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조성진, 쇼팽 콩쿠르 한국인 최초 우승

21세기 피아니스트의 초상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5년 12월 1일 12:00 오전

우리나라에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여든여덟 건반 이야기에 귀 기울인 적이 또 있을까. 어느 음악가의 말처럼 ‘손끝발끝’만으로 청중과 무언의 대화를 나누는 이 피아니스트가 우리에게 들려준 언어는 이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각인될 것이다. 무엇보다 편견 없이 주어진 상황을 차분하게 지켜보고 그렇게 정한 선택과 결과의 신선함. 이제 우리는 이것을 ‘조성진다움’이라 부르려 한다

since 2008, 조성진 관찰기

지난 11월 13일 영국 시간으로 금요일 밤 11시. 나는 이른 잠에 들었다가, 일어나보라는 아내 말에 텔레비전을 틀었다. BBC는 파리 11구 바타클랑 극장 주변을 비췄고 괴한들이 관객들을 살해한다는 리포트가 이어졌다. 마치 9.11 같았다. 현지 시간 자정이지만 파리에 사는 조성진에게 문자를 넣었다.

“무사하죠?”

“네, 집에 있습니다. 무섭네요.”

조성진은 침착했다. 문자로나 만나서나 늘 내가 말을 많이 하고, 조성진은 주로 듣는다. 그 다음 주 일본 공연인데 진도 7의 지진이 규슈 앞바다에 일어났다. 파리는 테러, 일본은 지진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조성진과의 문자 대화.

“또 지진이네. 그래도 쓰나미 경보는 해제래요.”

“참, 나! ㅋㅋㅋ”

진중함 속에 언뜻 비치는 유머. 올해 7년째 다양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조성진을 보아왔다. 2015년 쇼팽 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승을 하든 말든, 난 조성진이 그대로여서 좋다. 변한 건 조성진을 지켜보는 주변이다.

조성진을 처음 본 건 2008년 10월 29일 서초동 모차르트홀에서였다. 한 일간지 음악 기자가 “신수정 선생 제자 중에 깜짝 놀랄 인재가 있다”고 귀띔해서 같이 공연장을 찾았다. 스카를라티를 시작으로 베토벤, 드뷔시, 쇼팽이 이어졌고 누구의 인상도 아닌, 아주 독자적인 해석이 마음에 들었다.

이듬해인 2009년 하마마쓰 콩쿠르 과정을 인터넷 중계로 봤다. 시상식에서 입상자들은 역순으로 불렸고 1위 호명을 앞두고 조성진만 남았다. 당연히 우승이 그인지라 옆에 앉은 참가자들이 인사를 건네도 조성진은 자신이 우승자인 줄 확신하지 않았다. 당시 내가 주목한 건 그 신중함이었다. 피아노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라면 자극받을 법한 해석이 이때를 계기로 공공연히 알려지기 시작했고, 그해 겨울 정명훈/서울시향 라벨 협주곡 협연부터 조금씩 조성진의 이름이 언론에 올랐다.

2010년 서울예고에 들어간 조성진을 내가 몸담은 기획사 공연에 초대했고, 그는 꼬박꼬박 예술의전당에 왔다. 그해 10월, 조성진은 루체른 페스티벌 스트링스와 리스트의 피아노와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저주’로 국내에서 처음 해외 단체와 공연했는데, 지휘자가 메일 주소를 달라고 했다며 웃는 얼굴에 소년의 티가 역력했다. 나는 그가 이듬해 열릴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어떤 성과를 낼지 궁금했다.

2012년, 조성진이 ‘유학을 간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나가는 게 아니냐’는 소문이 음악계에 돌았다. 유학지는 독일이나 러시아 아니겠냐며 그럴싸한 이유를 대는 음악인도 있었다. 그런데 그가 택한 곳은 프랑스 파리였다. 조성진은 인터뷰에서 ‘조성진다움’이 뭔지 모르겠다고 했는데 나는 이걸 ‘조성진다움’으로 본다. 편견 없이 주어진 상황을 차분하게 지켜보고 그렇게 정한 선택의 결과가 신선하다. 음악도 그렇다. 조성진이 즐기는 과거 연주나 유파, 스승들과 비교해 유사함을 찾는 노력은 별 효용이 없다.

