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 만난 정명훈

침묵 그 너머의 음악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6월 1일 12:00 오전

숱한 음악 중에서 정명훈이 가장 사랑하는 것은 침묵과 고요의 순간이다. 마치 음악이 다 잦아들어 침묵처럼 들리는 순간에도, 그 침묵 너머에는 음악이 닿고자 하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음악의 혼을 따라가는 정명훈을 좇아 파리와 베를린으로 발길을 향했다.

숱한 음악 중에서 정명훈이 가장 사랑하는 것은 침묵과 고요의 순간이다. 마치 음악이 다 잦아들어 침묵처럼 들리는 순간에도, 그 침묵 너머에는 음악이 닿고자 하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음악의 혼을 따라가는 정명훈을 좇아 파리와 베를린으로 발길을 향했다

프랑스 뮈지크 라디오에서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의 실황 공연 중계가 흘러나온다. 끝없이 이어지는 박수 소리, 진행자가 덧붙인다.

“늘 그렇듯 정명훈의 지휘라 청중이 쉽게 자리를 뜨지 않습니다.”

파리의 대표적인 대형 공연장인 살 플레옐의 2천여 석의 객석은 그가 지휘를 하는 날이면 늘 만원을 이루고, 공연은 아르테를 통해 생중계 된다. 관객들은 40분 넘게 박수갈채를 보내고, 극장에서 공연장의 조명을 다 끄는데, 그 누구도 자리를 뜨지 않았던 적도 있다.

라디오 프랑스 필과 서울시향의 악장 스베틀린 루세브는 “음악가로서 가장 중요한 성장은 모두 정명훈을 통해 경험했다”라고 말한다. 30년간 몸담은 라디오 프랑스 필의 첼로 수석 에리크 레비오누아는 “우리가 온전히 따르는 유일한 지휘자는 정명훈뿐”이라며 방점을 찍고, 트럼펫 수석 알렉산드르 바티는 “라디오 프랑스 필에 입단했다가 중간에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로 옮겼다. 마리스 얀손스는 훌륭한 지휘자이지만 다시 돌아온 이유는 정명훈 아래에서 좀더 음악적으로 성장하고 싶어서”라고 고백한다. 리카르도 샤이가 이끄는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를 거쳐 입단한 젊은 오보이스트 요하네스 그로소는 “정명훈과 함께 하고 싶어서 라디오 프랑스 필을 택했다. 그와 함께일 때에만 경험할 수 있는 음악, 모든 것을 초월하는 순간이 있다”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동안 만난 단원들의 찬사 때문이 아니더라도, 정말 그랬다. 정명훈이 지휘하는 날이면 마법 같은 황홀한 연주를 들었고, 자리에 앉아 팔이 떨어져나갈 정도로 박수를 치고 나서도 마음이 들떠 쉽게 잠들 수 없는 밤을 보내곤 했다.

살 플레옐에서 나와 지하철을 타기 위해 개선문을 향해 걷다 보면 정시마다 반짝이는 에펠탑이 보인다. 그의 연주로 들은 스트라빈스키·슈베르트·라벨·드뷔시·베버·프로코피예프·R. 슈트라우스·말러·브람스·브루크너·베토벤·쇼팽·모차르트… 저 멀리서 반짝이는 에펠탑이 무색할 정도로, 정명훈은 다양한 레퍼토리를 통해 언제나 눈부신 연주를 들려줬다.

지난겨울 첫 피아노 솔로 음반을 발매하며 다시 피아노 앞에 앉은 그를 파리에서, 이후 베를린 필하모닉의 지휘를 맡은 그를 베를린에서 만났다.


▲ 사랑하는 손자 손녀를 위해 지난해 말 발매한 정명훈의 피아노 솔로 작품집

IN PARIS

“지휘자와 피아니스트는 서로 반대편에서

출발해 음악이란 목적지에 도달한다”

지난해 말, 첫 솔로 피아노 음반이 나왔다.

ECM의 프로듀서인 둘째 아들(정선)의 제안으로 이뤄졌다. 처음에는 망설였다. 이미 오래전에 지휘를 택했고, 그동안 프로페셔널 피아니스트로 살아온 게 아니었으니. 그럼에도 결국 이 작업은 큰 기쁨을 선사했다. 무엇보다 이 음반은 내 손자 손녀들을 위한 것이고, 내 이름 앞에 ‘피아니스트’라는 호칭을 붙이기 위해 낸 것이 아니었다. 내 인생에서 음악을 만난 행운은 아주 이른 시기에 주어졌다. 지금으로부터 60년 전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다. 내가 처음 음악을 접한 그 시점에 대해 사람들은 그 당시 어떻게 한국에서 클래식 음악을 접했는지 자주 묻곤 했다. 나는 운이 좋았다. 7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는데 위로 다섯 명의 형제·자매들이 모두 음악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놀라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한국전쟁 직후 황폐한 현실 속에서 정말 얼마 안 되는 사람들만 음악 교육에 신경을 쓸 수 있었다. 나는 엄마 뱃속에서부터 늘 음악을 접해왔으니, 내가 피아노 솔로 음반에 선곡한 곡들은 내 삶에 9개월을 더한 시간만큼 들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에게 음악은 자연스러운 언어였다.

