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흐’에게서 받은 영감으로 바이올리니스트는 곡을 썼다. ‘보경’이라는 이름으로
‘바흐-보경 환타지아…ing’가 있던 10월 30일, 늘 보아오던 바흐일 거라는 생각으로 안성 리베아트센터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리베아트센터를 둘러싼 전원에 내리던 가을밤은, 수많은 연주자가 내 기억에 그린 바흐 바이올린 무반주 소나타와 파르티타의 풍경은, 이보경이 그리는 색다른 바흐의 풍경에 점점 잠기고 있었다.
“바흐 무반주 소나타와 파르티타를 레코딩하면서 받은 어떤 영감들은 나를 또 다른 길로 인도했다. 나는 음악가이기에 그런 감정들을 음악으로 표현하고 싶어 오선지에 음표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 ‘바흐-보경 환타지아…ing’ 프로그램 북 중에서
첫 곡으로 무반주 소나타 1번 1악장을 연주하기 전, 이보경의 간략한 해설이 있었다. 이어진 독주 후, 그녀는 이 곡에서 받은 ‘느낌’을 설명한 후 그녀가 직접 작곡했다는 4중주곡 ‘회상’을 들려주었다. 이런 식으로 무반주 파르티타 1번 7악장 독주와 자작곡 ‘바로크 여행’, 무반주 소나타 3번 7악장과 ‘미래’, 무반주 소나타 2번 3악장과 ‘아리아’, 무반주 파르티타 3번 1악장과 ‘음과 유희’, 무반주 파르티타 2번 5악장 ‘샤콘’과 ‘대화’를 선보였다. 무반주이기에 바흐와 독대한 상황에서 받은 영감으로 빚은 여섯 곡은 피아노(이제찬)·비올라(김보연)·첼로(어철민)가 함께 하는 4중주곡이었다.
누군가는 그녀가 작곡에 일가견이 있을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이보경은 다른 길 한번 걷지 않고 연주자로서 올곧게 성장한 모범생이다. 세 살 때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하여 예원학교·커티스음악원을 거쳐 스무 살에 파리국립고등음악원 최고연주자 과정을 마치며 집약적인 학습 과정을 마쳤다. 2007년 ‘객석’의 ‘차세대를 이끌 젊은 예술가’에 선정되었고, 2013년까지 서울시향 제1바이올린 부수석을 역임했다. 현재는 어머니(배설의)가 관장으로 있으며, 미술을 사랑하는 아버지(이강래)가 그린 그림들이 전시된 리베아트센터를 중심으로 활동 중이다. 그리고 예원학교·서울예고·파리국립고등음악원에서 수학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오빠(이제찬)가 늘 함께하고 있다. 남과 다른 이보경만의 ‘바흐 활용법’이 궁금하여 공연이 오르고 며칠 뒤, 이야기를 나눠보았다.
2013년 12월 서울시향에서 나온 후 리베아트센터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동안 리베아트센터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기획공연과 외부의 연주를 꾸준히 하고 있다. 3집 앨범 ‘프랑스 인상주의’와 4집 앨범 ‘바흐’를 발매했고. 두 앨범은 독립 레이블인 리베아트에서 발매한 것이다. 2013년에는 리베아트 청소년오케스트라(LAYO)를 창단하여 80여 명의 학생과 재능 나눔 콘서트를 해마다 4회 이상 같이 하고 있다. 청소년들이 음악을 통해서 건전하게 잘 자랄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바흐-보경 환타지아…ing’을 기획한 이유가 궁금하다. 바흐 소나타와 무반주 파르티타 전곡을 담아 2015년에 내놓은 네 번째 음반과 관련이 있을 것 같은데.