2013년 로린 마젤/뮌헨 필과의 협연을 앞두고, 2011년 마레크 야노프스키/베를린 방송교향악단과 함께한 공연에 이어 다시 베토벤 협주곡 5번 ‘황제’를 칠 수 있겠냐고 물었을 땐, “자신 있는 건 러시아 작품인데…”라고 말을 흐리던 걸 기억한다. 그러고는 그동안 파리에서 지낸 시간이 어땠을지 궁금하게 만드는, 숙련된 베토벤 협주곡 4번이 그에게서 나왔다. “자신 있다”는 레퍼토리에 ‘쇼팽’을 이야기하지 않은 건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겸손이 아니라 진심으로 보였다.

2014년, 루빈스타인 콩쿠르에 출전한 조성진을 인터넷 중계로 봤다. 결과는 3위였다. 2011년 11월, IBK챔버홀을 들썩이게 한 리스트 소나타와는 또 다른, 압도하는 리스트가 나왔지만 경연 순위는 그랬다. 뭐라 할 말이 없었지만, 메신저로 “기가 막힌다”는 말을 위로라고 해봤다. 답장은 없었다. 그해 12월 파리에서 김선욱의 샬 플레엘 독주회를 조성진과 함께 봤을 때, “그때 메시지 감사하게 받았다”고 이야기해줘 고마웠다. 얼마 후 메신저에서 사라진 그를 보고 “조성진이 쇼팽 콩쿠르를 위해 칼을 가나 보다” 했는데, 실은 누군가 스마트폰을 훔쳐가서 “2015년엔 누구도 훔치지 않을 만한 2G폰으로 버텼다”고 했다. 도난당한 스마트폰에서 알제리로 발신된 전화료는 300유로(한화 약 37만원)가 넘었다.

쇼팽 콩쿠르 이전, 조성진이 맞은 한 차례 커리어 상의 고비를 나는 2013년으로 본다. 2011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3위를 거둔 후광은, 이듬해 발레리 게르기예프/마린스키 오케스트라 내한 공연으로 그칠 것만 같았다. 때문에 2013년 로린 마젤/뮌헨 필 내한 공연을 한 달 여 앞두고 나는 조성진의 인터뷰 스케줄을 무리하게 잡았고 한 매체와 1시간씩, 나흘에 걸쳐 17곳의 기자를 만났다. 했던 이야기를 반복하는 동안, 조성진은 지쳤고 나는 미안했다. 마지막 인터뷰는 ‘객석’이었다. 인터뷰를 맡은 편집장은 “스케줄이 말이 되냐”고 했는데, 나는 조성진이 혹여 잊혀 질까 싶어 그렇게 했다. 조성진은 “앞으로 엄청 귀한 연주를 하고 싶다”면서 홍보를 마쳤다. 모든 일정이 끝나고 조성진이 물었다.

“인터뷰를 하면 표는 좀 팔리나요?”

표는 잘 움직이지 않았다. 사실대로 이야기할 순 없었지만, 조성진은 내 답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금전 이외의 소득이 무한했다. 로린 마젤은 결국 마지막 내한 공연이 된 4월 22일 뮌헨 필 공연이 끝난 뒤 조성진을 대기실로 불렀다. 5분간 독대하면서 “베토벤 협주곡 4번 도입이 좀 더 경쾌했으면 좋겠다”고 충고했다. 자신의 블로그에는 “조성진과 내 나이 차이가 65년이다. 내 생애 지금 시점에, 내가 배운 걸 젊은이에게 전수하는 게 내 의무”라고 적었다.

마젤뿐 아니었다. 마레크 야코프스키는 조성진과 베토벤 협주곡 5번 ‘황제’를 함께한 2011년 베를린 방송교향악단 공연이 끝나고 “조성진을 알게 해줘 고맙다”고 공항에서 인사했다. 2012년 성남아트센터에서 프랑크푸르트 방송교향악단 공연을 준비하던 파보 예르비는 조성진을 오디션하고 “나중에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 했다. 현 한겨레 객원기자 김소민은 2012년 러시아 내셔널 오케스트라(RNO) 내한에서 플레트뇨프가 협연을 마친 조성진에게 엄지를 드는 장면을 스테이지 출입문 사이로 목격했다.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인 플레트뇨프는 조성진에게 “피아노는 쉬운 것”이라며 격려했다. 2011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조성진을 처음 본 게르기예프는 올해 10월 런던의 한 초등학교 음악 행사에 나가 “요즘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한 조성진을 아느냐”며, “내가 위원장으로 있는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도 상을 탄 아티스트”라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내 나이 때 많이 얻어야 나중에 버릴 것이 생긴다”