정제된 피아니즘이 인상적이다. 보다 단순해지고 명료해지는 것을 추구하고 있나.

예술가로서 어느 정도 경험의 끝에서 찾는 것은 단순함과 순수함이다. 빈약하지 않고 풍성한 음악의 영토에 선 채로 순수함을 추구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지만, 그나마 나이와 경험이 도움을 준다. 지난해에 나는 드디어 60세가 됐다. 오랫동안 60세가 되면 직업적으로 음악을 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을 하고 싶었다. 사실 음악가에겐 어느 정도 아마추어적인 면이 있어야 한다. ‘이것을 왜 하는가?’ 누군가 묻는다면 ‘사랑하니까’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마음 말이다. 돈을 받는 직업적 의무와는 달리,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것을 해보고 싶었다. 내가 잠시 피아노로 돌아간 것은, 프로페셔널로서 한 페이지를 넘기고, 스스로 음악을 사랑하기에 한다고 말할 수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린 것과 같다. 피아노 솔로 음반을 위해 선택한 레퍼토리들은 어린 시절부터 줄곧 나를 감동시킨 작품들이다. 사실 피아노는 내 첫사랑과도 같다. 5~6세 시절에 내가 세상에서 좋아했던 건 단 두 가지였다. 피아노와 초콜릿. 그래서 이 음반은 첫사랑과의 재회라고 할까. 그 시절 초콜릿의 자리는 지금 가족과 아이들이 차지했다.

어린 시절 어떤 소년이었나. 음악 외에 어린 정명훈의 세계에 다른 존재는 없었나.

기억할 수 있는 한 언제나 음악이 있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누나와 형들을 통해 음악을 들었던 것이 많은 영향을 끼쳤고, 그때의 시간은 내가 음악가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줬다. 그때의 나뿐 아니라 모든 음악가들이 결국 위대한 작곡가들의 메시지를 전하는 메신저 역할을 하지 않나. 음악은 기적과 같고, 그 안에 담긴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에 최대한 어린 나이에 음악을 시작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 지난 4월, 말러 교향곡 2번을 연습 중인 정명훈/라디오 프랑스 필 ©Jean François Leclercq

피아노 솔로 음반 녹음 과정은 어땠는지.

아무리 쉬워보이는 곡도 레코딩을 하는 건 어려운 작업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는 조금씩 심장과 정신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을 표현할 수 있게 된다. 테크닉에서도 좀더 자유로워지고. 음악에 담긴 많은 이야기들, 내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들려주고 싶은 것에 집중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연습이나 실전의 테크닉에 대해선 거의 신경 쓰지 않게 됐다. 나는 녹음 전반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서 모든 것을 다 책임져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ECM의 수장인 만프레트 아이허가 바로 그런 사람인데, 감수성이 예민하고 아주 좋은 귀를 가졌다. 그와 함께 작업하면 참 만족스럽다. 나는 녹음이 끝난 이후엔 내 녹음을 절대로 다시 듣지 않는다. 라디오 인터뷰를 하면서 약간의 음원들을 일부만 들은 적이 있었는데, 정말 괴로웠다. 나도 모르게 찍힌 내 사진을 본다거나 내 목소리를 우연히 다시 들을 때 느끼는 낯선 감정이랄까. 단점과 실수, 부족하고 약점인 것만 보인다. 물론 스튜디오에서 녹음하면 편집을 위해 어느 정도는 들을 수밖에 없다. 나는 스스로에게 가장 엄격하고 지독하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늘 괴롭다. 그래서 안 듣는 것이 최선이다. 한편으론 이번에 녹음을 하면서 피아노를 좀더 제대로 연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지하다고 해서 내가 다시 피아니스트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악기를 연주한다는 건 적지 않은 헌신과 노력, 집중을 요구한다. 그러니 그만한 시간을 쏟아야겠지. 어쩌면 다음에 좀더 피아니스트다운, 성인을 위한 레퍼토리들을 연주할 수도 있지 않을까.

피아니스트로서 더 활동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나.

나는 모든 집중력을 하나에 두어야 한다.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물론 그렇게 하는 음악가들도 있지만 적어도 내 경우는 아니다. 최선을 다 쏟아붓기 위해 나는 단 하나만 선택해야 했다. 처음에는 선택하기 어려웠지만 결국 지휘를 택했다.

