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나초 두아토의 ‘멀티플리시티’ 공연을 보던 중 이상한 경험을 했습니다. 첫 장면에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울려 퍼지면서 낮게 흐느끼는 남자 목소리가 들렸거든요. 춤에 몰입한 무용수의 목소리인가 싶어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공연이 끝난 후에도 찜찜함이 가시질 않았어요. 며칠 뒤, 우연히 라디오에서 흐르는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들으며 온몸에 소름이 돋고 말았습니다. 또다시 흐느끼는 남자 목소리가 들렸거든요! 제 말에 코웃음 치던 가족들도 라디오에서 흐르는 생생한 소리에 아연실색하고 말았네요. 유령 목소리라도 녹음된 걸까요? 이 목소리, 대체 정체가 뭐죠? 박성민(강서구 방화동)
멜로디를 따라 흐느끼는 정체불명의 목소리라니, 이제까지 받은 질문 중에서 가장 간담이 서늘해지는 질문이네요. ‘객석’이 독자님의 궁금증을 풀어드리기 위해서 ‘골드베르크 변주곡’ 음반을 집어 들었습니다. 지금 손이 떨리는 것은 느낌 탓이겠죠….
‘객석’ 편집부가 여러 종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앨범을 듣던 중 마지막으로 집어든 음반은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의 1981년 녹음이었습니다. 청각을 잔뜩 곤두세운 ‘객석’ 사무실에 또렷한 피아노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고, 볼륨을 높인 스피커에서 생생히 흘러나오는 것은… 네, 분명 남자 목소리입니다! 어두운 사무실에서 기자들을 공포에 몰아넣은 목소리, ‘객석’도 분명히 들었습니다!
게다가 ‘멀티플리시티’의 안무가 나초 두아토가 밝힌 음악 목록에 따르면 공연 중에 사용된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 또한 글렌 굴드의 1981년 녹음 음반이었어요.
글렌 굴드가 1955년에 녹음한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베스트셀러로 등극해 연주자로서의 명성을 높여준 음반입니다. 주관적인 템포와 강렬한 악센트로 개성을 담아낸 연주를 ‘굴든베르크 변주곡’이라고 부를 만큼 그는 이 곡에 많은 애정을 갖고 있었지요. 이후 그가 1981년에 다시 녹음한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죽기 전 마지막 녹음으로 남아 여전히 사랑받고 있습니다.
독자님과 제가 들은 목소리는 바흐의 목소리도, 무용수의 목소리도 아닌 바로 글렌 굴드의 목소리입니다. 굴드는 천재적인 연주만큼이나 기이한 버릇으로도 유명했는데요, 그중 한 가지가 자신이 연주하는 피아노의 멜로디를 따라 허밍 하는 것이었습니다. 음향 엔지니어들은 녹음 때마다 그의 흥얼거림을 지우려 무진장 애를 썼지만 완벽하게 없앨 수는 없었어요. 예민한 사람들은 “참기 힘들 정도”라고까지 표현하는 굴드의 허밍은, 실제 스튜디오에서는 더욱 심했다고 하네요.
글렌 굴드의 허밍은 어린 시절 그의 어머니가 “연주하는 모든 곡을 노래하라”라고 가르친 데서 시작됐습니다. 굴드는 이 버릇을 고치려 했으나 허밍하지 않으면 연주가 생기를 잃어버리는 것 같다고 느껴 포기했다고 하네요.
피아노를 치지 않는 손으로 지휘를 하기도 했던 글렌 굴드는 연주 환경을 철저히 통제하려는 고집도 셌다고 합니다. 특히 따뜻한 온도를 좋아했기 때문에 음향 엔지니어만큼이나 설비 엔지니어의 고생이 심했다고 하네요. 그는 따뜻한 날씨에도 긴 외투를 입고 장갑까지 끼고 다녔는데, 차림새를 수상히 여긴 이웃의 신고로 공원 벤치에 앉아있다 체포되기도 했습니다.
독자님이 들었던 소리는 자신의 음악세계에 깊이 빠져든 글렌 굴드의 영혼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제는 굴드의 목소리가 친밀하게 느껴지지 않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