첼리스트 문태국

젊은 연주자의 초상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6년 3월 1일 12:00 오전

2004년 파블로 카살스 첼로 콩쿠르 우승 이후 빠른 속도로 무르익고 있는 22세 청춘을 엿보다

“기억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항상 첼로가 있었다. 산다는 건 첼로를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문태국은 모자를 고쳐 쓰며 말했다. 올해 1월, 4주 기초군사훈련을 받기 위해 잠시 한국에 온 문태국을 만났다. 짧아진 머리카락이 잘 어울렸다. 소년티를 벗은 청년의 모습이었다. 악기도 안 가지고 한국에 왔다며, 이렇게 오랜 기간 연습하지 않은 적은 처음이라고 멋쩍어 했다.

문태국을 처음 만난 건 일 년 전, ‘객석’ 창간 기념식에서다. 한국인 최초로 파블로 카살스 첼로 콩쿠르 우승을 거둔 직후였다. 그는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1번과 가스파르 카사도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연주했다. 그곳은 레스토랑이었고, 음향이 퍼질 수 없도록 설계된 공간이었다. 작은 공간에 가득 찬 카사도의 울림. 우러나오는 첼로 소리와 간간이 내쉬는 문태국의 숨소리만 존재하던 그날의 연주를 잊지 못하고 있다.

현재 문태국은 보스턴 뉴잉글랜드 음악원에서 로렌스 레서(Laurence Lesser) 문하에 있다. 22세 첼리스트 문태국은 졸업을 앞둔 시점이라 미래에 대한 고민이 많아 보였다. 어린 시절, 항상 옆에 있던 첼로가 이제는 직업이 됐으니 책임의 무게가 더해진다고 했다. 그는 음악을 전공한 부모님 밑에서 자연스럽게 첼로를 시작했다. 첼로가 싫어진 순간은 없었지만, 만약 첼로가 싫어졌더라도 자신을 믿어준 후원자들에게 보답하기 위해 계속 첼로를 했을 것이라고 말하는 선한 사람. 문태국의 청춘은 빠른 속도로 무르익고 있었다.

올해 1월, 4주 기초군사훈련을 받았다고 들었다. 일 년 전에 봤을 때보다 어른스러워진 느낌이다.
어릴 적 군인도 장래 희망 중 하나였다. 첼리스트, 축구 선수, 군인, 개그맨 등 외향적인 성격이라 꿈이 많았다.

한 달 정도 연습을 못했을 텐데, 이렇게 오랫동안 연습을 하지 않은 적이 있었나?
없다. 미국에서 악기도 안 가지고 왔다. 어색하다.

2014년 9월, 파블로 카살스 첼로 콩쿠르 우승 이후 일 년이 넘는 기간이 흘렀다.
콩쿠르 직후에는 정신이 없었다. 공부에 다시 전념하는 쪽으로 중심을 뒀다. 점차적으로 연주가 많아졌고, 4학년이라 졸업을 앞두고 있어 미래에 대한 생각이 많아진다.

추가된 커리어가 있다면 무엇인가?
크레디아와 계약했고, 악기 후원이 들어왔다. 주변의 기대감이 커진 느낌이다. 로렌스 레서 선생님이 콩쿠르가 끝났다고 다시 일상생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더 열심히 ‘자기 PR’을 해야 한다고 하셨다.

피아노를 전공한 어머니와 클라리넷을 전공한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연습하다가 음악적으로 고민되는 부분은 부모님과 함께 공유하는 편인가?
요즘은 거의 안 한다. 초등학생 때까지는 어머니와 함께 연습했다. 어머니가 방향을 잘 잡아주셔서 다른 길로 빠지지 않고 기초를 탄탄하게 잡을 수 있었다.

어릴 적에는 대개 음악 해석에 있어 본인의 것보다는 선생님의 해석, 혹은 음반을 통해 습득한 해석을 표현한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것을 벗어나 본인의 느낌과 언어를 넣으려고 하지 않나. 그 시기가 언제였는지 궁금하다.
고등학생 때 즈음, 단순히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을 이해하고 싶다는 진지한 생각이 들었다. 그 전에는 주변에서 하라는 대로 했다. ‘음악에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고 항상 선생님에게 혼났다. ‘첼로를 잘하는 것’과 ‘음악을 잘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 후 작곡자의 의도나 나만의 이야기를 음악에 담아내려고 한다.

