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경의 여신 데메테르

유형종의 MYTH+MUSIC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6년 4월 1일 12:00 오전

딸을 향한 지극한 사랑. 영화 ‘바베트의 만찬’과 몬테베르디 오페라 ‘오르페오’, 오펜바흐 오페레타 ‘지옥의 오르페’에 그려진 데메테르와 딸 페르세포네 이야기


▲ 헤르메스가 지하의 페르세포네를 지상의 데메테르에게 인도하는 장면을 묘사한 프레더릭 레이턴의 ‘페르세포네의 귀환’(1891)

딸을 향한 지극한 사랑. 영화 ‘바베트의 만찬’과 몬테베르디 오페라 ‘오르페오’, 오펜바흐 오페레타 ‘지옥의 오르페’에 그려진 데메테르와 딸 페르세포네 이야기

데메테르는 올림포스 12신 중 하나로 제우스의 누이다. 여신 중의 서열로 보자면 제우스의 아내인 헤라에 이어 2위라고 할 수 있다. 맡은 역할은 땅의 여신이요, 그중에서도 곡물의 생장을 담당한다. 인류와 동식물의 삶에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지만 신들에게는 곡물이 필요 없어서인지, 혹은 권세와 거리가 있는 역할이어서인지 자주 언급되는 여신은 아니다. 그러나 데메테르가 곡물의 여신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하는 단어가 있다. 많은 사람이 아침식사 대용으로 먹는 시리얼(Cereal)의 어원이 바로 데메테르의 로마식 이름인 케레스(Ceres)에서 온 것이다. 땅의 여신이라는 점에서 그리스 신화의 맨 앞머리를 장식하는 가이아 여신과 겹치는 듯 보이지만 가이아가 근원적 의미의 땅, 즉 지구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데메테르는 그 생산력인 토양을 관장한다고 볼 수 있다.

모성애의 상징 데메테르

데메테르는 남편을 따로 두지 않았지만 남매지간인 제우스 사이에서 딸 페르세포네를 낳았다. 사실 데메테르 일화는 자신보다 페르세포네에 관한 것이 더 많다. 지하 세계를 다스리는 하데스에게는 아내가 없었다. 형제인 제우스, 포세이돈과 함께 세상을 삼분한 대단한 위치에 있었지만 저승의 왕이란 이유로 자신에게 걸맞은 여신을 찾을 수 없었다. 인간 여인을 유혹할 수도 있었지만 정식 결혼은 곤란한 일이었다. 이렇게 혼자 지내던 하데스의 눈에 적당한 상대가 들어왔으니, 바로 누이 데메테르의 딸 페르세포네다.

아름다운 페르세포네는 어머니의 피를 받아 땅을 사랑했다. 요정들을 데리고 다니며 백합과 수선화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것이 그녀의 놀이였다. 그런 페르세포네를 엿보던 하데스는 어느 날 갑자기 땅위로 솟아올라 단숨에 그녀를 낚아채 저승 마차에 태우고 땅 밑으로 사라져버렸다. 데메테르는 멀리서 딸이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급히 달려갔지만 이미 사라진 뒤였다. 너무나 갑자기 벌어진 일이라 제대로 증언해줄 만한 목격자도 없었다. 한참 수소문하다가 9일이 지나서야 태양신 헬리오스의 진술을 확보한다.

헬리오스는 아침마다 황금마차를 몰고 동쪽 하늘로 떠올라 낮 시간 동안 하늘을 가로질러 서쪽 하늘로 사라지는 신으로, 낮 시간에 지상에서 벌어지는 일은 누구보다도 많이 볼 수 있던 것이다. 헬리오스는 데메테르에게 “주범은 하데스요, 공범은 제우스”라고 알려주었다. 하데스의 불만이 폭발할 것을 염려한 제우스가 페르세포네를 납치한 것을 묵인했다는 것이다. 데메테르는 격분했다. 제우스는 페르세포네의 아버지 아닌가? 그런데 딸이 납치당하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니! 바람둥이 제우스는 수많은 자식을 두어 페르세포네가 그중 하나일 뿐이겠지만 데메테르에게는 금지옥엽과도 같은 딸이었다. 더 이상 올림포스를 쳐다보기도, 제우스가 다스리는 세상에서 어떠한 임무를 맡기도 싫어진 데메테르는 초라한 노파의 행색을 하고 세상을 떠돌아다니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아테네 서쪽의 엘레우시스라는 도시에 당도하는데, 이곳의 공주들이 데메테르가 범상치 않은 여인임을 눈치 채고 궁전으로 데려간다. 데메테르는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스스로 ‘베푸는 여인’이라고 소개하며 왕자의 유모가 되어주기로 한다.

