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폴론과 마르시아스의 음악시합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6월 1일 12:00 오전

이들의 음악 시합은 인간 본성에 내재된 아폴론적 성격과 디오니소스적 성격, 이성과 본능,영혼과 육체의 갈등을 상징한다. 키타라와 아울로스의 대결은 천상의 질서를 담은 현악기와 관능적인 음색의 관악기, 클래식 음악과 대중음악, 실내음악과 야외음악의 갈등이다

이들의 음악 시합은 인간 본성에 내재된 아폴론적 성격과 디오니소스적 성격, 이성과 본능,영혼과 육체의 갈등을 상징한다. 키타라와 아울로스의 대결은 천상의 질서를 담은 현악기와 관능적인 음색의 관악기, 클래식 음악과 대중음악, 실내음악과 야외음악의 갈등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마르시아스는 관악기 겹파이프로 된 리드악기 아울로스의 명인이다. 그는 현악기 키타라(고대 그리스의 발현악기)의 거장 아폴론에게 음악 시합을 하자며 도전장을 냈다가 끔찍한 죽임을 맞이했다. 바로크시대의 화가 귀도 레니부터 한스 토마·주세페 데 리베라·팔마 일 조반네·루카 조르다노·아놀로 브론치노·클로드 로랭 등 수많은 화가들이 ‘아폴론과 마르시아스의 음악 시합’ 또는 ‘마르시아스를 죽이는 아폴론’ ‘미다스의 판정’을 그린 작품들을 남겼다. 이들 그림에 영감을 받은 음악으로는 아일랜드 작곡가 케빈 오코넬의 소프라노와 바리톤, 기악 앙상블을 위한 극적인 협주곡 ‘아폴론과 마르시아스’가 있다. 이 곡에서 소프라노는 아폴론 역, 바리톤은 마르시아스 역으로 등장한다.

마르시아스는 상체는 사람, 하체는 염소 발굽에 털북숭이 꼬리를 흔들며 지칠 줄 모르는 정력을 자랑하는 동물 사티로스의 일종이다. 유별나게 장난기가 심하고 남의 일에 시시콜콜 참견하는 버릇이 있었지만, 풀과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는 프리기아의 숲과 늪에서는 요정 님프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그는 디오니소스와 술 마시기를 즐겼다. 덥수룩한 머리카락, 옹골차게 튀어나온 앞이마, 아무렇게나 눌러 놓은 듯한 납작코, 못생긴 수제비처럼 빚어진 귀, 땅딸막한 체구는 결코 아름답다고 볼 수 없었다.

그날도 평소처럼 숲 속에 갈대를 깔아놓고 요정을 불러냈다. 곧 분위기가 뜨거워질 참인데 곁에서 인기척이 났다. 마르시아스는 호기심이 발동했다. 투정하는 요정을 밀쳐두고 살금살금 풀숲 사이로 훔쳐보니 낯선 여인이 피리를 불고 있었다. 제우스의 딸 아테나였다.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오똑한 코와 깊게 빛나는 눈, 정갈한 입술은 대리석으로 빚은 조각 같았다. 지혜의 여신다운 풍모였다. 저녁놀에 물든 은빛 투구가 얼굴에 광채를 더하자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숲의 요정 따위는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더구나 아테나는 처녀신이 아닌가. 아테나는 나뭇가지를 다듬어서 만든 피리에서 소리가 제대로 나는지 보기 위해 늪가로 나왔다. 입에 바람을 잔뜩 머금고 숨을 고르게 내보내자 피리에서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구슬프고 애잔한 음색은 듣는 이의 마음을 뒤흔드는 신비한 힘이 있었다. 자장가처럼 편안한가 하면, 진혼곡처럼 엄숙했다. 달빛처럼 그윽한가 하면, 햇빛처럼 장엄했다. 그것은 영혼에 스며드는 바람의 소리였다.

아테나는 직접 만든 피리 소리가 마음에 들었다. 이복동생 아폴론이 연주하는 리라와는 다르지만 맑고 고운 선율이 작은 구멍에서 새어나오는 것이 신기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피리 부는 자신의 모습을 물 위에 비쳐보니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입을 찐빵처럼 부풀리는 것까진 좋은데, 바람이 빠지고 난 뒤 뺨 위에는 가느다란 주름이 잡혔다. 연회 때 연주했더니 헤라와 아프로디테가 두 볼을 잔뜩 부풀린 우스꽝스런 표정에 웃음보를 터뜨렸다. 예술에 대한 사랑과 처녀신이 지켜야 할 정절 사이에서 지혜의 여신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아테나는 고심 끝에 음악을 포기하기로 했다. 처녀가 기다란 물건을 입에 대고 불어대는 모습이 야릇한 상상을 불러일으킬지 모른다는 생각에 아울로스가 보기도 싫었다. 애써 만든 피리를 버리는 것이 속상해서 힘껏 내던졌다.