어린 시절을 회고해보면, ‘일반적인 어린이 문태국’은 어떤 아이였나?
시끄럽고, 정신없고, 친구들과 노는 것을 좋아했다. 초등학생 때는 전교회장을 할 만큼 활동적이었다. 노는 것이 학교에서만 가능해 더 그랬던 것 같다. 집에 오면 연습하느라 밖에 나갈 수 없었다. 주말에는 친구들하고 놀이터에서 다섯 시간씩 놀아도 지치지 않았다. 지금도 똑같다. 놀라고 하면 끝없이 놀 수 있지만 자제하는 중이다. 이제는 첼로를 연주하는 것이 내가 좋아서 선택한 직업이 됐다. 더 집중해야 한다.

‘지금의 문태국’이 되기까지, 인생에 획을 그은 사건이 있다면?
초등학교 6학년 때, 제15회 성정전국음악콩쿠르에서 최연소 대상을 받았다. 2006년 8월에 성정콩쿠르 입상을 하고, 2007년 5월에 줄리아드 예비학교 원서를 냈으니 짧은 기간 동안 유학과 이민이라는 큰 결정을 내린 것이다. 부모님의 과감한 선택이었다. 당시 방향을 잘 잡아준 부모님께 감사드린다. 그때 만약 주저했다면 지금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성정콩쿠르가 전환점이었고, 그 이후 모든 일은 순차적으로 진행됐다.

성정전국음악콩쿠르에서 대상을 받으며, 성정문화재단에서 꾸준히 지원받았다. 그 후 여러 번의 콩쿠르를 거쳐, 2014년 파블로 카살스 첼로 콩쿠르 우승하며 이목이 집중됐다. 다양한 콩쿠르에 도전하며 느낀 장점과 단점에 대해 말해줄 수 있는가?
콩쿠르를 통해 우승이라는 결과가 나오면 좋고, 우승을 못하더라도 준비하는 과정과 무대 경험은 정말 소중하다. 열심히 한 만큼 성장한다고 생각한다.

차분하고 유연한 행보

스스로 무대 체질이라고 생각하나?
주변에서 무대 체질이라고는 하더라. 어릴 적부터 오랫동안 연주하려면 담력을 키워야 한다고 부모님께서 많은 훈련을 시키셨다. 공원에 있는 나무 밑에서 연습하기도 했고, 동네 대학교 강당에서 사람들을 모아 연주한 적도 있다. 이 모든 것을 영상 촬영해 모니터링했다. 그러면서 청중에 대한 두려움이 자연스럽게 없어지고 무대가 편해진 것 같다.

한국에서는 양영림을, 줄리아드 예비학교에선 클라라 김을, 현재는 로렌스 레서를 사사하고 있다. 각 선생님들의 특징은 무엇이었는지?
양영림 선생님에게는 기초적인 면을 확실히 배웠다. 테크닉과 음악적인 면까지 모든 것을 정확하게 가르쳐주셨다. 클라라 김 선생님에겐 음악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를 배웠다. 음악을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도록 틀을 열어주신 분이다. 현재 레서와는 기본기와 음악성을 동시에 배우고 있다. 레서가 나에게 ‘악기는 손으로 하지만, 음악은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한다’고 한 말이 계속 기억에 남는다.

현재 보스턴에 있는 뉴잉글랜드 음악원을 다니고 있다. 이 학교를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로렌스 레서에게서 배우고 싶었다. 줄리아드 예비학교에서 사사했던 클라라 김 선생님이 레서의 제자여서 자연스럽게 레슨이 연결됐다. 레슨을 몇 번 받아보니 그의 모든 면이 좋았다. 고등학교 때부터 뉴잉글랜드 음악원을 가겠다고 내 자신에게 다짐했다. 줄리아드 음악원과 커티스 음악원도 입학시험을 보긴 했다. 부모님은 오히려 줄리아드에 진학하길 원하셨다. 하지만 나는 ‘집에서 나가는 일이 있더라도 뉴잉글랜드 음악원에 진학하여 레서에게 배우고 싶다’고 밝혔다.