지휘자는 소리를 직접 만들어내지 않는 유일한 음악가다. 내 생각에 지휘자는 100퍼센트의 음악가는 아닌 것 같다. 이 세상에 소리를 내지 않는 음악가가 지휘자 말고 또 어디 있을까. 그러나 지휘자만이 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 늘 그래왔고 지금도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말러의 교향곡은 피아노로 대체될 수 없다. 이렇게 거대한 교향곡은 온전히 오케스트라만을 위해 존재한다. 그 점이 나를 매료시켰고 지휘로 이끌었다. 동시에 내가 내 손으로 직접 소리를 자아내지 못하고, 악기에 손을 대어 음악을 만들어내지 않아서인지 늘 피아노가 미련으로 남아있다. 독주자로서는 피아노를 더 이상 연주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실내악은 꾸준히 연주했고, 반주자로도 종종 무대에 올랐다.

쇼팽은 이번 앨범에 포함될 뻔했지만 나중에 제외됐다고 들었는데. 혹 당신에게 의미 있는 메시앙이 작품집에 포함될 가능성은 없었는지.

메시앙은 손자 손녀들이 청소년쯤 됐을 때 들어야 하지 않을까. 다행스럽게도 피아노 레퍼토리는 매우 풍성하다. 피아니스트로서 어려운 점은 그 많은 레퍼토리 가운데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음반을 준비하면서,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친숙한 곡들을 골랐다. ‘반짝반짝 작은별 변주곡’의 주제 테마는 누구나 다 알 것이다. 열두 개의 변주곡들은 음반을 통해 이제 알아가게 될 것이고. 다른 곡들은 나의 개인적인 경험, 삶의 조각들과 맞닿아 있다. 차이콥스키 ‘사계’ 중 ‘가을의 노래’는 아이들이 듣기엔 좀 슬플 수도 있지만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 내가 차이콥스키 콩쿠르에 참가했을 때 연주했던 곡이다. 그때 처음 러시아에서 이 곡이 매우 사랑받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당시 나는 러시아에 난생처음 발을 디딘 한국계 미국인이었지만, 이 곡을 통해 청중의 내면에 깊이 들어갈 수 있었고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이런 식으로 모든 곡들이 내 삶의 사소한 편린들을 대변한다.

좋아하는 피아니스트를 꼽는다면.

라두 루푸·마르타 아르헤리치·언드라시 시프.

피아노 앞에서도 당신은 지휘자인가.

사실 그렇다. 지휘자로서 살아온 40년간의 경험이 음악적으로 나를 도와준다. 사소한 부분에 더 이상 집착하는 게 아니라 음악을 좀더 총체적이고 구조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 다음 각각의 음에 최선을 기울인다. 하지만 그 반대로는 음악을 바라보지 않는다. 내가 피아노를 할 때는 반대였다. 첫 음부터 한 음 한 음과 맞서 싸웠고 고민했다. 그 다음에 한 마디, 동기, 프레이즈… 마지막에 가서야 곡의 전체를 볼 수 있었다. 그러니까 지휘자와 피아니스트는 어느 정도는 서로가 반대 지점에서 출발해 음악이란 목적지에 도달하는 셈이다.

“말러를 연주하기 위해, 나는 지휘자가 됐다”

 


▲ 2012년 라디오 프랑스 필·은하수 관현악단의 공개 리허설 ©Orchestre Philharmonique de Radio France/Christophe Abramowitz

라디오 프랑스 필에서 14년 넘게 있었고, 요즘 로열 콘세르트헤바우·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라 스칼라 등에서 객원 지휘자로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개성이 다양한 유럽의 오케스트라와 함께 해온 소감이 어떤지 궁금하다.

물론 오케스트라마다 다르다. 사실 나는 집에 있는 것을 가장 좋아하고, 돌아다니는 것을 즐기지 않는다. 일도 서울이랑 파리에서 하는 것이 가장 좋다. 다른 오케스트라 객원 지휘를 특별히 좋아하는 건 아니다. 오케스트라들 실력이 워낙 좋다 보니 지휘하기 편하지만, 타고난 성격이 있지 않은가. 나는 적은 수의 친구들과 깊게 사귀고, 가까운 사람들하고만 친하게 지낸다.

연주할 때 지휘자로서 어떤 느낌을 받나. 객석에서 보면 잠시 아득한 곳으로 정신의 여행을 떠나는 인상을 받곤 한다.

말러의 작품을 연주할 때면 특히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곳으로 향하는 기분이다. 완전히 어딘가로 갔다가 돌아오는 건 아니지만, 지휘하는 동안 내 몸이 다른 차원에 속한 느낌을 받는다. 연주하면서 가장 흥분되고 신나는 건 비상한다는 느낌일 것이다. 특별히 연주가 잘되는 날, 자유롭게 훨훨 날아가는 느낌이 든다. 내 몸과 영혼이 공중에 떠 있는 기분이랄까.