조성진이 ‘콘서트 피아니스트’로 생활을 잇기 위해 ‘리사이틀’만 할 순 없다. 동시대 지휘자와 동반 성장하는 것이 역대 성공한 쇼팽 콩쿠르 우승자들의 활동 궤적이다. 음악성을 갉아먹지 않는 선에서 언어와 사교도 조성진이 음악 경력을 관리할 때 유용한 도구가 될 것이다.

현재 상당수 애호가들이 궁금해하는 것은 조성진이 앞으로 어느 레이블, 매니지먼트와 계약하느냐다. 쇼팽 우승자에게 도이치 그라모폰(DG)의 관심은 당연한 것이고 조성진도 거부감이 없다. 향후 레퍼토리 결정의 자율성에 관한 밀고 당기기가 예상되고, 2010년대 들어 DG와 계약한 잉골프 분더(2010 쇼팽 콩쿠르 공동 2위), 다닐 트리프노프(2011 차이콥스키 콩쿠르 1위)의 디스코그라피는 참고가 될 것이다.

쇼팽 콩쿠르가 남긴 큰 열매는 매니지먼트 계약이 될 것이다. 피아니스트는 매니지먼트를 잘 둔 덕에 그동안 일면식이 없던 일류 지휘자, 오케스트라와 더 쉽게 만나게 된다. 더구나 조성진은 평소 파리에 거주하기 때문에, 현지 오케스트라 공연이 끝날 즈음 매니저들이 무대 뒤로 와서 지휘자나 악단 대표와의 저녁 미팅에 초대하기 용이하다.

조성진은 쇼팽 콩쿠르 기간 동안 심사평을 듣고 싶었음에도 만나지 못한 아르헤리치를 최근 파리 필하모니 무대 뒤에서 만났다. 해리슨패럿의 대표 재스퍼 패럿도 11월 5일 필하모니아 런던 공연 때 담당 아티스트인 아시케나지를 케어하다가 조성진과 조우했다.

조성진의 달라진 위상을 체감할 부분은 오케스트라의 해외 투어가 될 것이다. 과거 국내에서의 해외 악단 협연은 국내 프로모터가 요청하고 악단이 컨펌하는 순서였는데, 내년 말 바르샤바 필의 미국 투어를 주관하는 매니지먼트 CAMI가 통보한 협연자가 조성진이다.

2015년 10월 29일, 내년 2월 열리는 쇼팽 콩쿠르 갈라 한국 공연은 예매 개시 50분 만에 2,500여 석이 매진됐다고 국내 언론이 일제히 보도했다. 조성진을 보고 싶고 알고 싶어 하는 욕구는 음반으로 이어져 쇼팽 콩쿠르 실황 앨범의 초도 물량 5만 장도 금세 동이 났다. 그런 상전벽해를 멀리서 지켜보는 조성진을 만나러 지난 11월 2일 버밍엄으로 향했다.

이튿날 아시케나지/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버밍엄 공연을 위해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조성진에게 차량 제공이나 직원 환영 같은 특별대우는 없었다. 대형 매니지먼트에 소속된 중견들도 영국에선 숙박·교통비가 개런티에 모두 포함되어, 지인 집에 머물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호텔로 가는 도중, 여행 가방을 끌고 버밍엄 심포니홀 앞을 지나가던 조성진은 “사이먼 래틀이 여기를 지은 거죠?”라고 물었다. 대회 이후 첫 나들이는 영국에서 가장 어쿠스틱이 좋은 곳에서 이뤄졌다. 앞으로 수많은 공연장에서 어쿠스틱과 피아노는 조성진이 가장 중요하게 신경 쓸 요소가 될 것이다.

