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3•어려움 딛고 성장한 노부스 콰르텟 인터뷰

개척 정신으로 써내려간 7년 역사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5월 1일 12:00 오전

2008년에 창단한 노부스 콰르텟이 국제콩쿠르에서 우승하고 지메나워와 계약하기까지.
그들이 걸어온 7년의 세월에는 국내 실내악계의 현실이 고스란히 투영돼 있다

팀을 처음 만든데다 나이도 제일 많아 노부스 콰르텟 전체를 이끌어나가는 리더 역할을 합니다. 처음엔 강한 성격 탓에 부딪힘도 잦았지만, 세 사람과 동시에 결혼한 것 같을 때도 있어요
(제1바이올린 김재영)

에너지가 넘치는 성격이라 리허설 도중에 제가 장난을 치면 멤버들이 웃느라 리허설을 시작하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요즘은 가족보다도 노부스 콰르텟과 보내는 시간이 더 많네요
(제2바이올린 김영욱)

고음과 저음을 하나의 화음으로 어우러지게 하는 데 다리 역할을 하는 비올라처럼 저는 분위기 형성과 의견 화합에 중추 역할이 되곤 해요. 이젠 내 삶이 노부스, 노부스가 내 삶이라 여기게 됐어요
(비올라 이승원)

어떤 사건 사고가 나도 주로 이야기를 들어주는 좋은 상담자 역할을 합니다. 노부스 콰르텟은 아이디어가 고갈될 때 풍부한 상상력을 충전해주기도 하고, 게을러질 땐 자극을 주는 음악적 동반자입니다
(첼로 문웅휘)

우리 클래식계가 자신 있게 내세울 수 있는 현악 4중주단, 노부스 콰르텟(김재영·김영욱·이승원·문웅휘)의 독보적인 존재감은 객관적인 지표가 증명해준다. 올해 초, 굴지의 음악가들이 소속된 지메나워 매니지먼트와 계약한 것은 물론 국제음악콩쿠르에서 거둔 성적이 그러하다. 리더 김재영이 노부스 콰르텟 결성 전에 몸담았던 지겐 콰르텟의 프라하 스프링 콩쿠르 2위를 제외하면 2008년 오사카 콩쿠르 3위, 2009년 리옹 콩쿠르 3위, 2012년 ARD 콩쿠르 2위와 요제프 하이든 콩쿠르 3위, 그리고 올해 모차르트 콩쿠르 1위까지 국제 실내악 콩쿠르에서의 성적은 모두 노부스 콰르텟이 거둬들인 것이다.
2007년 창단된 노부스 콰르텟은 스스로 길을 개척하며 걸어왔다. 실내악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국내 음악계의 풍토부터 복수의 인원으로 구성된 팀이 독립된 개체로서 기능하기에 척박한 환경까지, 어느 것 하나 그들의 발목을 잡지 않는 것이 없었다. 노부스 콰르텟의 리더 김재영을 만나 이들이 걸어온 여정을 듣기로 결심한 이유는 단순했다. 노부스 콰르텟의 7년 역사에는 하나의 실내악단이 성장해오기까지 필요했던 수많은 요소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을 통해 20대 청년들이 직면한 우리 음악계의 현실, 그리고 이제 막 날개를 펼치기 시작한 그들을 통해 가장 최신의 세계 실내악단 지형도를 그려볼 수 있기 때문이다.
