로듀서 월터 레그가 함께 한 무어의 고별 콘서트는 영원히 남을 명반이다. 슈바르츠코프는 무어의 반주가 “결코 지나치게 크지 않다(He is never too loud)”라고 한마디로 잘라 말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지나치게 목소리가 크다. 그리고 무어처럼 스스로 은퇴해야 할 때도 모른다. 실력이 떨어져도 끝까지 버티며 탐욕으로 가득 차 자리를 지킨다. ‘음악에’의 첫 가사 “거룩한 예술”은 자신을 내려놓았을 때 비로소 실현된다.

글 유혁준(음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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