날아간 피리는 숲에 숨어 있던 마르시아스 곁에 떨어졌다. 마르시아스는 남이 볼세라 얼른 피리를 주웠다. 아테나의 입술이 닿았던 피리를 입에 물고 어찌나 좋았던지 데굴데굴 굴러 동굴까지 왔다. 음악적 재능을 타고난데다 맹연습까지 해서 마르시아스의 연주 기술은 나날이 발전했다. 자연이 들려주는 바람 소리를 스승 삼아 열심히 피리를 불었다. 밥 먹을 때는 물론 잠자리에서도 피리를 입에 물고 있었다. 꿈속에서도 한 점 바람이 되어 피리 속을 들락날락했다. 이쯤 되면 음악의 신이라도 흉내 낼 수 없는 높은 경지에 다다랐을 것이다. 마르시아스는 음악의 신 아폴론과 연주로 겨루고 싶었다. 아폴론이 그의 당돌한 요청을 순순히 수락한 것은 의외였지만, 그동안 연마한 솜씨로 음악의 신을 이길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 미셸 코르넬리 2세가 그린 ‘미다스 왕의 심판’

신성을 넘본 마르시아스의 비극

어느 여름 날, 티몰루스 산정의 우묵한 분지에서 때 아닌 연주회가 열렸다. 아폴론과 마르시아스의 음악 시합이었다. 패자는 어떤 요구라도 들어주기로 했다. 키타라는 대형 리라인데, 아폴론의 이복동생 헤르메스가 어렸을 때 거북이 등딱지와 암소의 창자로 만든 악기다. 이 악기는 헤르메스가 연주하여 어머니를 편안하게 잠들게 했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아폴론은 자신의 소떼를 훔친 헤르메스를 용서하는 대신 키타라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뮤즈들이 심사위원을 맡았다. 1차 경연은 무승부로 끝났다. 아폴론은 마르시아스에게 이번에는 악기를 거꾸로 연주해서 승부를 가리자고 제안했다. 현악기인 키타라는 거꾸로 연주할 수 있지만 아울로스를 거꾸로 부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두 번째 시합은 악기를 연주하면서 노래 부르기였다는 얘기도 전해온다. 키타라는 가능하지만 아울로스는 처음부터 불가능한 기교였다. 그런 줄도 모르고 마르시아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2차 경연은 당연히 아폴론의 승리로 끝났다. 아폴론은 마르시아스를 소나무에 묶어 산 채로 그의 피부를 벗겨 죽였다. 마르시아스의 몸에서 흐르는 피는 그를 불쌍히 여기는 이들이 흘리는 눈물과 합쳐져 강줄기가 되었다.

아폴론은 신성을 넘보았던 마르시아스의 예술적 오만을 참혹한 형벌로 다스렸다. 소나무에 매달린 마르시아스는 스키타이의 형리가 숫돌에 예리한 단검을 가는 소리를 들으며 몸서리를 쳤다. 고대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불손함과 교만·독선을 후회하며 울부짖었다고 한다. 그의 피부에 긴 칼집을 내고 크게 살가죽을 벗겨내자 그의 몸뚱어리는 ‘거대한 하나의 상처’처럼 보였다. 뼈에 달라붙은 힘살이 노출되고, 맥박이 툭툭 치솟았다. 내장이 움실대며 연동하는 모양새와 힘차게 불뚝대는 심장의 표면에 거미줄처럼 달라붙은 핏줄을 가닥가닥 헤아릴 수 있었다. 붉은 피가 강물처럼 흘러내려서 흙 속으로 파고들었다. 깊은 땅 속에 고였던 그의 피는 훗날 강물이 되어 용솟음쳤다.

피부를 벗기는 형벌은 욕망의 통로를 차단하는 동시에 정체성을 말살하는 거세의 상징이다. 아폴론과 마르시아스의 음악 시합은 인간 본성에 내재된 아폴론적 성격과 디오니소스적 성격, 이성과 본능, 영혼과 육체의 갈등을 상징한다. 키타라와 아울로스의 대결은 천상의 질서를 담은 현악기와 관능적인 음색의 관악기, 클래식 음악과 대중음악, 실내음악과 야외음악의 갈등이다. 그림에 따라서 아폴론이 비올 또는 바이올린을 연주하기도 한다. 중세의 음악이론가 보에티우스는 음악을 무지카 문다나(우주의 음악)·무지카 후마나(인간의 음악)·무지카 인스트루멘털리스(악기의 음악) 등 세 가지로 나눴는데, 무지카 문다나는 아폴론의 키타라, 무지카 후마나와 무지카 인스트루멘탈리스는 마르시아스가 연주한 아울로스에 비유할 수 있다. 음악에 대해 다소 엄격한 태도를 취한 플라톤은 아폴론, 쾌락을 위한 음악을 허용한 소크라테스를 마르시아스에 빗대기도 한다. 아테나가 숲에 버렸던 아울로스는 사회의 중심부에서 버린 일종의 ‘금지된 음악’이다. 사실 10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여성 관악기 연주자에 대한 사회적 금기가 매우 강하게 남아있었다.

산 채로 피부를 벗겨 마르시아스를 죽이는 장면은 인간의 욕망을 다스리려는 몸부림이다. 피부를 벗겨내면 얼굴 형체가 사라지는데 이는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자기 정체성, 즉 아이덴티티의 상실이라는 존재론적 파멸이다. 마르시아스의 끔찍한 처형 장면은 중세 후기에 접어들어 신성을 깔보는 교만의 죄에 대한 합당한 대가의 본보기로 그림에 등장한다.

아폴론은 목동의 신 판과도 음악 시합을 벌인다. 목신은 헤르메스와 님프 드리오페 사이에서 태어났다. 심판을 맡은 티몰루스 산신은 이번에도 아폴론의 손을 들어준다. 팬파이프를 연주할 때 얼굴 모양이 찌그러진다는 이유에서다. 목신은 마르시아스와는 달리 시합에 졌다고 해서 벌을 받진 않았다. 다만 프리기아 왕 미다스가 목신의 연주가 훨씬 낫다면서 판정에 불만을 표하자 화가 난 아폴론은 미다스의 귀를 당나귀 귀로 만들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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