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송현민의 CULTURE CODE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5년 12월 1일 12:00 오전

음악사 속의 낯설면서도 낯익은 여성음악가들의 이야기

여성 | 성(性)의 측면에서 여자를 이르는 말. 특히, 성년(成年)이 된 여자를 이른다

2015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1948~)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전쟁에 참전했던 200여 명 여성의 이야기를 모은 소설이다. 스베틀라나는 러시아 옆에 있는 작은 나라 벨라루스의 저널리스트이자 작가다. 그녀는 벨라루스가 옛 소련에 속하던 1983년에 이 소설을 썼고 1985년 출간했다. 35개국에서 200만 부가 넘게 판매되었지만 1992년에 이 책은 재판정에 출두해야 했다. 남성적 영웅과 신화로 가득한 전쟁이 원치 않던 이야기를 담았기 때문이다.

남자들과 같이 나치에 대항해 싸웠지만 제2차 세계대전의 여성 영웅들은 참전 사실을 숨겨야 했다. 어린 소녀들은 전쟁 중에 처음으로 생리를 하고, 탱크를 몰고, 저격병으로 활약하는가 하면 병원에서도 일했다. 적의 포로가 되면 상상할 수 없는 고통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그녀들은 ‘숨어야 하는 존재’ 혹은 ‘숨겨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날개를 펴지 못한 새들

남성이 그어놓은 선 밖으로 나올 수 없던 여성들의 이야기는 음악사에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음악사는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구스타프 말러의 부인 알마 말러(1879~1964)는 자서전에 “여성이란 묘하게도 결혼만 하면 곧 자아를 떨쳐버린다”라고 적었다. ‘32개의 노래-상상의 유럽 여행’을 작곡한 요한나 킨켈(1810~1858)도 마찬가지였다.

‘나의 피아노는 지금 기저귀 빨래 걸이가 되었다. (…) 나는 피아노를 치고 싶어 못 견디겠지만 (…) 첫 일 년이 지나 아이들로부터 눈을 떼게 될 때까지 자기 세계에 몰두하는 것은 체념해야 한다.’

19세기 전반에 걸쳐 유럽에 여성음악가의 비율이 크게 증가했고, 여러 기회가 확대됨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은 늘 있었다. 가정과 사회의 제한으로 연주자, 작곡가가 될 수 없었던 여성들은 다른 방법으로 음악 문화에 참여해야 했는데 그것은 글쓰기였다. 이를 통해 때로는 소극적이고, 때로는 적극적으로 여성의 음악 활동을 위한 목소리를 냈다. 당시의 일기, 편지, 자서전, 자서전적 소설 등에는 남성이 독식한 음악사의 무의식에서 자맥질하는 여성 음악가들의 존재와 움직임을 읽을 수 있다.

남편 말러가 작곡하는 것을 반대하여 작곡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알마 말러는 자서전을 통해 창작에 대한 열정과 음악에 대해 고뇌하는 모습을 내비쳤다.

‘1902년 11월. 나는 가끔 날개를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구스타프, 어찌하여 훨훨 날고 싶어 하는 이 새를 당신 곁에 붙들어 매어두십니까? (…) 나는 오랫동안 번민했다. 내 마음의 갈등이 그 원인이거나 그 결과겠지. 하지만 나는 이 며칠간의 낮과 밤을 통하여, 또다시 음악을 엮고 있었다. 말을 하면 그 말 밑에는 엮어지는 음악을 느낄 수 있을 만큼 뚜렷하게, 밤에는 잠을 잘 수 없을 만큼 강렬하게. (…)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멘델스존의 누나 파니 헨젤(1805~1847)은 동생에 뒤지지 않는 작곡가로 약 450곡을 남겼는가 하면, 각광받는 피아니스트, 지휘자, 그리고 살롱 경영자였다. 당시 여성들이 자신들만의 역사를 발전시키고 독립된 활동을 위해선 그들만의 공간이 필요했다. 19세기에 음악 분야를 비롯해 사회 여러 분야에서 여성들의 활동이 증가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여성들의 공간’이 확보되었기 때문인데, 살롱은 여성이 만들고 여성이 이끌어나간 대표적인 문화 공간이었다. 아무튼 파니 헨젤은 작곡한 곡을 출판하고 싶어 했지만 아버지와 남동생의 반대로 그 꿈을 실현하는 데에는 9년이 걸렸다. 그녀는 1864년 7월, 멘델스존에게 보내는 편지에 창작의 욕구를 담았다.