노부스 콰르텟은 자신이 실내악의 소리를 들을 줄 아는 ‘귀’를 지녔다고 믿는, 김재영의 어렴풋한 자신이 확신에서 시작했다. 노부스 콰르텟 이전에는 국내 최초 국제콩쿠르 입상이라는 이력을 지닌 지겐 콰르텟이 있었다. 김재영이 19세 나이로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입학했을 때 결성한 단체였다. 평균 나이 만 22세의 이 젊은 단체를 통해 김재영은 실내악단에서 겪을 어려움은 모두 경험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제 콩쿠르에서 입상하게 되자 믿었던 사람이 한순간에 바뀌는 것을 목격했다. 결과물 앞에 사람이 변하고, 모이기만 하면 싸우고, 싸우니 결국 지치고 마는 지난한 과정이었다. 바이올린 주자가 유학을 떠나면서 다른 멤버를 받았지만, 사람을 채워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 속에 3년 정도 지속하고 해체시켜버렸다. 한 차례의 성장통을 겪은 김재영은 어릴 적부터 친했던 김영욱·문웅휘와 함께 새로운 단체를 결성하고 싶었지만 아직 고등학생 나이밖에 되지 않는 친구들을 지켜보면서 2년 정도 기다렸다.
“친형제처럼 지내온 영욱이와 웅휘에게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모두 들려주면서 굉장한 각오가 필요하다고 말했어요. 실내악곡을 잘 연주하기 위해선 낼 수 있는 소리나 연주 가능한 테크닉 측면에서 연주자가 가진 게 많아야 합니다. 오랜 시간 지켜보니 이 친구들이 잘할 수 있을 것 같았죠. 실내악을 듣는 제 귀를 믿고, 우리가 해낼 수 있는 연주 결과물까지 모두 미리 상상하고 만든 팀이에요.”
‘싸우지 않기’라는 단단한 목표를 가지고 출발했지만, 아직 어린 이들은 싸울 일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사정상 비올라 단원이 이승원으로 바뀐 후 맞이한 리옹 콩쿠르 때는 갈등이 절정으로 치달았다. 개인 경비로 콩쿠르를 준비하면서 예민해져 있는데다가 새로운 멤버와 함께 짧은 시간 안에 작품을 준비하면서 2~3년 된 곪은 문제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리더는 리더대로 연습을 빨리 끌고 나가야 하는데, 서로 의견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자존심이 충돌했다. 해외에서 성과를 가져오지 않는 이상 어떠한 지원도 받을 수 없는 냉혹한 현실 속에서 각자의 음악적 자존심은 서로를 날카롭게 겨냥했다.
“대체 왜 저걸 못할까 하는 음악적인 불만부터 시작해서 나중에는 눈 깜빡거리는 것만 봐도 짜증이 났죠. 그때 각자의 한계를 다 봤어요. 개인이 가진 마지노선을 확인하고, 끝을 보고 나서야 생각했죠. 대체 내가 왜 이것을 하는가 하고요. 그런데 우리 콰르텟 활동이 좋으니 도저히 버리지 못하겠더군요. 그래서 이제 싸우지 말자고 설득했습니다. 리허설 때 냉기가 도는 순간이 생기면 차라리 중단하고 나서 한숨 자고 나와요. 싸우지 말자고 합의를 본 시점부터는 지금까지 거의 싸우지 않았어요.”