리허설을 보니 원하는 소리를 말보다는 ‘소리’로 표현하던데. 노래에도 재능이 있나.

노래는 못한다. 목소리보다는 몸 전체에서, 몸 안에서 우러나오는 소리일 것이다. 성악가처럼 기교를 갖춘 표현은 못하지만 단원들에게 내가 원하는, 찾고 있는 소리가 무엇인지 표현할 수 있다. 단원들도 말보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더 직관적으로 이해한다.

지휘 동작이 정확하고 아름답기로 정평이 나 있다.

제스처는 사실 대단한 것이 아니다. 지휘자가 움직이는 방법은 아이들도 다 따라할 수 있다. 테크닉은 누구나 빨리 배울 수 있는 부분이다. 오히려 간단할 정도로 쉽다. 박자를 세고 악상을 표현해주고. 악기에 비해 테크닉이 쉽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다른 점들이 어렵다. 지휘자가 단지 오케스트라 앞에 서서 박자를 세는 역할을 하는 사람은 아니니까, 더 많은 공부를 더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 나는 정말로 이제야, 일평생 공부를 하고 난 지금에서야 나 자신을 지휘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그럼 지금까지는?

젊은 지휘자였지. 이제야, 드디어 아무런 수식 없이 그냥 지휘자가 된 느낌이다(웃음).

말러 시리즈를 시작했던 2013년 3월 1일, 라디오 프랑스 필의 프로그램 북을 보니 “말러를 연주하기 위해 나는 지휘자가 됐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글쎄, 그건 언젠가 말러에 관한 이야기를 하던 중 나온 이야기다. 그 자리에 말러 대신 베토벤·브람스를 넣어도 유효할 것이다. 다만 말러의 남다른 점은 오케스트라만으로 가능한 지점의 음악이기 때문이다. 베토벤은 서른두 개의 피아노 소나타를 남겼고, 브람스 역시 다른 종류의 곡을 많이 썼으나 아홉 개의 엄청난 규모의 교향곡, 오케스트라로 도달할 수 있는 정점에 다다른 곡을 쓴 건 말러다. 오케스트라 지휘자라면 누구나 말러를 꿈꿀 것이다. 개인적으론 2013년 8월 말, 서울시향이 연주한 말러 9번이 정말 좋았다. 무척 힘든 곡인데 그때 레코딩을 위해 준비를 아주 철저하게 했다. 준비만으로 특별한 연주가 되기는 힘든데, 연주도 정말 잘 되었다. 우리도 그날은 우리가 정말 잘했다는 걸 알았으니까.

나는 많은 연습을 통해 오케스트라가 온전히 준비되어 있기를 바란다. 연주할 때 최고의 기량을 발휘해야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다. 우리의 목적이 바로 그 지점이니까. 그건 지독하게 준비를 많이 해야만 가능하다. 그런데 연습해서 준비한 그대로 한다는 건 아무런 재미가 없다(웃음). 음악의 혼, 정신을 느껴야 한다. 음악은 위대한 존재이고, 역사적으로 문화 전반을 통틀어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예술이다. 그래서 위대한 음악은 영혼을 움직이고, 특히 클래식 음악은 내면 깊은 곳까지 파고든다. 다른 장르의 음악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깊은 지점이다. 테크닉만 보더라도, 한 악기를 마스터 해서 음표 그대로 연주하는 것이 쉽지 않다. 얼마나 많은 연습으로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인가. 그럼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왜 하는가? 음악을 하는 목적은 음악에 담긴 혼을 되살려내기 위함이다. 혼이 없는 연주는 무의미하다.


▲ 2014년 진은숙 생황 협주곡 ‘슈’ 음반 녹음 현장 ©유니버설뮤직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모든 곡을 암보로 지휘하는 당신에게 압도된다고 말한다.

외워서 하는 건 제일 기본이다. 누구나 공부만 하면 가능하다. 그건 힘든 게 아니다. 악보에 기반해 음악의 영혼을 어떻게 불어넣느냐 하는 점이 힘들다. 순서대로, 아래부터 차근차근 쌓아가야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음악의 혼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쌓지 않고 그냥 멋있게 뭔가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으론 절대 안 된다. 악보를 외우는 건 차근차근 올라오는 단계에서도 하위권에 속한다. 테크닉과 함께 공부를 하면 되는 지점이다. 많이 공부하고 준비한 걸 가지고 어떻게 하면 음악의 중심에 다다를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악보에 파고드는 거다.

10년 전 인터뷰를 보니 “60세에 지휘를 관두겠다”라고 여러 번 말했다. 이제 60세를 지나왔는데.