‘시작부터 네가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단다. (…) 나는 출판을 시작했어. 내가 출판하는 것으로 인해 네가 불명예를 당하지 않길 바란다. 나는 창작을 위한 자극이 항상 필요해왔어.’

한 가정의 아내이자 어머니로서 여성 음악가는 곡을 쓰기 위한 펜을 들고 오선지와 마주하는 순간, 세상의 차별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인정해야만 했다. 이러한 ‘차별’은 사실상 세상과의 ‘차단’ 그 자체였다. 그래서 음악을 통해 가정과 다른 세계를 ‘만났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녀들은 큰 기쁨을 느꼈다. 파니 헨젤이 1837년,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는 자신의 곡이 알려졌을 때의 기쁨이 담겨 있다.

‘런던에서 나의 소품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그런 기회는 여기서는 전혀 없으니까요. 레베카가 노래 부르지 않게 되면서부터 나의 작품은 전혀 연주될 기회가 없습니다. 결국 나의 작품은 평판이 나쁘지 않음에도 소품을 발표할 기회조차 잃어버리게 된 것이지요.’

뉴욕에 여성 필하모닉 협회를 만들었던 피아니스트 에이미 페이(1844~1928)는 여성이 받는 음악교육에서의 차별은 물론 여성 교사로서 받는 차별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1875년 독일 유학을 통해 명성을 얻었음에도 개인교습밖에 할 수 없었던 그녀의 상황은 당시 여성 음악교사가 겪는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여성 음악교사가 많은 학생들을 얻게 된다면, 그들도 충분히 가르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명백한 어려움이 있다. 여성 교사는 대개 그의 커리어를 작은 마을에서 야심찬 소녀로 시작한다. (···) 그녀의 보수는 매우 적고, 1분기(또는 한 학기)에 10달러 정도가 될 것이다. 내가 처음 레슨을 시작했을 때, 우리는 10달러에 20번의 레슨을 해야 했다. 왜냐하면 한 학기가 20번의 레슨을 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 여성이 도시의 사립 상류 학교에서 좋은 자리를 얻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학생들은 교수를 원하며 더구나 부모들은 그들의 딸이 ‘신사(gentleman)인 교사’로부터 레슨을 받게 될 때 만족감을 더 얻는다. 만약 여성이 학교에서 가르친다면, 대개 보조교사로서 적은 보수를 받을 것이다.’

여성 음악가들은 현실을 돌아보며 삶과 음악의 주체로 자신을 인식하기를 바랐다. 이 기록들은 그러한 과정에서 남은 흔적들이다.

한국음악 뿌리에 담긴 여성 음악가들의 힘

20세기 들어 조선에 서구 음악이 수용되면서 이른바 악단(樂壇)이 형성되었다(악단樂壇은 음악을 연주하는 단체로서의 악단樂團이 아니라, 문단文壇처럼 음악 행위를 일삼는 사람들의 모임과 장場을 뜻한다). 이제 우리의 역사에 담겨 있는 여성 음악가들의 이야기다.

1886년, 지금의 이화여자대학교의 전신인 이화학당이 설립되고 1925년에 이화여자전문학교로 개편되면서 예과 1년 본과 3년의 4년제의 음악과(성악·피아노 전공)가 설치되었다(김자경(소프라노, 전 김자경오페라단 단장)이 음악과 응원단장, 이원숙(정명화·정경화·정명훈 모친)이 가사과 응원단장, 조경희(수필가)가 문과의 응원단장으로 박빙의 승부를 펼친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처럼 이화여자전문학교에 음악과가 정식 설치되면서 이른바 양악이라는 불리는 서구음악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이후 졸업생들이 배출되고 사회로 나갔지만, 악단(樂壇)의 주류는 남성 음악가들이었다.