3집 앨범 발매 후 다음 앨범 프로젝트를 어떻게 할지 고심을 많이 했다. 고민 끝에 선택한 것이 바흐의 무반주 작품 전곡이었다. 10대 말미에 파가니니의 24개 카프리스 전곡을 녹음하여 1집 앨범을 발매한 경험이 있기에 20대의 말미에도 의미 있는 도전을 해보고 싶었다. 또 다른 이유는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자신 내면의 소리’를 찾고 싶었다. 4집 앨범 ‘바흐’는 두 장으로 구성되다보니 녹음 과정은 전보다 훨씬 길었다. 반복을 많이 하는 녹음 과정은 일반적인 연습 과정과 다르다. 매 순간, 매 테이크마다 최선을 다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 앨범에서는 마치 죽은 소리 말고-나는 이것이 음반이 지닌 특유의 단점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옆에서 연주하고 있는 것처럼 녹음하려고 무척 애를 썼다. 너무 힘들어서였는지 쉴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나더라. ‘이렇게 어려운 곡, 듣는 사람들도 정말 힘들겠다.’ 그리고 처음에는 장난삼아 몇 부분을 이렇게 저렇게 내 나름대로 변형해 연주해보았다. 그러다 이런 시도를 해보았다고 가족에게 이야기하니 그럼 본격적으로 곡을 써보라고 용기를 주더라. 그래서 ‘바흐-보경 환타지아…ing’를 구상한 것이다. 제목처럼 바흐의 음악이 나에게로 흘러들어와 ‘환타지아(환상곡)’가 되었고 계속될 것이라는 뜻이다. 25년 정도 연주만 일삼은 바이올리니스트이지만, 클래식 연주자들이 고전과 명곡에만 머물지 않고 자신의 창작곡이나 동시대 현대곡을 많이 연주하는 것을 통해 클래식 음악이 오늘날에도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는 어떤 의무감이 있다고 생각한다.
작곡가 아닌 연주자가 고전 레퍼토리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작곡과 연주하는 형식의 음악회를 접한 적이 있는가?
세상은 넓으니 어떤 연주자가 하기는 했을 것이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접해보지 못했다. 특히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곡을 가지고 변화를 준 작품은 거의 없는 걸로 알고 있다. 근사한 경험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유학 시절 파리 가르니에 극장에서 본 ‘한여름 밤의 꿈’이라는 작품이었다. 안무가가 멘델스존(1809~1847)의 곡 사이에 리게티(1923~2006)의 곡을 넣어 새롭게 구성하여 낭만 시대와 현대가 만나게 한 것이다. 당시에는 충격이었다.
부소니가 편곡한 ‘샤콘’처럼 바흐를 통해 나온 명곡이 많은데, 어떤 곡을 제일 좋아하나?
브람스가 왼손만을 위해 편곡한 바흐 ‘샤콘’으로, 피아노곡이다. 부소니는 편곡하는 과정에서 집어넣고 덜어낸 것도 있는 반면, 브람스는 원곡에 충실했다.
반복, 반복, 반복 끝에 차이가 보였다
“클래식 음악이 오늘날에도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나 또한 이보경의 이 말이 와 닿았다. 그날 밤, 힌데미트가 쓴 글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 의무를 부여하는 유산’을 들춰보았다. 바흐를 마시고 자신의 음악을 뿜어낸 이 작곡가가 쓴 여러 구절 중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자신의 예술적 경지를 개척하고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똑같이 작업하는 것을 원시적 반복, 낭비로 보았고, 그러한 책임감에 충실했습니다. (…) 그의 음악은, 우리의 모든 심성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 어떤 다른 대가의 작품도 그러하지 못합니다. 그의 음악은 낭만적 동화에서처럼 묻힌 유산이었고, 오랫동안 감춰져 있었으며, 잊혀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침내 우리는 여러 세대들을 지나면서 그 음악을 되살리는 법을 배웠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소유하고자 상속받은 것입니다.’
여기서 ‘그’는 바흐를 말한다. 이 구절이 더 눈에 띈 건 이보경 때문이었을 것이다. 똑같이 작업하는 그 원시적 반복을 벗어나 음악을 되살리던, 음악적 유산의 소유자이자 상속자 이보경 말이다.
영감을 받는 순간 가장 먼저 취했던 행동은 무엇이었나. 환호? 메모? 녹음?
제일 먼저 오선지에 빨리 적었다. 다음은 바이올린이나 피아노로 연주해보고.
진행하면서 어떤 점이 가장 힘들었는가?
아무래도 작곡이었다. 학교 다닐 적에 화성학, 대위법, 음악 분석 등 작곡에 필요한 과목을 공부하긴 했다. 하지만 작곡을 하기에는 부족했다. 오빠(이제찬)가 많이 가르쳐주고 도움을 주었다.
떠오른 선율을 그린 뒤 오빠에게 보여주면 작곡가의 입장에서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냉정했다. 기발하다며 격려해주었고, 어느 부분은 상투적이라는 얘기도 했다. 객관적인 평가들이었다. 그래서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 같다.