음악평론가 최유준의 지적처럼 조성진은 2011 차이콥스키 콩쿠르 3위로 연주력을 인정받았지만, 일류 연주자들 사이의 경쟁에서 무대에 설 기회를 확보하기 위해 지명도가 더 높은 대회에 매진했다. 11월 3일과 5일, 필하모니아는 시즌 전부터 2015 쇼팽 콩쿠르 우승자로 협연 자리를 비워놨고, 4일에는 2010년 쇼팽 콩쿠르 준우승자 잉골프 분더가 협연했다. 만약 조성진이 이번에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하지 않았다면, 차이콥스키 콩쿠르 3위 경력으로 분더 대신 4일 공연을 차지하기는 어려웠으리라. 차이콥스키 콩쿠르 3위 이후, 한국 음악계는 조성진 육성에 어떤 투자를 기울였는가.

영재 시기를 벗어난 조성진에게 정기적인 공연을 제공한 곳은 일본의 매니지먼트 겸 프레젠터인 재팬아츠였다. 재팬아츠는 하마마쓰 콩쿠르 우승자라면 다음 대회까지 국적에 상관없이 일본 내 프로모션을 책임진다. 알렉산더 가브릴류크(2000), 라파우 블레하츠(2003)처럼 조성진(2009)도 그렇게 일본에서 터를 닦았다. 조성진은 어릴 때부터 연륜 있는 매니저들이 무엇을 중시하는지, 분쟁 없는 일처리가 무엇인지 클래식 비즈니스의 정석을 일본에서 봤다.

주니어 시절부터 조성진의 활약을 가장 꾸준하게 따라다닌 언론도 일본의 피아노 매거진 ‘쇼팽’이다. 한국계 기자가 오래전부터 조성진의 일본 공연이 열리면 도쿄와 지방을 마다하지 않고 따라다녔다. 심지어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지진이 일어난 그날, 후쿠오카에서 열린 정명훈/체코 필 협연에도 조성진을 찾은 유일한 미디어가 ‘쇼팽’이었다. 당연히 한국인 우승자가 탄생한 2015 쇼팽 콩쿠르의 현지발 기사를 풍성하게 내놓는 곳도 ‘쇼팽’이다.

저녁 안개가 짙게 내려앉은 버밍엄의 레스토랑에서 조성진과 마주했다. 그는 인터뷰보다는 콩쿠르가 끝난 후 누군가에게 처음 사는 저녁이니 밥 먹으면서 이야기나 같이 하자고 했다.

“인터뷰를 되게 싫어한다.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하나는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 나의 의견이나 속마음을 보는 것이 불편했다. 나는 무척 친한 사람들하고만 내 의견을 공유하는데, 인터뷰는 그러기엔 뭔가 찜찜했다. 물론 요청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 답변하지만 속마음은 그랬다. 다른 하나는, 어떻게 하다 보니 어릴 때부터 언론 인터뷰를 하게 됐다. 그런데 내가 말한 대로 기자 분들이 안 써주셨다. 중 3 때부터 그랬다. 배신감을 많이 느꼈다. 사례는 너무 많아서 기억도 다 안 난다. 최근 어느 일간지와 인터뷰 때 아버지가 부모 이야기는 뺐으면 좋겠다고 부탁했는데, 그 부탁 내용까지 그대로 기사에 나오는 걸 보고 무척 상처받았다. 진심으로 유감이었다. 그래 서 보통 인터뷰에선 의견보다 팩트만 말하려고 했던 것 같다. 내 감정이 어떤지 밝히는 걸 별로 안 좋아한다. 친한 사람이면 모르겠지만, 인터뷰를 누가 읽는 줄도 모르고.”

버밍엄 심포니홀에 들어가니 분위기가 어땠나?

피아노가 좀 낡았는데 어쿠스틱이 정말 좋았다.

쇼팽 콩쿠르 후 폴란드 투어를 했는데 컨디션이 좋아 보인다.

컨디션에 그렇게 좌우되지 않는다. 아플 때도 연주를 많이 해봤는데 오히려 아프면 긴장이 안 된다. 그냥 음악에만 신경 쓰니까. 예를 들어 화가 나면, 화가 난 상태로 연주한다. 컨디션, 기분에 따라 연주가 바뀔 수 있지만 그렇게 내 연주가 바뀌는 걸 흥미롭게 본다.