한편 데메테르가 농사를 관장하는 일을 포기하자 인간 세상은 심한 흉년이 들어 혼란에 빠진다. 식량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게 된 인간들은 올림포스 신에게 제사를 지낼 수도 없었고, 그렇게 되자 신에 대한 숭배가 점점 사라져갔다. 제우스는 데메테르의 마음을 돌리고자 별의별 궁리를 다 해보았지만 페르세포네를 다시 데려오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하데스로부터 억지로 빼앗아 오기에는 명분이 없었다.

올림포스의 여신들에게서 보기 힘든 모성애의 상징으로서 데메테르의 일화를 다룬 오페라나 노래로는 딱히 언급할 만한 것이 없다. 그렇지만 영화로는 아주 훌륭한 것이 있다. 전체 줄거리가 아닌 모티브만 가져온 것인데, 바로 덴마크의 영화감독 가브리엘 액셀의 ‘바베트의 만찬’(1987)이다.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로 원작자는 자전적 소설 ‘아웃 오브 아프리카’로 유명한 덴마크의 작가 카렌 블릭센이다. 영화를 기준으로 줄거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영화 ‘바베트의 만찬’은 데메테르의 신화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 부엌에서 만찬을 준비하는 주인공 바베트

1870년대 초반, 덴마크 서부의 바닷가 작은 마을에 신앙과 봉사를 천직으로 여기는 늙은 자매 마르티네와 필리파가 살고 있다. 두 자매는 젊었을 때 각각 앞날이 창창한 스웨덴 장교, 파리 오페라에서 활약하는 유명한 바리톤과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목사였던 엄격한 부친 탓에 결혼하지 못하고 짧은 추억을 마음속에 간직한 채 살아간다. 세월이 흘러 부친이 죽은 후 새 목사가 부임하지 않자 자매는 직접 기도회를 이끌며 마을 사람들과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필리파에 대한 마음을 저버리지 못한 바리톤이 써준 소개 편지를 품에 안은 파리 출신 중년 여인 바베트가 찾아와 무보수 하녀로 일하겠다고 말한다. 갑자기 식구 하나가 늘었지만 바베트가 워낙 음식을 맛있게 하고, 알뜰하게 지출을 관리한 덕에 늙은 자매의 살림에는 오히려 여유가 생긴다. 이렇게 14년이 흐른 뒤, 바베트는 거금의 복권에 당첨된다. 자매들은 그녀가 곧 마을을 떠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바베트는 당첨금으로 자매의 아버지인 목사 탄생 100주년을 맞아 마을 사람들을 위한 프랑스 스타일의 만찬을 준비하겠다고 한다. 이윽고 평생을 금욕적으로 살아온 마을 사람들 앞에 최고급 식재료가 배달되고, 바베트는 고급 식기도 따로 마련한다. 식사에 대한 감탄의 말은 절대 꺼내지 않기로 약속한 마을 사람들은 차례로 나오는 최고의 식사에 결국 감탄을 감추지 못한다.

그리스 신화 학자 유재원 교수는 데메테르의 신화를 대입해 이 영화를 탁월하게 분석했다. 여기서 바베트는 데메테르의 화신이나 다름없다. 연회가 끝나고 손님들이 돌아간 후, 바베트는 자매들에게 왜 이런 일을 했는지 밝힌다. 14년 전까지 바베트는 파리 최고의 레스토랑에서 유명 주방장으로 일했다. 그러던 중 1871년 좌파 시민군이 파리를 장악하는 파리 코뮌이 벌어지고, 가장 주요한 고객이던 칼리페 장군은 잔혹하게 시민군을 진압한다. 그가 처형한 사람 중에는 바베트의 남편과 아들도 있었다. 상심한 바베트는 파리를 떠나 자취를 감추고 칼리페 장군이 가장 즐기는 식도락의 기쁨을 박탈하는 것으로 복수를 꾀한다. 그리고 덴마크의 작은 어촌에 신분을 숨기고 들어가 데메테르처럼 ‘베푸는 여인’으로 살아온 것이다.