로렌스 레서의 무엇이 그렇게 매력적이었나?
‘쿨내’ 나는 점. 겉으로는 무심해 보이지만, 제자들을 뒤에서 조용히 밀어주는 믿음직스러운 분이다.

한 곡을 무대에 올리기 전까지 어떠한 과정과 방법을 취하는지 궁금하다.
어릴 적에는 여러 음반을 들었다. 그러다 보니 연주할 때 나의 연주가 아니라 남의 음악을 따라 하는 것 같았다. 현재는 연주 느낌을 파악하는 정도로만 음악을 듣고, 선생님과 함께 이야기하며 나의 스타일을 만든다. 어릴 적 기본기를 잘 다져놓아 그런지 테크닉은 수월한 편이지만, 음악적으로 표현하는 부분은 아직 습관이 덜 됐다. 요즘 노래를 많이 부르고 있다. 음악적으로 어려운 부분이 있으면 걷거나 밥 먹으면서 계속 노래를 부른다.

작곡가가 성장한 문화 환경이 작품에서 음악적 정서로 표현되곤 한다. 유럽에서 음악을 배우고 싶은 생각은 없나?
올해 졸업하면 10월부터는 독일에서 공부할 예정이다.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스타일의 음악을 배우며 생각이 많이 달라질 것 같다.

실내악에는 관심 있는 편인가?
학교에서 3년 동안 같은 팀과 연주하고 있다. 아직 공부해야 할 것이 많아 욕심만큼 실내악에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기 어렵다. 학교에서 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정도다.

6월 15일, LG아트센터에서 리사이틀을 한다. 아직 레퍼토리를 못 정했다고 들었는데, 보통 연주 프로그램은 자체적으로 정하는지?
보통 자체적으로 정하고, 순서는 선생님과 상의하곤 한다. 오히려 누가 프로그램을 짜주면 편하다. 새로운 곡을 무대에 올리는 것이 즐겁다. 곡 욕심이 있는 편이다. 감동적이면서도 어려운 곡을 좋아한다. 브람스나 슈만의 작품은 ‘정말’ 잘하지 않으면 심심하게 들리지 않나. 그런 곡들을 잘 하는 첼리스트가 되고 싶다.

현대음악은 어떤가?
현대곡을 연주할 때는 ‘문태국의 스타일이 나타난다’는 평을 많이 들었다. 현대곡은 육체적으로 힘든 느낌인데, 슈베르트나 베토벤을 연주할 때는 육체와 정신이 동시에 힘들다. 현대곡이 편하다고 생각하면서부터 오히려 멀리하는 중이다. 잘 풀리지 않는 곡을 연주하며 스스로 한계를 벗어나고 싶다.

한 인터뷰에서 “요요 마는 강약 조절에 뛰어나다. 또 대중음악까지 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요요 마처럼 다양한 음악에 도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요요 마는 클래식 음악부터 크로스오버, 재즈, 대중음악까지 소화하는 레퍼토리가 굉장히 넓다. 앞으로 레퍼토리를 어떻게 늘려갈 예정인가?
요요 마를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고, 레퍼토리에 욕심도 많은 편이지만 아직은 크로스오버나 재즈를 할 단계는 아니다. 될 수 있는 한 클래식 음악을 깊게 파고들어야 한다. 선생님께서 “남자라 그런지 음악이 신나고 씩씩하기만 하다”고 하셨다. 레퍼토리를 넓히는 것보다는, 연주를 느끼는 습관이 몸에 박혀야 할 것 같다.

10년 뒤에는 어떤 모습이길 바라나?
10년 뒤면 한국 나이로 서른셋이다. 가능하면 그 전에는 공부를 끝냈으면 좋겠다. 좀 더 자유롭게 표현하고 연주하며 살고 싶다. 10년 뒤에도 지금의 나와 다르지 않길 바란다. 초심을 잃지 않고, 한결같이 음악을 좋아하고, 음악을 나누며, 인생을 사랑하는 청년이고 싶다.

사진 박진호(Studio Bo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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