여긴 따로 챙겨주는 스태프들이 없는데, 불편한 건 없었는지.

그런 건 없었다. 아직도 매니지먼트가 정확하게 무슨 일을 하는지 잘 모르는데 워낙 어릴 때부터 재팬아츠랑 일해서 그곳에서 내 일을 챙겨온 세 명의 매니저가 얼마나 일을 잘했는가 알게 됐다. 운 좋게도 나랑 잘 맞는 사람들이 걸린 거다. 제네럴 매니지먼트를 고를 때도 회사는 둘째 치고 나랑 잘 맞는 사람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선 ‘조성진 열풍’이다.

한국에 보도된 기사를 보면서 이 기회에 해명해야 할 것들이 있다. 우선, 아이돌이라 부르는 게 싫다. 클래식 음악가로 남고 싶지, 그렇게 비치는 데 대해 부정적이다. ‘쇼팽 스페셜리스트’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쇼팽은 가장 자신 없는 작곡가 중 한 명이다.

쇼팽은 어릴 때부터 가장 많이 연주한 작곡가인데.

쇼팽이 어려우니 그렇다. 사실 예전에 비해 많이 는 것 같다. 하마마쓰 콩쿠르 때 친 것을 봐도 그렇고 5년 전쯤 친 것과 비교해도 그렇다. 예전에 쇼팽 발라드 전곡 친 걸 보면, 그동안 많이 쳤다기보다는 하도 오랫동안 치다 보니 자연스레 바뀐 것 같다. 물론 베토벤도 그렇지만 쇼팽은 시간이 많이 필요한 작곡가다.

2009년 정명훈/서울시향의 라벨 협주곡 같은 경우, 만 15세 시절 연주였는데 각광받았다. 상대적으로 연구할 시간이 적었을 텐데.

사실 라벨은 초반에는 어려운데 한 번 되면 술술 된다. 늘었다고 표현할 수도 있고, 변했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어떻게 변하는 게 이상적인가?

사람들은 흔히 나이가 들면 깊어진다고 말한다. 그런데 깊어지는 게 과연 좋은 건가 생각해본다. 쇼팽뿐 아니라 음악 전반적으로 그렇다. 브람스의 경우, 1893년작 피아노를 위한 4개의 소품 Op.119를 보면 그보다 40년 전인 1853년 작곡된 피아노 소나타 3곡이 내 생각엔 더 깊은 곡이다. 시간이 들면 들수록 더 가벼워진다고 생각한다. 작곡가들이 인생 말년에는 음악 자체를 더 놓지 않았나 싶다.

베토벤은 피아노 소나타 32번에서 가장 가벼워진 건가?

베토벤은 32번에서 그동안 많이 가졌던 것을 하나하나씩 버렸다고 생각한다. 인생이 그런 것 같다. 그러니까 내 나이 때는 많이 얻어내야 한다. 그래야 나중에 버릴 것도 생기니까.

대회 중에 가장 힘들 때는 언제였나?

대회를 앞두고 아랫니의 치아 교정을 하는 보철물이 양치질 중에 삐져 나와 입속을 여러 군데 긁었다. 피가 계속 흘러서 이 철을 어떻게든 처리해야 했다. 사무국에 가서 철 끊는 공구 없냐고 물었더니 정원에서 쓰는 대가위를 가져왔다. 무턱대고 시내로 나갔더니 ‘뺀찌’ 파는 곳이 있어서 어머니가 일일이 돌려서 마무리했다. 그때가 정말 힘들었다. 대회 때 영상을 보면 감기가 들어 콧물을 닦는 모습도 있다.

어느 라운드에선가 갑자기 피아노를 바꾸는 참가자들도 있었다.

3차가 되어서야 비로소 대회에 누가 나왔는지 감이 올 정도로 내 것에만 집중했다. 피아노 선택은 신중한 문제이긴 한데 다른 사람이 왜 바꾸었는가는 나에겐 별로 중요하진 않다. 다만 심사위원들이 어느 정도 피아노 소리에 대한 선호를 갖고 있지 않을까 싶긴 하다.

“나는 쇼팽 스페셜리스트가 아니다”

쇼팽 콩쿠르 우승자가 쇼팽에서 잘 빠져 나와야 한다는 강박은 없나?

