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촌 꼭대기에 자리한 ‘콩밭커피로스터’

삶 속 가장 가까운 곳의 커피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5월 1일 12:00 오전

해방촌을 찾아온 모든 사연을 가진 이에게 부담 없이 차 한 잔 내어주는 곳
글 조원진 사진 박진호(studio BoB)

해방 후 이북의 사상탄압을 피해 월남한 사람들이 남산 자락에 정착한 것이 해방촌의 시작이다. 전쟁 이후에도 북으로 가지 못한 사람들은 해방촌에 눌러앉았고, 가짜 담배를 팔면서 생계를 이었다. 서울의 중심이라는 지리적 이점, 그럼에도 부담 없는 땅값 때문에 해방촌에는 사람이 끊이질 않고 몰려들었다. 보수적인 이들 세대를 이은 해방촌 2세대는 처참한 노동환경 속에서 자라 70~80년대 노동운동을 이끌기도 했다. 최근에는 지나치게 비싼 집세에 대한 문제를 공유하며 함께 사는 공간을 만든 ‘빈 집’의 젊은 친구들과 이태원에서 올라온 외국인들이 해방촌의 빈자리를 채웠다. 해방촌 오거리에는 이렇게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어우러져 독특한 분위기를 풍긴다.
콩밭 메는 아낙네 김석이 해방촌에 오르게 된 일도 이런 배경과 관련이 있다.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온 대학생에게 해방촌은 괜찮은 조건을 제시했다. 하고 있던 영화 일을 그만두고 커피를 시작하고자 했을 때도, 그는 큰 고민 없이 해방촌의 구석진 자리를 택했다. 대학 시절 자주 갔던 카페 ‘새바람이 오는 그늘’은 그의 이상향이었다. 동네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카페를 만들기에 해방촌은 훌륭한 장소였다. 권리금이 없고 월세가 비교적 저렴하다는 것도 매력적인 부분이었다. 좋은 자리에 가게를 내는 것은 그만큼의 수익을 보장하지만 불안한 단기 계약과 터무니없는 권리금은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카페 창업에 도전한 사람들 중 5년을 버텨낸 비율은 대략 10퍼센트 안팎이다. 중소 규모의 카페에서 세에 대한 부담은 끊임없는 악순환을 만드는데, 연속 추출에도 온도가 잘 보전되는 고급 머신들은 중형차 가격과 맞먹는다. ‘순댓국보다 비싼 커피’에 어르신들은 혀를 내두르지만 그렇게 비싼 커피를 팔아도 장비와 가게에 들어간 투자 비용을 충당하면 바리스타에게 돌아가는 건 고작 몇 푼이다. “언제부턴가 커피를 마시면 땅값을 지불한다는 느낌이 들었다”라는 바리스타 김석의 말은 과장이 아니다.
콩밭커피의 커피 바는 의외로 소박하다. 브레빌 머신이나 바리오 그라인더는 가정용으로 쓰이지만 작은 가게를 찾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커피를 제공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월세나 머신 구입비에서 줄어든 고정비용은 좋은 커피를 착한 가격에 파는 선순환으로 이어진다. 콩밭커피는 스페셜티급 커피를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가격으로 판매한다. 커피 이외에도 마실 거리에 대한 관심이 많은 바리스타 김석은 좋은 재료를 기반으로 한 메뉴들을 개발했다. 질 좋은 생강이 듬뿍 들어간 인도네시아 음료인 반드렉은 이곳의 인기 메뉴다. 겨울 한정으로 팔았던 ‘뜨거운 사과’에는 충청도 충주에서 날아온 사과주가 들어갔다. 지리산 야생차를 비롯해 각종 메뉴에 넣기 위해 순천에서 가져온 꿀은 바리스타 김석의 철학을 대변한다. “장인이 만든 유기농 재료를 아낌없이 쓰면 만드는 사람과 마시는 사람 모두에게 기쁨을 선사한다”라는 그의 말처럼 맛있는 한 잔의 음료가 나오기까지, 땀을 흘린 모두가 고생한 만큼의 대가를 받는다.
좋은 재료를 사용하고, 누구나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음료들이 즐비한 콩밭커피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찾아온다. 지하에 위치한 미싱 공장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들은 올봄에 유행할 옷에 대해 수다를 떨며 티타임을 갖는다. 얼큰하게 취한 할아버지는 바리스타에게 커피 한 잔 사주며 전쟁 후부터 이곳에서 살았던 자신의 역사를 늘어놓는다.
주거에 대한 불안을 공유하는 해방촌 청년들과 동료 바리스타들도 이곳을 찾는다. 좁은 골목, 어디선가 모르게 끊임없이 쏟아지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공간을 채운다. 콩밭커피는 부담 없이 누구든 커피 한 잔 마시고 쉬어갈 수 있는, 동네의 모든 것들과 함께 어우러진 카페다. 카페란 어떤 곳인가, 무엇을 위해 커피를 마시는가라는 질문에 말문이 막힌 당신에게 해방촌에 녹아든 콩밭커피로스터는 멋진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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