그땐 그랬으면 했다. 프로페셔널한 건 그만두고 마음에서 우러나는,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겠다고 생각했다. 라디오 프랑스 필도 벌써 3년 전에 관두겠다고 말했지만, 조금씩 연장하다 보니 이제야 후임자(미코 프랑크)를 찾아내서 그만두게 됐다. 책임지는 일을 맡는 건 내키지 않는다. 하지만 서울시향은 내가 맡은 다른 일과는 비교할 수 없다. 한국인으로서, 막중한 책임감으로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세계적 수준의 오케스트라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그래도 내 자리를 이어서 할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음악은 점점 더 좋아지는데, 책임을 맡는 건 점점 더 힘들어진다. 그전에도 그랬지만 지금은 더욱 그렇다.

지휘자에게 요구되는 음악 외적인 역할이 많기 때문인가.

그 음악 외적인 것이 싫다. 안 그래도 소리가 손끝에서 나오지 않아 답답한데, 음악 말고 다른 일까지 신경 써야 하니 말이다. 개인적으로 피아노를 계속 붙들고 있는 것도 그래서다. 소리를 내야 음악을 좀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지휘자는 음악을 떠나 책임져야 할 것이 많다. 제일 고역스러운 건 다른 음악가들을 판단하는 것이다. 단원을 뽑고 오디션을 꾸준히 해야 하는데, 나는 세상에서 오디션이 제일 힘들고 싫다. 이제는 좀 안 하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음악가뿐 아니라 무대에 서는 모든 사람들에겐 매일 서는 무대가 곧 오디션이다. 청중 앞에서 오디션을 보는 것이나 다름없다.

오케스트라에 소속된 음악가들이 겪는 어려움에는 무엇이 있나.

오케스트라에서 연주를 한다는 것은 정신뿐 아니라 여러 부분에서 굉장히 힘들다. 음악가들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것을 음악으로 표현하기 원하고 그래서 음악을 하는 것인데, 오케스트라에서는 자신을 표현하기에 앞서 지휘자, 동료들에게 맞춰야 한다.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그러니 내면에 갈등도 생기고음악가로서 자신을 희생하는 부분이 얼마나 많겠나. 그래서 직업적인 안전장치가 있는 것이다. 넉넉한 봉급과 종신제 임명. 그런데 서울시향은 아직은 그렇게 해줄 수가 없다. 여러 부분에서 적정 수준에 올라가지 못했으니까.

처음 서울시향을 시작할 때부터 내가 던진 질문은 이거였다. ‘우리가 원하는 지점이 어디냐, 나와 함께 무엇을 하고 싶으냐.’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 ‘서울시향은 세계적인 수준을 원한다.’

말은 쉽다. 세계적인 수준이 과연 쉬운 일인가. 얕은 세계적 수준? 그건 아닐 것이다. 정말 세계적인 수준이라면 단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실력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데 목관악기의 경우, 세계적 수준에 도달한 음악가들은 대한민국 어디를 둘러봐도 없다. 물론 젊은 음악가들이 공부하고 연마하면서 그 수준에 오르고 있는 중이다. 목관은 다행히도 점점 나아지는 중인데, 금관은 아직도 갈 길이 멀다. 호른·트럼펫·트롬본에서 세계적인 수준에 오른 연주자가 대한민국에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래서 잘하는 외국인 단원들을 데려오게 되는 것이다. 난 그들을 데려오기 전에 얼마나 책임감을 갖고 그 자리를 맡을 수 있는지 묻는다. 연주를 그저 잘하는 사람은 많지만, 함께 연주하는 것으로 우리를 얼마나 도와줄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서울시향을 자주 찾는 악장 스베틀린 루세브과 트럼페터 알렉산드르 바티에게 서울시향의 발전을 위해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물었다. 그들은 그걸 일종의 미션으로 여긴다고 했다. 한편 제안을 받았지만 그 부분에 자신이 없어서 몇 번 객원 연주만 하고 거절했다는 단원들도 있었다.