내가 ‘쇼팽 스페셜리스트’가 아닌 건 확실하다. 그래서 걱정 없다.

다음 대회에 나가기 전까지, 질리도록 쇼팽 피아노 협주곡을 쳐야 할지도 모른다. ‘탈 쇼팽’을 위해 준비할 곡들이 필요하지 않을까?

다행인 게 어려서부터 꽤 많은 협주곡을 만들어놨다. 베토벤·모차르트를 시작으로 그리그와 러시아 작곡가들… 기본적으로 공부할 곡이 더 있겠지만, 연주 요청이 들어왔을 때 백지 상태로 준비하지 않아도 되는 정도다. 실내악에도 점차 폭을 넓혀야겠지만 당장은 아니다. 앞으로 ‘쇼팽 스페셜리스트’들처럼 쇼팽을 치고 싶다.

좋아하는 쇼팽 스페셜리스트들은 누구인가?

옛날 사람들이다. 알프레드 코르토·이그나츠 프리드먼을 좋아한다. 지금은 그렇게 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샹송 프랑수아도 몇 작품은 좋은데 코르토가 더 맘에 든다. 디누 리파티도 선호하는 연주자다.

크리스티안 지메르만·그래고리 소콜로프 같은 생존 연주가들에게선 비슷한 영감을 받지 않는가?

만약 내 지금 연주를 2060년에 사는 후세가 듣는다면, 우리가 지금 코르토를 듣는 느낌이 아닐 수 있을 것이다. 트렌드는 늘 바뀌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항상 옛것을 그리워한다. 코르토 연주는 뭔가 특별한 게 있다. 그렇다고 지향하는 연주가 코르토 스타일은 아니다. 나는 내 시대에 맞는 연주를 하고 싶다. 코르토는 그저 들으면서 즐길 뿐이다.

러시아 지휘자, 연주자들과 자주 연결되고 교류하는데 어떤 이유인지.

플레트뇨프·게르기예프·테미르카노프와 함께해봤는데, 나도 특별한 이유는 잘 모르겠다.

현대음악으로 관심을 확장할 생각이 있나?

베르크·리게티에는 관심이 있다. 학교에서 하라는 걸 하긴 했는데 메시앙도 그렇게 매력적이진 않았다.

현대음악을 하다 보면 고전 작품의 터치에 문제가 생기진 않을까?

그 의견도 일리가 있다.


▲ ©Wojciech Grz dzi ski/Fryderyk Chopin Institute

조성진의 결과를 한국 피아노 교육이 이룬 성과로 분석하는 시각도 있다.

여러 글과 기사를 읽었는데 지면에서 보는 ‘한국 피아노 교육’ ‘한국 피아니즘’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팩트를 이야기하자면, 신수정 선생님의 도움을 많이 받은 건 사실이다. 중학생 때부터 선생님께 배웠는데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완과 바른 자세를 배웠다. 모든 스포츠도 자세가 중요하다. 수영·골프·야구 모두 그렇다. 좋은 이완 자세가 중요한데 그걸 선생님께 배웠다. 하루 아침에 이완이 되는 게 아니다. 남들보다 조금 더 이완됐을 수는 있는데 지금도 100퍼센트는 아니다. 핵심적인 기본기를 배웠다. 음악 외적인 것도 경험하게 해주시고 좋은 분들 만나게 해주셔서 신 선생님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스승 중 한 분이다. 그런데 지금의 성과와 ‘한국의 피아노 교육’이나 ‘한국 피아니즘’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건 나로선 어렵다. 러시아의 피아니즘은 알 것 같다. 하지만 앞의 개념은 솔직하게 뭔지 모르겠다. 옛 소련 시절에는 외부 세계와 단절됐으니 고유한 기술을 그들끼리 전수하는 방법과 체계가 있었다. 개방이 안 됐으니 러시안 피아니즘의 위력을 지속할 수 있었다. 지금은 그런 게 없어졌다. 개방됐고 글로벌한 시대이고 한국에서 후진을 키우시는 선생님들도 대부분 외국에서 배웠는데 ‘한국의 피아니즘’ ‘일본식 교육’ 이런 구분이 유효할지 모르겠다.