그런데 1930년대 기록을 보면 ‘여류악단(女流樂壇)’이라는 말이 눈에 들어온다. 앞서 살펴본 19세기 유럽의 살롱과 같이 조선의 음악계에 ‘여성들만을 위한 장(場)’을 만들어 여성 음악가들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이끌어나갔던 것이다. 당시 피아니스트이자 이화여전 교수였던 김영의(1908~1986)는 1933년 ‘신가정’지에 ‘여류악단의 1년’이라는 글을 기고한다. 김원복·김은자·조은경·채선엽·박경희의 활발한 활동을 소개하며, ‘이 방면으로 진출하는 여성이 있어서 우리 새로운 음악사의 순란한 페이지를 지어나감에 큰 공헌을 주는 이가 있기를 바라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ZYX’이라는 필명으로 1934년 ‘신가정’지에 게재된 ‘여류악단총평’은 좀 더 과감하다. 김원복·정훈모·김영의·조은경·채선엽의 부지런한 활동을 소개하고, 이화여자전문학교의 존재를 중요하게 거론하며 여성음악가가 많이 배출되어야 하지만, 그들이 음악을 일시적 취미나 호기심으로 시작하여 실패한 경우와 좋은 지도자를 만나지 못한 것, 그리고 ‘조선의 가정이 여자들의 천재(天才)를 발휘시킬 만큼 그 기회를 주지 않는 관계’를 과감히 비판했다. 사실 서구의 음악이 이 땅에 자리 잡던 일제강점기와 그 이후에 이화여자전문학교의 파워는 대단했다. 그래서 한국 근대음악사를 살펴볼 때, 2003년에 이화여자대학교 음악연구소가 편저한 ‘이화여자대학교 음악대학의 역사(1886~2002)’는 한국음악사를 이끈 여성 파워와 그 뿌리를 보여주는 중요한 서적으로 손꼽힌다. 평론가 박용구(1914~) 선생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음악가를 꼽아달라고 했을 때에도 선생은 100년의 기억을 더듬어 소프라노 오경심을 꼽았다.

“목소리가 참 드라마틱했어요. 내가 다닌 일본고등음악학교 1년 후배였어. 이화여전을 졸업하고 결혼한 몸으로 입학했는데, 시험 칠 때 한복을 입고 왔더라고. 미인은 아니었는데 아주 당돌하게 생겼지. 목소리는 꼭 새소리 같았어. 여수·순천 사건(1948) 때, 순천여고 선생으로 있었는데 학생들을 이끌고 시위에 참가했다가 잡힌 거야. 사령관이 ‘네가 진짜 소프라노냐. 그럼 노래해봐라’ 하니깐 앞에서 오페라 ‘토스카’의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를 당돌하게 불렀다고 해요. 그걸 계기로 사형을 종신형으로 낮췄는데, 결국에는 사형당했지.”(‘객석’ 2015년 3월호)

한국에서 오늘날 연주되는 곡의 작곡가는 대부분 남성이다. 그런데 연주자 중 절반 이상은 여성인 경우가 많다. 작곡(가) 중심에서 연주(가) 중심으로 음악 문화가 이동하는 동안 음악사는 점점 ‘여자의 얼굴’을 갖추는 셈이다. 역사에 대한 기록이 ‘무엇을 기록했는가’보다는 이 기록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물음과 ‘기록 밖의 기록’을 찾아가는 그 길목에 여성음악가들의 삶과 역사가 있다.

홍인경의 ‘음악사 다시 생각하기: 19세기 여성음악가들의 글을 중심으로’, 민은기의 ‘음악과 페미니즘’, 이화여자대학교 음악연구소 편저 ‘이화여자대학교 음악대학의 역사(1886~2002)’, 김수현·이수정의 ‘한국근대음악기사자료집’(1~4권)을 참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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