▲ 사진 유창호

처음부터 목표는 명확했다

노부스 콰르텟이 우여곡절을 거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건 적시에 매니지먼트를 만난 덕이 크다. 2008년부터 지금까지 매니지먼트를 맡아온 목프로덕션과 노부스 콰르텟은 서로에게 정체성을 부여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목프로덕션은 ‘아들처럼’ 노부스 콰르텟을 아꼈고, 이들은 든든한 지원군의 테두리 속에서 성장해왔다. 노부스 콰르텟과 목프로덕션의 이샘 대표를 보면서 늘 한몸처럼 움직인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둘의 관계에 대해 파고들며 질문하자 묘하게 티격태격하는 것이 마치 제5의 단원 같다.
2007년 칸타빌레 콘서트를 기획한 이샘 대표는 오케스트라에 합류한 문웅휘를 눈여겨봤다. 문웅휘의 블로그에서 ‘콰르텟 연습을 마치고 왔다’는 글을 읽고 즉시 노부스 콰르텟의 공연을 찾아갔다. 도넛을 한 박스 사들고 소속 아티스트 제안을 하는 이 대표에게 김재영이 했던 첫 번째 질문은 “항공권을 마련해줄 수 있나?”였다. 연주자의 현실적인 반응 뒤에 따른 소속사의 답변 역시 현실적일 수밖에 없었다. 콩쿠르에 가서 어떻게든 성적을 만들어 와야 우리가 앞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이샘 대표가 실내악에 대한 열정만으로 시작하게 된 노부스 콰르텟과의 첫 만남을 소소하게 펼쳐 보이고 있는데, 김재영이 불쑥 끼어든다.
“저는 누나(노부스 콰르텟은 대표나 매니저라는 표현 대신 누나라는 호칭을 사용한다)가 저희 실력만 보고 매니지먼트를 제안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상업적인 면을 봤을 거예요. 처음엔 지금의 모습으로 성장할 거라고 생각 못 했을 겁니다. 그래도 누나는 우리에게 연주할 수 있는 무대를 줬고, 우리가 성장하는 대로 늘 함께 해줬죠.”
어떻게든 홍보를 해야 하는 대표의 속사정도 모르고, ‘꽃미남’ ‘아이돌’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 이들은 정색하며 반대하기 일쑤였다. 심지어 프로그램을 짜는데도 피 터지는 싸움이 수반된다. 하기 싫은 건 절대 하지 않는 노부스, 그리고 홍보의 측면에서 부각시킬 수 있는 지점을 놓치기 아쉬운 사측 간의 갈등이랄까. 결국 해설 있는 음악회를 하지 않는 대신 프로그램 북에 연주자가 직접 쓴 해설을 선보이는 것으로 대중에게 가까이 가는 등 여러 타협점을 찾아갔다.
이샘 대표는 “좋은 연주자를 키우기 위한 홍보가 무엇인지 나도 많이 배워가게 됐다”라면서도 “마녀 같이 프로그램 북에 들어가는 글자 하나까지 간섭한다”라고 여전히 불만을 토로한다. 김재영 역시 “알아서 다 통하는 사이가 됐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정말 감사하다”라고 말하면서도 결론은 “서로에게 포기한 게 많죠”라고 웃으며 마무리 짓는다. ‘정통’과 ‘홍보’의 묘한 줄다리기 속에서 치열하게 진지함을 지켜낸 노부스 콰르텟, ‘노부스’ 석 자만으로도 지방 곳곳을 따라다니는 팬덤을 만들어낸 기획사. 둘 사이의 진심 어딘가에 노부스 콰르텟은 위치해 있다.

지메나워 매니지먼트와 계약하기까지

노부스 콰르텟의 제2국면은 이들이 2011년 다 함께 뮌헨 음대에서 실내악 최고 연주자과정을 시작하면서 펼쳐진다. 집도 구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개인 전공과 실내악 전공까지 시험 두 개를 보게 하면서 미안한 측면도 있었지만, 김재영은 리더로서 결단을 내렸다. 크리스토프 포펜과 하리올프 슐리히티히가 이들이 실내악 과정 스승이다. 김재영과 김영욱의 바이올린 스승이기도 한 크리스토프 포펜은 이들을 물심양면으로 지도해주고 있는데, “그가 살아가는 방식 하나하나까지 뼈저리게 받아들이게 된다”라고 김재영은 설명한다. 하지만 스승을 만난 이후에도, 2012년 ARD 콩쿠르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이후에도 노부스 콰르텟에게 눈에 띄는 변화는 찾아오지 않았다. 변화는 서서히 물 밑을 흔들고 있었다.
“포펜 선생님이 개인 레슨 도중 지메나워 매니지먼트로부터 전화를 받은 이야기를 하시더군요. ARD 콩쿠르 때 우리의 연주를 모두 관람했는데, ‘지켜보고 싶다’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고요. 결승에서 연주한 베토벤 현악 4중주를 두고 ‘쟤네가 지금 뭘 하는지 모르면서 연주하고 있다’라고 코멘트 했대요. ‘쟤네는 몰라’가 아니라 ‘모르는 거 같으니 2~3년간 지켜보겠다’고 이야기한 건데, 거기서 희망을 봤죠. 포펜 선생님은 그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지메나워와 계약하길 바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곳에 들어가면 지메나워 급의 매니지먼트사에선 우리를 쳐다보지도 않을 것이라고요. 그러니 다른 곳에서 오는 제안도 거절하면서 무작정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계적인 콩쿠르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며 존재감을 알린 후에도 손에 잡히는 결과물이 없으니 초조할 만했다. 포펜 선생은 “비즈니스는 개인적인 대화 없이는 불가능하다”라며 지메나워 여사를 직접 찾아가보라고도 말했지만,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아 애를 끓을 뿐이었다.
그러다 올해 1월 파리에서 열린 현악 4중주 오디션을 기회로 삼았다. 유수 콩쿠르에서 우승한 팀들은 모두 모여 경합을 벌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행사인데, 시차 적응에 실패해 썩 마음에 드는 연주를 하지 못했다. 그런데 지메나워 측으로부터 느린 악장이 무척 좋았다는 피드백을 받았고, 2월 초 모차르트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해 확실한 신임을 얻게 되면서 기나긴 기다림은 종지부를 찍었다. 그리고 2월 중순, 노부스 콰르텟은 아르디티·아르테미스·벨체아·하겐·쿠스 현악 4중주단 등 굴지의 현악 4중주단에 이어 열 번째 팀으로서 지메나워 홈페이지의 메인 화면에 한 자리를 차지했다.

