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

에필로그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6월 1일 12:00 오전


▲ A Satyr mourning over a Nymph’(1495), Piero di Cosimo, The National Gallery, London

“우리의 선행자(先行者)들, 그들은 모두 어디 있는가”

Ubi sunt qui ante nos fuerunt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무덤으로 간다.

황제들이여, 당신들은 권력의 신 아닌가

시든 잎이 나무에서 떨어지듯

당신도 똑같이

당신의 마지막 노예가 죽을 운명이듯

당신도 그렇게

‘데르자빈 시선’, 조주관 역

미천한 신분에도 변신을 거듭하여 예카테리나 여황 밑에서 최고 권력자에 이르기까지 온갖 고난과 수모를 거쳐 영광의 술잔을 만끽하기도 했던 데르자빈(1743~1816). 그가 마침내 깨달았던 것은 황제도, 노예도 그 종착역은 예외 없이 ‘죽음’이라는 것이었다.

“꿀처럼 아름다운 곳, 아르카디아에도 나(죽음)는 있느니”

Et in Arcadia ego

죽음은 무소부재(無所不在), 도처에 있다.

‘나 또한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 Vado mori’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곧잘 잊어버린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쩌다 말 등에 올라탔다 해서 어찌 벨레로폰처럼 볼썽사납게 우쭐거리랴. 그러다가도 추락과 죽음이 눈앞에 닥친 때에라야 새파래진다.

피할 수 없는 것임을 알면서도 왜 인간은 죽음 앞에서 휘청거리고 때로는 목불인견(目不忍見)의 비굴함을 드러내기도 하는 것일까!

햄릿의 고뇌처럼 “죽는다는 것은 잠자는 것과 같고, 그 잠 속에서 이따금 꿈을 꾸기도 하겠지만, 삶의 사슬을 끊어버렸을 때 어떤 꿈을 꾸게 될지” 몰라서일까.

저녁 좋은 하루의 종말을 알리는 만종(晩鐘)을 울리고

The curfew tolls the knell of parting day

토머스 그레이의 ‘시골 묘지에서 쓴 비가 Elegy Written in a Country Churchyard’는 그렇게 우울한 톤으로 시작된다. 하루하루는 나날이 죽어간다 해도 내일의 아침 해와 함께 나날이 부활하지 않는가?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에는 유독 뭇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그림 한 폭이 걸려 있다. 그 그림 속에서 사냥꾼 케팔로스는 사슴으로 잘못 알고 자신이 쏜 화살을 맞고 숨진 아내 프로크리스를 통곡하면서 어루만지고 있다.

그런데 얼어붙었던 땅, 시들었던 대지에서는 프로크리스의 피가 떨어지면서 새싹이 눈부시게 돋아나고 있다. 죽음이 삶으로 회귀하는 우로보로스 ouroboros의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죽지 않은 채 죽어있는 사람들, 숨 쉬는 시체로 겉만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어제 죽었던 하루의 시체, 그 밤의 어둠을 뚫고 솟아오른 눈부신 햇살을 헛되이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그 눈부신 햇살을 좀더 깊이 음미하기 위해, 수많은 하늘이 무너져내리고 조만간 막이 내릴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예술의 술잔을 소중하게 어루만지고 또다시 삶의 축제를 준비해가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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