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맨시니 ②

하종욱의 20세기 클래식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5년 11월 1일 12:00 오전

20세기 음악사의 가장 명징한 서정과 낭만

팝과 클래식 음악의 간극을 메우는 두터운 감동

헨리 맨시니는 넉넉하지 않은 머리숱을 옆으로 곱게 빗어 넘긴 모습으로 작곡·편곡·지휘·연주 활동을 하면서 1960년대의 영상 속에 자신만의 어법에 의한 사운드를 아로새겼다. 그는 1960년대에 아카데미 영화음악상 총 7회 노미네이트, 3회의 수상을 거머쥐었고, 16개의 그래미상을 획득했다. 1969년 그가 피아노를 연주하고, 오케스트라와 코러스를 지휘하던 앨범 ‘A Warm Shade of Ivory’는 연주 앨범으로는 이례적으로 빌보드 앨범 차트에서 5위를 차지하는 경사가 있었다. 이 따스함 가득한 앨범에 수록된 ‘Love Theme from Romeo&Juliet’은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빌보드 넘버원 싱글에 등극하는 기쁨을 선물했다.

1970년대에도 헨리 맨시니의 명성을 쫓아온 작곡 의뢰는 계속되었다. 1970년, 한 해 동안 총 네 편의 영화음악을 담당했던 헨리 맨시니의 작품들은 빠짐없이 귀한 평가를 얻어냈다. ‘해바라기(Sunflower)’는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거장 비토리오 데시카 감독이 연출을, 소피아 로렌과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가 주연을 맡은 명작이었다. 한 편의 ‘명화’와도 같은 시각적인 연출 사이를 메웠던 섬세하고 풍부한 감성의 비가들은 또 한 편의 선연한 인상을 남기며 아카데미 영화음악상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블레이크 에드워즈와 그의 부인 줄리 앤드류스가 주연을 맡았던 ‘밀애(Darling Lili)’ 역시 뮤지컬 영화의 숨은 걸작답게 헨리 맨시니(작곡)-조니 머서(작사)-줄리 앤드류스(노래)의 삼위일체가 잘 어우러진 주제곡 ‘Whistling Away the Dark’는 그해 아카데미 주제가상에 노미네이트되었다. 19세기 아일랜드 석탄 노동자 조합의 탄생 과정을 그린 마틴리트 감독, 숀 코너리와 리처드 해리스 주연의 ‘몰리 맥과이어스(The Molly Maguires)’에서 헨리 맨시니의 음악은 그 어떤 영화에서보다 주도적인 입장에서 영화의 흐름을 이끌었다. 영화의 시작은 일체의 대화도 없이 약 15분 동안 헨리 맨시니가 이끄는 3곡의 음악만으로 채워졌다. 아이리시 선법에 의한 하모니를 적극적으로 채용하고, 아이리시 하프, 금속으로 만든 틴 휘슬, 아코디언과 유사한 음색의 스퀴즈박스 등을 사용하여 아일랜드 이주민의 이야기라는 사실적 접근을 끌어냈다.

막스 폰 시도우·리브 울만이 주연한 ‘밤의 방문객(The Night Visitor)’에서도 기존의 영화음악과 드라마 음악에서 볼 수 없었던, 신시사이저와 두 대의 피아노, 두 대의 하프시코드, 12개의 목관악기와 오르간이라는 독특한 악기 편성으로 다시금 눈길을 끌었다. 4분의 1음이 낮춰진 하프시코드의 튜닝을 통해 긴장과 불안의 감정을 고조시키는 심리적 효과를 드러내기도 했다.

 

추락과 재기의 시간들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1972년 작 ‘프렌지(Frenzy)’는 헨리 맨시니에게 잊을 수 없는 굴욕을 안긴 작품이었다. 공포 영화의 거장 알프레드 히치콕이 오랫동안 함께 작업하던 버나드 허먼이 아닌, 주로 로맨틱과 코미디 장르에서 빛을 발하던 헨리 맨시니에게 작업을 의뢰한 것만으로도 화제와 기대를 낳았다. 그러나 버나드 허먼의 작풍을 답습하고 있는 헨리 맨시니의 레코딩을 접하고 “내가 버나드 허먼을 원했다면, 그에게 작곡을 의뢰했을 것이네”라며 불만을 표시한 히치콕은 작곡자를 론 굿윈으로 교체했다.