유럽에는 연주를 잘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중 아무나 데려온다고 해서 서울시향에 긍정적인 역할을 해줄 수 있는 건 아니다. 한 단원의 존재는 연주로만 끝나는 게 아니다. 오케스트라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다. 가장 자주 오는 루세브·바티·페뤼숑 이 세 사람은 전 세계 어느 오케스트라나 갈 수 있는 실력을 갖춘 연주자들이다. 로열 콘세르트헤바우나 베를린 필과 같은 유수의 오케스트라 단원들보다 더 잘한다. 그런데 실력만으론 안 된다. 가능한 한 우리를 많이 도울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금관악기의 불모지인 한국에서 젊은 연주자들이 나타나기를 바라며, 헌 신적으로 트럼펫 아카데미를 운영하는 알렉상드르 바티는 정말 훌륭한 사람이다. 나는 스베틀린과 그를 ‘음악의 천사’로 여긴다. 음악적인 것은 물론이고, 인간적으로도 그 사람처럼만 하면 된다고 우리 단원들한테 말한다. 음악이나 인성 모두 흠잡을 데가 전혀 없는 무결점의 스베틀린은 서울시향의 현악군의 수준을 한 차원 더 높이 끌어올렸다. 왜 외국인을 데려오느냐고 비난하는 사람들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하는 말이다. 그걸 비난하려면 당장 세계적인 수준에 대해선 기대도 하지 말아야 한다. 게다가 오케스트라를 키운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다. 후원이 있어야 하고, 이 후원이 점점 더 커져서 넉넉한 재정에서 운영되어야 한다. 그런데 전용홀은 그렇다 치더라도 예산이 오히려 줄어들고 있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관객들이 듣고 직접 판단하기 때문에 서울시향 공연에 유료 관객들이 많아졌다는 점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해외 오케스트라가 오면 당연히 더 높은 수준이고 훨씬 잘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건 착각인 경우가 많다. 그래도 긍정적으로 보는 것은 해외 오케스트라와의 실력 차이가 차츰 줄어들고 있고, 가끔은 우리가 더 잘할 때도 있다는 것이다. 2013년 8월 29일 서울시향과 말러 교향곡 9번을 연주하고난 한 달 후,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를 지휘를 한 적이 있는데, 솔직히 말해서 서울시향이 더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시향에 대해 더 바라는 점이 있나.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춰지면 좋겠다. 또 서울시향이 국민 오케스트라가 됐으면 좋겠다. 어떻게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으나, 시에서 돈을 받고 그 예산에 기반해서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청중이 출연한 후원금이 펀드처럼 모이는 방식 말이다. 그런데 내가 제일 못하는 게 기획·경영이다. 이런 건 다 빵점이다(웃음). 모든 책임과 업무, 기획과 경영을 맡는 사람이 있어서 모든 일을 다 처리해주고, 나는 그냥 오케스트라와 연습하고 공연 때 지휘만 하는 거라면 지금의 자리를 기쁘게 맡을 수 있을 것 같다.

“음악은 많은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단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당신이 지휘했던 여러 공연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공연은 북한의 은하수 관현악단과 함께 한 2012년 3월 공연이었다. 그날은 기자석에 문화부 기자들이 아닌 사회부 기자들이 왔다. ‘피가로’ ‘르 몽드’ ‘리베라시옹’과 BBC 등… 클래식 공연장이 낯선 사회부 기자들이 당신의 이야기와 이어진 ‘아리랑’을 듣고는 눈물을 글썽였다.

내가 태어난 해에 한국전쟁이 끝났는데, 분단의 비극이 이렇게나 오래 지속될 줄은 누가 알았겠나. 우리는 가족과도 같았고, 음악으로 헤어진 민족을 만날 수 있어 깊은 감동을 받았다. 다만 모든 것이 감시하에, 통제하에 있어서 말 한 마디조차 자유롭게 할 수 없었던 게 아쉬웠다

그래도 음악만큼은 자유로웠다. 베토벤 교향곡을 연주하기에 앞서 단원들에게 왜 그가 이런 곡을 썼는지, 어떻게 그의 음악 안에 이런 힘과 에너지가 가득 들어차 있는지, 그가 일평생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그리곤 난 바로 “자유!”라고 말했다. 베토벤이 인간의 자유를 위해 세상과 대결하듯 곡을 써내려갔다고 말했는데 다들 놀라며 어쩔 줄 몰라 하더라. 베토벤에게서 자유를 빼면 무엇이 남겠나. 그런데 만약 내가 음악가가 아니라 야구선수였다면 어땠을까. 야구선수가 북한에 초청을 받아 갔는데 모두들 앞에서 “자유!”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꿈같이 들리겠지만 음악가들만이라도 더 자주 만나고, 소통하고, 교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나. 만약 이 프로젝트를 위해 라디오 프랑스 필이나 라 스칼라를 다 관둬야 한다면, 내일이라도 당장 관둘 수 있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났을 때, 모든 해외 오케스트라가 예정된 일본 공연을 취소했지만 당신은 서울시향을 이끌고 일본으로 향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을 통해 일제 강점기의 아픈 기억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 미국에 머물렀는데, 어쩌다 일본어를 들으면 그게 그렇게 싫었다. 일제 강점기를 떠올리면 알 수 없는 적대감이 치밀어 올랐다. 우리 부모 세대는 그걸 직접 경험했으니 용서하거나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망각하지는 않더라도 역사의 페이지를 넘기고 용서할 수 있다. 또 음악을 하니까. 일본에서 오래 활동하며, 그들이 치밀하고 철저하게 준비해서 일하는 면은 배울 만하다고 생각한다.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장점을 합쳐서 음악적인 성취를 이룰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고.

음악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어떤 고민을 갖고 있나.