백발의 노부스 콰르텟을 꿈꾼다

“내가 생각하는 라벨이 다르고, 저 친구가 생각하는 라벨이 다르니 처음에는 참 많이도 싸웠죠. 이제는 활 빼는 방식까지 똑같아질 정도로 많이 닮아졌어요. 멤버들의 개인 스케줄들이 충돌할 때는 늘 고민이 되죠. 하지만 하루하루가 변화하는 시기에 노부스 콰르텟을 ‘숙명’이라고 받아들여주는 것 자체가 감사한 지점입니다.”
멤버 개개인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솔리스트인 만큼 ‘조화’는 이들에게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니지만, 그들은 ‘하나 된 우리’로서의 미래를 그리고 있었다. 노부스 콰르텟의 성장기를 담으며 인터뷰가 끝을 향해간다고 느낄 즈음, 김재영은 “힘든 점에 대해 말해야 한다”라며 다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우리 음악계는 결과물을 가져와야만 눈을 돌리는데, 문제는 결과가 좋아도 지원을 안 해준다는 것이죠. ARD 콩쿠르에서 엄청난 성과를 냈다고 생각했는데도 관심이 없었어요. 그때부터 우리는 포기한 것 같아요. 모든 것을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한다고. 이제 유럽의 매니지먼트사와 계약을 했지만, 우리처럼 활동하고 싶은 팀이 생긴다면 그들은 또 얼마나힘든 과정을 거쳐야 할지 걱정돼요.”
제2, 제3의 노부스 콰르텟을 꿈꾸는 후배 실내악단들에 대한 우려도 뒤따랐다. 현실은 하나도 개선된 것이 없는데 “왜 너희는 노부스만큼 해내지 못하느냐”고 다그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스승마저도 제자들이 솔리스트로 성장하길 바라는 인식을 가지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김재영은 지메나워와의 계약 후 받아든 2017년까지의 스케줄에서 세계 유수의 공연장이 포함되어 있는 걸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자랑하는 와중에 결국 ‘지원에 대한 아쉬움’을 이야기했다.
노부스 콰르텟은 이제 ‘젊은 현악 4중주단’으로서 세계를 누비며 점차 자신들의 이름을 알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화려한 승승장구 속에는 여전히 힘든 현실과 도전적인 과제가 산재해 있을 것이다. 이들 네 젊은이는 앞으로도 계속 솔리스트로서의 성장과 한 팀으로서의 운명 공동체 사이를 현명하게 조율해나가야 한다. “노부스 콰르텟은 30년, 40년 후까지 계속할 건가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가야죠. 지금까지는 매니지먼트를 얻는 게 우리의 현실적인 목표였거든요. 이게 잘 됐으니 달성한 것을 잘 유지하는 것이 새로운 목표지요. 음반도 발매하고, 신인으로서 큰 상도 받아야 하고요. 우리 네 명 모두 스스로를 컨트롤하는 법을 터득했으니 자연스럽게 노부스 콰르텟에 집중할 수 있겠죠.”
7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을 이끌어온 것은 작은 ‘확신’이었다. 실내악을 잘 들을 수 있다는 어렴풋한 ‘내 귀’에 대한 확신, 그리고 우리는 갈등을 잘 조절해낼 수 있다는 확신. 두 가지 확신은 노부스 콰르텟만의 음악적인 내용물을 채워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성장했다. 7년의 시간을 견뎌온 이 확신은 다가오는 세월의 부침을 견뎌줄, 조금 더 단단해진 주춧돌이 되었다.

글 김여항 기자(yeohang@gaeksuk.com) 사진 박진호/월간객석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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