‘프렌지’에서 경질된 이후에도 헨리 맨시니는 해마다 3~4편 이상의 영화음악을 담당했지만, 지난날 히트곡 메이커의 명성은 회복하지 못했다. 1973년 작 ‘오클라호마 유전(Oklahoma Crude)’에서는 팝스타 앤 머레이가 부른 ‘Send a Little Love My Way’가 미국과 캐나다에서 사랑받았다. 이외에 헨리 맨시니가 1973년 이후 참가했던 영화 음악 중에서 세인의 관심을 끈 작품은 드물었다.

아카데미상과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그의 작품이 후보로 오르는 일도 거의 없었다. 이 시기 헨리 맨시니가 담당한 영화음악이 아카데미 영화음악상 후보에 오른 것은 1976년 ‘핑크팬더의 역습(The Pink Panther Strikes Again)’에 삽입된 ‘Come to Me’가 최우수 작곡상 부문의 후보로 오른 것과 1979년 ‘텐(10)’이 두 부문에 노미네이트된 것이 고작이었다. 과거의 영광을 공유하던 블레이크 에드워즈·더들리 무어·줄리 앤드류스·보 데릭 등이 출연한 ‘텐’에서 헨리 맨시니는 프로코피예프와 라벨의 클래식 음악을 삽입했다. 그의 곡 ‘It’s Easy to Say’는 아카데미 주제가상 후보에 올랐다. 1980년 작 ‘계절의 변화(A Change of Seasons)’의 음악은 그해 최악의 영화를 선정하는 시상식인 골든라즈베리상에서 최악의 영화음악 후보로 거론되는 불명예를 얻기도 했다.


▲ 뮤지컬 영화 ‘빅터 빅토리아’ 포스터

헨리 맨시니가 오랜 침잠의 시간을 깨고, 통산 네 번째 오스카 트로피를 수상하는 영광을 수여한 작품은 1982년 작 ‘빅터 빅토리아(Victor Victoria)’였다. 이 작품 역시 소울메이트였던 블레이크 에드워즈와의 협업이었다. 줄리 앤드류스·제임스 가너·레슬리 앤 워렌·로버트 프레스턴이 출연한 이 뮤지컬 영화에서 헨리 맨시니가 작곡한 뮤지컬 넘버는 뮤지컬의 고전성과 현대적 감각이 더해진 작품이었다.


▲ 헨리 맨시니와 수많은 작품을 공동 작업한 블레이크 에드워즈 감독

헨리 맨시니의 마지막 유산

1980년대 이후 헨리 맨시니는 해마다 새로운 영화음악 작업에 참여했으나 그 성과는 미미했다. 1982~1983년의 핑크 팬더 시리즈 ‘핑크 팬더의 추적(Trail of the Pink Panther)’ ‘핑크 팬더의 저주(Curse of the Pink Panther)’의 흥행 실패와 함께 새로운 핑크 팬더를 위한 그의 음악도 존재감이 없었다. 1985년 가족 영화 ‘산타클로스(Santa Claus)’를 통해 따스한 음악적 정담을 표현한 후, 이듬해에는 월트 디즈니에서 의뢰한 ‘위대한 명탐정 바실(The Great Mouse Detective)’에 참여, 첫 번째 애니메이션 영화의 음악을 담당하기도 했다. 1993년 작 극장판 ‘톰과 제리(Tom and Jerry)’에서도 헨리 맨시니는 재즈풍 편곡과 금관 악기, 타악기를 적극 사용하여 흥겹고 재기발랄한 사운드트랙을 펼쳤다. 1983년에 만들어진 TV 드라마 ‘가시나무새(The Thorn Birds)’에서는 플루티스트 제임스 골웨이가 연주하는 처연한 주제곡이 국내의 음악 팬들의 사랑을 누리기도 했다. 1970년대의 인기 외화 ‘형사 콜롬보(Columbo)’와 1980년대의 ‘레밍턴 스틸(Remington Steele)’ 등 헨리 맨시니는 100여 편의 드라마 음악을 남겼다.