뭔가를 크게 해결할 수는 없지만 도움이 되는게 음악이다. 클래식 음악의 깊이와 아름다움은 국경을 뛰어넘는다. 아시아에 있든 미국에 있든 어디에서든 우리가 연주를 시작하는 순간 정체성이나 국적은 완전히 잊는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을 말할 때, 첫째 인간, 둘째 음악가, 셋째 한국인이라고 말한다. 음악보다 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가치가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 종교적 신념 같은 추상적인 것뿐이겠지. 음악보다 앞서는 건 인간으로서의 삶이고, 음악을 국적 앞에 놓는 건 의도적이 아닌 저절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음악은 판단이 필요치 않을 정도로 훌륭하고 위대하니까. 음악은 많은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말로는, 단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나에게 음악은 전부다.

음악이 지닌 보편적인 가치를 생각한다면 당신에게 전부일 수 있나.

음악은 보편적이기도 하지만 모든 걸 초월하기도 한다. 숱한 음악 중에서도 내가 가장 사랑하는 순간은 침묵과 고요의 순간이다. 마치 음악이 다 잦아들어 침묵처럼 들리는 순간에도 그 침묵 너머에는 음악이 닿고자 하는 그 무엇이 있다. 침묵 속에도 음악의 혼은 여전히 깃들어 있다.

지휘 도중 침묵 속으로 완전히 침잠한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나는 원래 말로 자신을 표현하는 데 어려움이 많은 사람이다. 어느 오케스트라와 만나더라도 말하는 것보다 단순하게 바로 연주하는 것을 선호한다. 연주하는 순간 우리는 자신을 한껏 열어젖히게 된다. 바로 그때 말로는 전해지지 않는 것들이 오가기 시작한다.

IN BERLIN

“내가 베를린 필을 지휘한 것보다

진은숙의 첼로 협주곡을 연주한 것이 더 의미있다”


▲ 지난 5월 8일 정명훈/베를린 필하모닉의 공연

베를린 필하모닉과의 공연 전날인 5월 7일, 베를린에서 만난 정명훈은 여전히 피아노 악보와 함께였다. 그는 쑥스러운 듯 “잠시 휴가를 떠나는 기분으로 왔다”고 했으나 첫 리허설에서부터 자신이 원하는 소리를 철저하게 빚어 나갔다. 브람스 교향곡 2번을 연주하는 동안 그는 구체적인 주문을 했다.

“이 부분은 자장가처럼 들렸으면 좋겠다. 내가 찾고 있는 음향적인 콘트라스트가 아직 들리지 않는다.”

그는 지나친 악센트를 배제할 것을 구체적으로 주문했고, 악장은 같은 프레이즈를 여러 번 반복하며 원하는 세기의 악센트를 찾아나갔다. 그렇게 한 시간이 지나자 거짓말처럼 악단의 소리가 바뀌어 있었다. 이전의 브람스가 밀도 높은 소리로, 지나치게 날 선 철골 구조물 같았다면, 정명훈이 만들어낸 브람스는 완만한 곡선을 지닌 매끄러운 도자기를 연상케 했다. 그리고 그는 도자기 표면에 상감무늬를 새겨넣는 장인처럼 공들여 그가 원하는 음향을 빚어나갔다. 브람스가 지니고 있는 서정과 섬세함에 색을 입혀 완벽에 가까운 구조적 형식미 사이에서 음표 하나하나가 지닌 색채가 배어나올 수 있도록 말이다.

5월 8일 공연 첫날, 박진감 넘치는 베를린 필의 사운드가 필하모니를 울렸다. 정명훈의 장기인 베버 ‘마탄의 사수’ 서곡은 리허설에서부터 이미 완성도가 높았고 실황의 열기가 더해져 마치 야수파 그림 속 강렬한 색채를 연상케 했다. 황홀한 음향적 색채가 끝없이 눈앞에서 터져 나왔다. 에마뉘엘 파위의 영롱한 플루트 독주는 흩뿌려진 색채에 빛을 더했다.

이어진 진은숙의 첼로 협주곡은 놀라운 완성도와 신비로운 음악 언어로 베를린 청중을 완벽하게 압도했다. 30분에 달하는 곡을 암보로 연주한 첼리스트 알반 게르하르트에게 끝없는 박수가 쏟아졌다. 공연이 끝나고 따로 만난 플루트 수석 에마뉘엘 파위는 “진은숙의 곡을 연주하는 것이 바이올린 협주곡에 이어 두 번째인데, 지금도 그녀의 음악 언어는 늘 새로운 미스터리다. 엄청난 비르투오시티와 함께 정교함의 극한까지 뻗어나간 곡이다”라고 진은숙의 첼로 협주곡에 대한 찬사를 보냈다. 이날 첼로 수석을 맡은 젊은 첼리스트 브뤼노 들레플레르는 “솔로 첼로에 요구되는 기교 때문에 연주하고 싶은 엄두도 나지 않는 난곡이다. 그저 오케스트라 파트를 연주하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럽다. 그만큼 빼어난 첼로 협주곡이다”라고 덧붙였다.