청교도적인 어촌 마을에서 프랑스 왕족에게나 걸맞을 최고의 만찬을 베푸는 것은 데메테르 신화와는 관계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데메테르는 엘레우시스를 떠날 때 그곳 사람들을 위해 신비로운 비교(秘敎) 의식을 남겨놓는다. 바베트의 만찬과 의미가 통하는 부분이다. 늙은 자매는 바베트가 왜 복권 상금을 몽땅 써서 단 한 번의 성대한 만찬을 벌이는지 이해하지 못하지만 인간에 대한 사랑은 신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고, 바베트가 베푼 것에 대해서도 인간의 기준으로는 판단할 수 없다.

오페라 작품 속 페르세포네와 하데스

땅의 생산력이 사라져 세상이 쑥대밭이 된 채로 지속되자 제우스로서도 달리 방법이 없었다. 전령 헤르메스를 하데스에게 보내 무조건 페르세포네를 돌려보내라고 요구하기에 이른다. 하데스로서도 제우스의 뜻을 무시할 수는 없었지만 잔꾀를 부린다. 지하 세계의 석류를 먹여 완전히 이곳을 벗어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결국 제우스의 중재 아래 데메테르와 하데스는 페르세포네가 일 년의 3분의 2는 지상에서, 나머지 3분의 1은 지하에서 지내는 것으로 절충한다. 그래서 데메테르가 활기를 찾는 일 년 중 8개월은 농사가 가능하고 그렇지 않은 4개월(겨울)은 쉬게 된 것이다.

하데스와 함께 지내는 페르세포네의 모습은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의 오페라 ‘오르페오’(1607)에서 만날 수 있다. 죽은 아내 에우리디체를 되찾고자 지하세계로 내려간 오르페오는 아름다운 음악으로 황천의 강을 건너는 뱃사공을 재우고 하데스 앞에 선다. 페르세포네 또한 오르페오의 노래에 감격하여 남편 하데스에게 그의 호소를 들어주도록 사정한다. 4세기 전의 옛 오페라이지만 그 아름다움은 몬테베르디 이외의 작곡가의 작품에서는 느낄 수 없을 만큼 신비롭다. 오페라에서 페르세포네의 이름은 프로세르피나로, 하데스는 플루토로 바뀌어 있는데, 이는 로마 신화의 표기법이다.

자크 오펜바흐의 프랑스 오페레타 ‘지옥의 오르페’(1858)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체 신화를 패러디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1막 초반에 에우리디체가 죽는 장면은 페르세포네가 하데스에게 납치당하는 장면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는 신혼 초인데도 사이가 좋지 않다. 오르페오는 요정 클로이를, 에우리디체는 양치기 아리스티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리스티의 정체는 양치기로 변장한 플루토(하데스)다. 오르페오가 다른 여자가 있으면서 에우리디체를 의심하고 질투하자 에우리디체는 아리스티에게 남편이 무언가 일을 꾸미고 있으니 풀밭에 들어가지 말라고 소리친다. 그러나 이미 돌아가는 상황을 다 아는 플루토는 아무리 위험해도 두렵지 않다면서 의도적으로 풀밭으로 달려가고, 놀라 뒤쫓아 온 에우리디체는 독사에 물리고 만다. 죽어가는 에우리디체는 아리스티의 정체를 알게 되자 사랑하지 않는 남편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좋아하면서 조롱하는 내용을 담은 메모를 남기고 죽는다. 드디어 원하던 여인을 얻은 플루토는 신나게 에우리디체를 안고 황천으로 내려간다. 에우리디체가 기쁜 마음으로 하계로 내려간다는 점은 페르세포네의 상황과 다르지만, 아내가 될 만한 여자를 찾는 플루토의 모습은 페르세포네 신화와 비슷하다.

글 유형종
발레·오페라·클래식 음악 등 공연 예술 전반에 관한 집필과 해설 활동을 펼치고 있다. 현재 무지크바움 대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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