1991년 ‘스위치(Switch)’에서는 더블 앨범 분량의 OST를 만들어, 한 장에는 오리지널 작곡을, 한 장에는 팝과 재즈 넘버의 리메이크를 수록하는 의욕을 쏟았다. 블레이크 에드워즈와의 특별한 인연과 오랜 우정으로 세기의 영화음악 작곡가로 위상을 굳힌 헨리 맨시니의 마지막 작품도 블레이크 에드워즈와 함께한 작품이었다. 1993년 작 ‘핑크 팬더의 아들(Son of the Pink Panther)’은 블레이크 에드워즈가 감독을 맡은 마지막 핑크 팬더 시리즈였으며, 동시에 헨리 맨시니의 마지막 영화 음악 작품이었다. 헨리 맨시니는 이 영화를 끝으로 더 이상의 필모그래피를 생산하지 못한 채, 1994년 6월 14일, LA 베벌리힐스에 있는 자택에서 간암으로 향년 70세의 생애를 마감했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서도 자신의 마지막 아카데미 수상작 ‘빅터 빅토리아’의 브로드웨이 뮤지컬 버전을 위한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 헨리 맨시니 예술 아카데미가 속한 뉴욕의 링컨파크 아트 퍼포밍센터

헨리 맨시니의 사후 2년 뒤인 1996년에는 헨리 맨시니 인스티튜트가 설립되었고, 2001년에는 미국저작권단체인 ASCAP와 헨리 맨시니가 후학을 가르쳤던 UCLA에서는 헨리 맨시니 음악 장학금을 제정했다. 2005년에는 뉴욕의 링컨파크 아트 퍼포밍센터에 헨리 맨시니 아트 아카데미가 개소했고, 미국의 우정국은 헨리 맨시니의 사망 10주기인 2004년 헨리 맨시니의 음악적 업적을 기리는 기념우표를 발행했다.


▲ 헨리 맨시니 기념우표

70년의 삶, 45년간의 활동 기간 동안 200여 편의 영화음악, 100여 편의 TV 드라마 음악과 앨범을 빚어낸 헨리 맨시니의 음악적 본질은 가벼움이었다. 간결한 구조의 듣기 쉬운 경음악(輕音樂)이었다. 그러나 헨리 맨시니의 감각과 감성에 의해 만들어진 ‘Moon River’ ‘The Days of Wine&Roses’, 그리고 ‘샤레이드(Charade)’ ‘핑크 팬더(The Pink Panther)’ ‘피터 건(Peter Gunn)’ 등의 주제 음악은 오늘날의 대중음악이 추구하고 표방하는 가장 보편화된 가치의 선례였다. 동시에 가장 서정적이고 낭만적이며 드라마틱한 감성으로 향유되고 있는, 20세기 음악사의 위대한 고전이었다. 헨리 맨시니의 가벼움은 현대의 음악에서 팝과 클래식 음악의 간극을 메우는 가장 두텁고 무게 있는 감동이 되었다.

추천 음반

Breakfast at Tiffany OST (1961)

헨리 맨시니가 엮어낸 스크린 속 숱한 명작 중에서도 단 하나 ‘불멸의 선택’이라면 이견 없이 ‘Moon River’이며, 이를 포함하고 있는 ‘티파니에서의 아침을’이다. 2분 30초에서 3분 20초 사이 짤막한 12곡의 수록곡은 ‘Moon River’를 비롯하여 단정하고 신선하며 서정과 낭만으로 충만한 소품들이다. ‘Mr. Yunioshi’ ‘Hub Caps and Tail Lights’ 등에 숨은 헨리 맨시니의 다양한 작곡법과 아이디어를 찾아보는 묘미가 있다.

A Warm Shade of Ivory (1969)

헨리 맨시니표 경음악의 최고의 작품은 빌보드 앨범 차트 5위와 생애 최초 빌보드 싱글 차트 1위 등극을 안겨준 본작이다. 앨범에서는 작곡가 헨리 맨시니의 표정보다는 편곡자, 밴드 마스터, 연주자로서의 표정이 한층 밝게 조명된다. 출중한 피아니스트이자 오르가니스트였던 헨리 맨시니의 피아노 연주가 이끄는 풍성하고 감미로운 오케스트레이션이 앨범 전면을 따뜻하게 비춘다.

Original Album Classics (2008)

헨리 맨시니의 음악적 연대기를 한 번에 조망할 수 있는 컴필레이션 앨범 중에서 최다 곡을 수록하면서도 오리지널리티를 잘 간직하고 있는 앨범이다. 5장의 CD, 총 80곡의 수록곡은 헨리 맨시니의 명성의 오르막과 내리막을 두루 조망하는 한편, 영화와 드라마의 OST뿐 아니라 그의 연주곡을 풍성하게 펼쳐낸다. 그의 음악적 스펙트럼이 얼마나 폭넓었는지를 절로 인정케 만드는 박스 세트.

글 하종욱

하종욱은 “좋은 음악에는 장르와 경계의 구분이 없음을 신봉하는” 음악 칼럼니스트다. 공연 및 음반 기획, 연출, 제작, 평론, 강의 등 음악과 이웃한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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