2부의 브람스 교향곡 2번은 정명훈의 역량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선곡이었다. 특유의 완벽한 균형감과 절제를 바탕으로 프레이징을 짧게 끊어 목가적인 멜로디에 서정적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정명훈은 기존의 베를린 필이 들려주던 브람스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브람스를 선사했다. 특히 2악장에서 목관이 절묘하게 밸런스를 맞추며, 정명훈이 찾던 자장가처럼 부드러운 멜로디를 들려줬다. 3악장에서 오보에·클라리넷·플루트는 완벽한 조화를 이뤄냈고, 현들은 이어서 음악적 뼈대에 얇은 베일을 씌우듯 신비로움이 깃든 발걸음으로 음악을 향해 걸어가며 주제를 덧입혔다. 화려한 4악장, 모든 악기들이 만개한 주제를 묘사하는 와중에 눈부시게 매력적인 브람스가 그곳에 있었다. 찬란한 색채와 대조적 패시지가 빚어내는 풍성한 양감, 거기에 서정이 깃들어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정명훈만이 들려줄 수 있는 브람스였다. 우아하고도 단순하게 절제된 프레이징 이후, 내달리는 패시지에서 그간 담아뒀던 박력 있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우아하고 절제된, 색채감 넘치는 소리는 그가 이끄는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의 강점이지만 이렇게 박력 있는 소리는 베를린 필이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자신의 손 아래 최고의 소리를 내는 악단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정명훈은 담담하게 음악을 쌓아나갔다. 4악장에 교향곡만이 도달할 수 있는 절정이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었다. 이윽고 절정에 다다른 악기들은 모든 것이 고조된 그 지점에서 환희에 찬 표정으로, 음악을 향해갔다. 불꽃놀이의 한 장면처럼 모든 악기가 형형색색의 불꽃처럼 터져나갔다. 절정의 순간, 이대로 곡이 끝난다는 것이 한없이 아쉽기만 했다. 목가적인 서정에서 황홀감까지 한꺼번에 경험한 청중들은 이런 색다른 브람스는 처음 들어본다며 긴 환호와 기립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공연의 흥분이 채 가라앉지 않은 얼굴의 에마뉘엘 파위는 “정명훈은 이미 2년 전에 왔어야 했다. 그를 너무 오래 기다렸다”라고 운을 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객원 지휘자가 베를린 필에 와서 해야 할 역할은 우리가 아바도·래틀과 해나갔던 작업과는 완전히 다른 부분이다. 객원 지휘자는 짧은 시간 동안 음악에 대한 비전을 선보이는데, 우리로서는 그들이 새로운 시도를 선사할수록 더 가치 있게 느껴진다. 정명훈에게는 동양적인 ‘선’과 신비로움이 느껴진다. 그는 포디엄에 선 채로 침묵하고, 그 스스로 음악 안에 들어간다. 침묵과 몰입으로 지휘를 해나간다. 브람스 교향곡 2번 1·2악장에서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브람스를 우리에게 요구했다. 더 부드럽게 노래할 것, 강약의 대조를 더 만들어낼 것, 현과 관 사이의 밸런스를 강조하면서 말이다. 3·4악장은 지금껏 우리가 했던 브람스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가 가져온 작은 변화로 인해 전체적인 인상이 완전히 달라졌다. 마치 수염 없는, 젊은 시절 말끔하고 매력적인 브람스의 얼굴을 보는 것 같았다.”

첼로 수석 브뤼노 들레플레르는 “정명훈이 원하는 걸 우리가 다 해내지는 못한 것 같아 아쉽지만 클라이맥스에서 음악적 황홀감을 그 어느 때보다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연주였다”라고 덧붙였다.

공연을 마치고 백스테이지에서 만난 정명훈에게 소감을 물었다.

“내가 베를린 필을 지휘한 것보다 더 의미 있는 것은 작곡가 진은숙의 첼로 협주곡을 연주한 것이다. 연주자들이야 뛰어난 한국 출신들이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작곡가는 정말 단 한 명도 없지 않았나. 베를린 필이 시즌 프로그램에 포함해 연주하는 유일한 한국인 작곡가인 진은숙의 작품을 연주했다는 것이 가장 뿌듯하다. 베를린 필이야 원래 정말 잘하는데 뭐라 할 말이 더 있겠나. 내가 집이라고 생각하는 곳,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 서울과 파리에서 하는 공연이 더 의미가 있다.”

베를린이든 파리든, 서울이든 그곳이 어디인지는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정명훈은 언제나 그만이 가 닿을 수 있는 음악적 마법을 무대 위에 불러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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