유소년 시절, 음악 재단에서 제공받은 연주 기회의 효용은 어떤가?

2004년 유명 재단에서 공모하는 영재 공연에 접수했다. 오디션을 보고 통과하면 공연을 시켜주는 체계였다. 어린이들에게 무대 기회를 제공하는 건 중요한 일이고 후원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테스트는 또 다른 음악재단과 공연장 아카데미 오디션에서도 경험할 수 있는 것이었다. 물론 초등학생이 독주회를 하고 실내악도 경험한 건 어린 시절의 좋은 기억이다.

2011년 차이콥스키 콩쿠르 직후 국내의 관심이 미진하다고 느꼈나?

당시에는 국내 반응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없었고 잘 몰랐는데, 이번에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하고 반응을 보니, 내가 열일곱 살에 차이콥스키에서 3등을 한 사실을 잘 모르는 분이 많은 것 같다. 차이콥스키 콩쿠르 끝나고 조용히 있을 때, 뒤에서 드러내지 않고 격려해주시고 응원해주시는 분들이 계셨다. 금전적인 지원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분들은 내가 쇼팽에서 설사 우승을 하지 않았어도 나에게 계속 관심 가져주시고 응원해주셨을 것이다. 그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쇼팽 콩쿠르 실황 앨범이 5만 장 발매됐는데, 수입은 어떻게 되나?

상위 라운드에 올라가면 쇼팽 협회에 제출하는 각서에 향후 발매될 음원에 참가자 수익은 없다는 각서를 낸다. 온라인 음원은 체크해보고 싶다. 홀이 너무 울려서 음질이 어떨지 모르겠다.

그동안 지켜본 오케스트라와 지휘자 중 마음에 드는 악단과 인물은?

파리 오케스트라는 베토벤도 스타일리시했다. 프랑스 축구를 ‘아트 사커’라고 하듯이 오케스트라도 독특했는데, 헤르베르트 블롬슈테트와 했던 브루크너 교향곡 8번을 보면 그때는 또 독일 악단 같았다. 젊은 지휘자들 중에선 리오넬 브랑기에가 좋았고, 안드리스 넬손스의 말러도 아주 좋았다. 베를린 필의 새 수석 지휘자 키릴 페트렌코도 좋다.

요즘도 파리에 있을 때 공연 보러 자주 가나?

오케스트라, 독주회 가리지 않고 많이 갔는데 이상하게 새로 개관한 필하모니엔 별로 못 가봤다.

파리음악원 과정이 모두 끝나도 파리에서 계속 살 생각인가?

이제부터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아직 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 콩쿠르 우승 후, 유럽과 일본 투어를 떠나는 조성진. 그의 앞길에 축복을!

앞으로 공연 계획은?

연말까지 중국 상하이·베이징·충칭에서 공연을 갖고 폴란드와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체임버홀에서 리사이틀이 있다. 2016년 1월 16일 프라하 심포니와 차이콥스키 협주곡 1번을 갑자기 일본에서 연주하게 됐고, 사이타마를 비롯해 일본에서만 열 번 정도 공연이 있다. 2~3월에 폴란드에서 공연이 있고 3월 런던 사우스뱅크센터에서 인터내셔널 피아노 시리즈를 한다. 독일에선 루르·하노버·슈투트가르트 공연이 잡혔고 프랑스에선 앙시를 포함해 세네 곳이 잡혔는데, 2016년 여름 페스티벌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고 일부 단체와 접촉 중이다. 시즌이 바뀌면 10월 중순부터 바르샤바 필과 미국 투어가 있고 플레트뇨프와 러시아 내셔널 오케스트라(RNO) 유럽 투어도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

내년 3월 런던 공연에선 공교롭게 발라드·소나타·스케르초 모두 2번을 연주한다.

공연장에서 ‘올 쇼팽’을 원해 마주르카·폴로네이즈 같은 소품들을 함께 넣다 보니 그렇게 됐다. 소나타 2번, 스케르초 2번은 작품번호 순서도 비슷하고 거의 같은 시기에 쓰여서 같이 묶으면 좋다. 조성을 보고 순서를 정하는데, 보통은 단조로 시작해 장조로 끝나는 스케르초가 공연을 마무리하기에 좋다.

사진 박진호(studio Bo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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