무반주곡으로 고독하게 바흐를 바라보던 것과 현악 4중주를 통해 연주자들과 바흐를 함께 바라보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었나?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자신만의 해석을 불어넣은 레코드가 수없이 존재한다. 그래서 남과 다르게 하기 위하여, 또 나만의 내면을 찾아가기 위해 생각을 많이 해야 한다. 나에게 바흐의 작품은 이성적이고, 그날그날 기분 따라 다른 감정을 요구하는 낭만 시대의 곡들과는 다르다. 예를 들어, 활 주법을 사용할 때는 그에 정당한 이유가 있어야 하고 반드시 통일성이 요구된다. 반면 내가 작곡한 곡들은 피아노 4중주 편성이기 때문에 다른 연주자들과 함께 호흡하며 음악을 만들어나갔다. 다만 내가 작곡했다는 점이… 첫 리허설 때는 나를 굉장히 긴장하게 만들었다. 흥분도 되었다가, 한편으로는 낯이 뜨거워지기도 했다. 내 속마음을 다 보여준, 그런 느낌이었다.
120석의 리베아트홀을 가득 메운 관객들에게 이제찬 씨가 어떤 곡이 제일 좋았느냐고 묻자 많은 이가 무반주 소나타 3번 4악장을 토대로 한 ‘미래’라 답했다. 이날의 앙코르로도 이어졌고. 당시 선보인 곡 중 어떤 곡이 제일 마음에 들었는가?
무반주 파르티타 3번 1악장과 그것을 토대로 쓴 ‘음과 유희’다. ‘미래’는 듣기 쉽고 타악기도 나오고 했으니 관객 호응도 좋았을 것이다. 파르티타 3번 1악장은 아홉 살 때 처음 연주해봤다. 곡의 초반에 등장하는 14개의 음이 바흐의 이름을 상징한다는 것을 훗날 유학 가서 알게 되었는데, 연주하는 나조차 신기하더라. 그래서 ‘음과 유희’에서는 바흐의 이름을 세 번 외쳐본다는 의미에서 이 부분을 세 번 반복하며 시작하도록 작곡했다.
매 곡의 끝나는 마디에서 마침표를 찍는 듯한 보잉을 할 때마다 씩 웃더라. 그 웃음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자신의 연주에 100퍼센트 만족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단지 연주 시 관객으로부터 어떠한 느낌을 늘 받곤 하는데, 그날은 창작곡도 있었고 바흐의 작품이 좀 어려울 수도 있는데 관객들의 호응이 굉장히 좋았다. 나의 곡들이 청중에게 어떤 감정의 동요를 불러일으켰다는 생각에 좋아서 웃은 것이다.
‘바흐-보경…ing’에 이어 계속 다른 작곡가와 ‘ing’할 계획이 있는가?
작곡가는 많다. 사실 서울시향에 재직하던 3년 전만 해도 내가 작곡을 한다는 건 상상도 못했다. 이번 프로젝트는 ‘순간’과 ‘고심’이 낳은 것이다. 나에게 영감의 ‘순간’을 제공하고, 곡을 만들기 위해 ‘고심’하게 만드는 다음 작곡가가 누가 될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갖고 있나?
‘바흐-보경…ing’를 확장하여 내년에 서울공연을 할 생각이다. 다음 앨범도 녹음해야 하고. 계획 따라 움직이기보다는 즉흥적인 면이 있다. 열심히 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걷게 되는 다른 길에 재미가 있는 것 같다.
보내온 사진 중에서 눈으로 뒤덮인 리베아트센터의 전원 풍경은 너무 아름다웠다. 첫눈 내릴 때 생각나는 음악이 있다면?
비발디 ‘사계’ 중 ‘겨울’, 차이콥스키 ‘호두까기 인형’, 그리고 드뷔시 ‘눈 위의 발자국’ 등등. 올해는 또 다른 음악이 생각날지도 모르겠고.
전대의 작곡가로부터 물려받은 음악적 ‘유산’을 에너지 삼아 연주와 작곡이라는 ‘유산소’ 운동을 하는 것이 음악과 그 역사에 주는 건강을 생각해보았다. 그러면서 연주라는 행위에만 국한된 오늘의 음악계가 떠올랐다. 시인 이성복은 느낌의 잔해인 ‘사실’에서 ‘느낌’을 자아내는 게 ‘예술’이라고 했던가. 바흐가 남긴 음악적 잔해로부터 느낌을 자아낸 이보경의 여섯 곡은, 그렇게 기억 속에 깊이 남았다. 그녀의 이 작은 움직임이 한국음악계에 변화를 일으키는 큰 힘은 아니더라도, 또 다른 길이 있음을 알려주는 작은 이정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진 이은비(studio Bob)·리베아트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